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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39화 (139/240)

139화

* * *

다음 날, 우리가 프리지어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왕의 전령이 도착했다.

국경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서둘러 출정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함께 있을 시간임 있을 줄 알았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반면, 세스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주 덤덤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세스가 왕의 명령서를 덥석 받으면서 그가 떠나는 것이 확정되어 버렸다.

순간, 나는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이성의 끈이 똑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아내들은 남편이 전쟁터에 끌려갈 때도 울지 않는다. 오히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는 괜찮다며 무사히 다녀오라고 당부한다.

마치 남편이 전쟁터로 떠나도 이렇게 하라는 모범을 보이듯이 말이다.

흥, 질질 짜면서 남편 발목 잡는 여자는 꼴 보기 싫기 때문이잖아. 아주 개뿔이시다!

남의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 가면서 의연하게 보내 주는 것까지 강요하다니, 세상이 왜 이렇게 각박해?

나는 이 비뚤어진 세상에 반항하듯 아주 펑펑 울었다. 눈 주변이 호두 알처럼 부풀어서 시녀장이 얼음주머니를 대어 줄 정도였다.

"마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전하는 분명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아니, 무사히 돌아온다고 어떻게 보장해! 천국에 상해 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죽으면 그냥 끝이잖아! 억울해서 더 울고 싶었지만 하도 울어서인지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비, 아무리 그래도 같이 가는 건 안 돼.”

세스가 짐 가방 속에 숨어 있던 나를 달랑 안아 올렸다. 버둥거리며 반항했지만 세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니, 왜 안 되는데요! 안전하다며, 어?"

그렇게 안전하다면 나도 데려가라고 떼를 쓰자 세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괜찮지만 당신에겐 위험하니까."

“아이고, 난 그딴 건 모르겠수다. 날 때려가든가, 아니면 이혼 도장을 찍고 가든가.”

나는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혼인 신고서 잉크도 안 말랐는데 전쟁터 출장이 웬 말인가! 회사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세스는 꼼짝도 안 하는 나를 그대로 안아 침대로 옮겼다. 엉겁결에 아주 편한 자세를 취하게 된 나는 눈을 깜빡였다.

"눈이 많이 부었군.”

세스가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많이 울었으니까요. 그리고 세스가 떠나면 더 많이 울 거거든요?”

“······조금은 기쁘다고 하면 화낼 거야?"

나는 뻔히 세스를 쳐다봤다. 세스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당신이 우는 건 아픈데, 그게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라고 생각하니 기쁘군."

“우와, 진짜 성격 나쁘다."

"알아.“

고개 숙인 세스가 내 눈꺼풀 위에 키스했다. 하도 우느라 부어서 손만 대도 쓰라릴 정도였는데, 세스의 입술이 닿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의 기쁨과 걱정, 미안함과 슬픔이 간질간질하게 밀려들었다. 나는 손끝으로 세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 온기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내가 또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자 세스가 다정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나는 무사히 돌아올 거야."

”······그걸 세스가 어떻게 알아요?"

“내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 그걸 끝내기 전엔 죽을 수도 없어.”

“그게 뭔데요?"

"복수.”

순간 눈물이 쑥 들어갔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내 옆에 누운 세스가 나를 꼭 껴안았다. 나는 정신없이 눈을 굴려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설마 세스는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세스에게 내가 본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라리사가 범인이라 말하면 세스의 상처만 후벼파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스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긴장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고마워.”

”······네?"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고맙다니?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본가 별채에 곰 인형을 두고 오는 것을 봤어.”

“어, 그. 봤어요?"

오늘 새벽, 나는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방을 빠져나와 화재가 있었던 별채로 향했다. 그리고 세스 곰과 꽃 몇 송이, 사탕 몇 개를 별채의 폐허에 놓아두었다. 내 나름대로의 제사상이었다.

세스에게 들킬까 봐 나름대로 조심했는데 그걸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스가 그런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고마워, 마거릿이 정말 좋아할 거야.”

아니, 마거릿은좋아하지 않을 거다. 악령이 된 그녀는 세스 곰이 인형이라는 사실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세스 곰을 바쳤다.

고통받는 마거릿을 위해 당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내 위안 삼아 제사상을 차린 것에 불과했다. 진실을 고백할 수 없었던 나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인형 원래는 세스에게 주려고 했던 건대 미안해요. 새로 만들어 줄게요.”

“당신이 그 인형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도 알고 있어 그래서 더 고마워. 나는 복수를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애한테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거든. 정말 무심한 오빠였지."

“아뇨, 죽은 사람에게 백 번 꽃을 바쳐 봤자, 살아 있을 때 한 번 꽃을 주는 것만 못한 걸요.”

