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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38화 (138/240)

138화

와아앙비? 이게 무슨 소리야?

인턴으로 들어올 때도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저, 폐하 상식적으로 봤을 때 제가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굉장히 확실하게 듭니다."

내가 불안한 눈빛을 보내자 왕이 픽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널 위해서라도 짐이 당장 죽을 생각은 없으니. 세스 역시 임시로 후계를 맡고 있을 뿐, 왕 위에 오를 생각은 없을 거다.”

왕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국을 위해 후계자는 반드시 필요하지 나는 세스의 딸이나 이들을 왕위에 올릴 것이다."

"예? 하지만 폐하께선……."

“짐은 혼인할 생각이 없다. 너 또한 말하지 않았느냐. 짐의 옆에 서려면 그럴 자격이 있는 자여야 한다고. 세상에 그런 남자가 없으니 그냥 혼자 살 수밖에.”

왕은 세스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결심을 굳힌 듯했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 왕의 태도가 떠올랐다. 내가 세스의 아이를  가질까 봐 걱정했던 것도.

‘세스의 아이가 다음 왕이니까 그랬던 거구나.’

라리사를 그렇게 경계한 것도, 세스를 어떻게든 결혼시키려고 했던 것도, 내가 야망을 가질까 봐 경계한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됐다.

그때, 세스가 뜻밖에도 강경한 태도로 왕에게 맞섰다.

“폐하 제 자식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하게 두고 싶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길을 없애 버리는 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왕은 화를 내는 대신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놀렸다.

"네가 웬일이냐? 전에는 자식 낳을 생각 없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갑자기 낳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느냐?"

세스는 찌증을 숨기지 않고 왕을 노려봤다.

“폐하, 신은 지금 신혼입니다. 신부를 두고 전장에 나가기 두려워 잠적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내 참, 성질하고는 알았다. 그만 놀리마."

혀를 찬 왕은 다시 나를 보았다.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세스가 내 후계자 역할을 하고 있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놈들이 많다. 나바르 왕국과 분쟁이 생겼는데도 세스가 출전하지 않으면, 그것을 빌미 삼아 귀찮게 굴 거다.”

“그냥 무시하면 안 되나요?"

“그럼 세스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을 때 걸림돌이 되겠지. 패역한 자의 자식을 왕으로 받들 수 없다면서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세스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 역시 왕의 욕심일 뿐이니까. 불만스러운 내 표정을 보고 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블린 세스가 후계자 자격을 잃으면 카스티야 왕이 이 나라를 차지할 명분을 갖는다.”

“예?”

“그놈 역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으니까. 엄밀히 말해서 세스의 다음이다.”

아니, 어쩌다가 타국의 왕이 계승권을 갖게 된 거지.

“어쨌든 상대는 세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덫을 쳤다. 하지만 짐 역시 세스를 무작정 위험한 곳으로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왕이 옆에서 대기 중인 피오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피오나가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백탑주?"

정확히 말하면 백탑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백탑주와 같은 틀에서 찍어 낸 것처럼 꼭 닮은 사람들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피부. 은은한 빛을 내는 황금색 눈동자와 커다란 귀까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 외모다.

“그레이 일족이다. 하나하나가 일류의 전사이며 마법사지 이들이 목숨을 바쳐 세스를 보호할 거다.”

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앞에 선 이들이 무릎을 꿇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분의 반려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저희의 영광이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당황한 나는 세스를 바라봤다. 침착하게 그레이들을 살핀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은 아닌 것 같다는 뜻이었다.

‘이들을 믿고 세스를 보내라는 건가?'

내게 세스를 붙잡을 자격은 없다. 나는 대역일 뿐이지, 진짜 공작 부인도 아니니까. 왕이 나를 설득하고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알고 있는데, 대역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아는데, 도저히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멍하게 서 있는 나를 세스가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폐하,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러가게 허락 해 주십시오.”

“그래, 짐이 눈치가 없었구나. 어서 가서 쉬어라.”

살짝 고개를 숙인 세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세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후계자고 뭐고 난 모르겠으니 그냥 같이 있자고 하고 싶은데 .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비, 미안해.”

세스의 속삭임에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 * *

우리는 엘마이어 본가로 돌아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프리지어 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신혼여행도 끝난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내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아서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돌아왔군요! 여길 떠나 버린 줄 알았어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아서가 나타났다. 다행히 세스의 공격에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보낸 다음, 씻고 오겠다는 핑계로 욕실에 들어섰다.

욕실 문을 닫자마자 곧바로 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에도 이러는 건 아니죠?"

-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그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 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거릿 공녀는요? 혹시 다쳤어요?“

-조금 놀란 것 같지만 괜찮아요. 풀이 죽어서 별채로 돌아갔어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스의 손에 마거릿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거릿을 도와줄 건가요?

아서가 희망에 가독 찬 눈빛으로 나를 봤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마거릿 공녀는 화재가 아니라 라리사에게 살해당했어요. 알고 있었나요?"

-라리사? 라리사 모어를 말하는 건가요? 그녀가 감히 마거릿을 죽였다고?

아서는 당황한 한편 분노하고 있었다. 유심히 살폈지만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라리사가 동생을 학대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세스가 발견하고 고발하기까지 했는데.”

-뭐라고요? 학대?

학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난리를 치던 그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거의 반투명해진 상태였다.

-그때 저는 기사들을 이끌고 몇 달 동안 영지를 시찰 중이었어요. 집으로 돌아간 것도 어머니의 기일 때문이었고요.

몇 달 만에 귀환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공녀를 학대한 라리사가 어떻게 과거의 잘못을 씻고 공작가의 양녀가 됐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서는 자기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저 절로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네요. 당신이 라리사를 도운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모자가 있어요. 라리사가 공녀를 죽일 수 있도록 도운사람이요.”

라리사는 분명 그날 공녀를 학대한 혐의로 갇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거릿의 방에 나타나 그녀를 살해했다.

"분명 가문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자예요. 짐작가는 사람이 있어요?"

-모르겠어요. 비밀 통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가문의 사람들뿐이니까.

“그럼 당신 아버지가 라리사에게 통로를 알려 