현재 아서가 아무리 헌신적으로 마가릿을 돌봐도, 마가릿의 안에 있는 오빠는 세스뿐인 것처럼. 죽음은 많은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세스는 좋은 오빠였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세스의 눈이 크게 일렁거렸다. 나를 꽉 껴안은 세스가 속삭였다.

"예전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지?"

“네.“

나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사실일 테니까.

잠시 침묵하던 세스가 고해를 하듯 입을 열었다.

“그날, 마거릿을 구하러 저택에 들어갔을 때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어.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

"······."

“사람들은 나를 의심하다가 나중엔 마거릿의 짓이라고 하더군 마거릿은 종종 문을 잠그는 장난을 쳤으니까 실수로 불을 내고 혼이 날까 봐 문을 잠갔을 거라고.”

나를 껴안은 세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괴로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거릿은 어두운 창고에 갇힌 뒤로 밤엔 절대 문을 잠그지 않아. 분명 방에 다른 사람이 있었어.”

"버,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아요?“

"심증만 있었지만 비밀 통로를 보고 확실해졌어. 라리사 모어겠지.”

나는 세스에게 뭔가를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사람 진짜 눈치가 너무 빨라.

어쩌면 악령의 정체에 대해서도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내게 묻지 않는 것은······ 아직 거기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지도.

“하지만 라리사 모어만 내 원수라는 건 아니야. 그녀가 악행을 저지르도록 뒤에서 돕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내 소중한사람들의 미래를 빼앗겼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게 복수해야 해. 그 전엔 죽을 수도 없어.”

아니, 라리사 뒤에 배후가 있다고? 악녀 뒤에 흑막이 있었습니다야?

“내 말을 믿어?"

"네.“

하지만 세스가 묻는 순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즉각적인 내 반응에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믿어? 내가 동생을 살해하고 남에게 덮어씌운 것일 수도 있는데?"

그의 미소에선 차갑고 쓴 체념의 냄새가 났다.

"음, 그냥 세스 말이니까. 믿어요.”

세스가 배후가 있다면 있는 거지, 뭐.

내게 진실의 가치는 세스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그가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었다. 왠지 한 대 맞은 것 같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왜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만 해 주는 걸까?"

“세스를 좋아해서?”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자 세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나는 그에게 반쯤 짓눌린 채로 키스당하고 있었다. 이전의 조심스럽고 배려 담긴 입맞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산채로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감각에 익사당하는 기분으로 허우적거렸다. 평소엔 이쯤이면 기절해야 했는데, 벼락이라도 맞은 양 정신이 또렷했다. 아무래도 지금 정신을 잃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존 본능 때문인 것 같았다.

‘사, 살려 줘!'

숨이 모자라서 그의 등을 탕탕 치자 세스가 마지못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산소가 모자라서인지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아쉬운 듯 쪽하고 입을 맞춘 세스가 열기 어린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빨리,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응?"

"······으으."

대답 대신 다 죽어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작게 웃는 소리를 낸 세스가 다시 내 이마와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뜨겁고 습한 감정이 밀려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신을 어떻게 두고 가지? 정말 데려가 버릴까? 응? 이비······.”

소곤소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불이 목 끝까지 꼼꼼히 덮여 있고 벽난로가 훈훈한 열기를 내뿜었지만, 무언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세스가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짓말쟁이. 나 데려간다며'

나는 세스의 향이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울었다.

* * *

세스가 없어도 해는 뜨고 세상은 아주 잘 돌아갔다.

폐인처럼 침대에 늘어져 있던 나는 꽥꽥거리는 날고양이들의 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것들이 남의 집에서 왜 소음공해를 일으키고 있어!

세스를 떠나보낸 슬픔을 느끼려고 해도 이런 환경에 서는 불가능했다. 나는 집을 좀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대충 얼굴을 씻고 벌컥 문을 열고 나오자 주변을 서성이던 시녀들이 나를 보고 반색했다.

"마님 ! 괜찮으세요?"

“어쩜 좋아. 안색이 너무 창백해지셨어요.”

걱정이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 내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세스가 없는 동안 내가 여길 책임져야한다.

"다들 걱정시켜서 미안해.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더 이상 방에 틀어박히는 일은 없을 거야.”

내 말에 모두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시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드 부인, 지금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있나요?"

없으면 시끄러운 고양이들을 쫓아내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자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비탑에서 보고가 들어왔었습니다. 자기가 나바르의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마님을 만나 뵙길 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응? 나바르라고? 거기 세스가 전쟁하러 간 국경의 나라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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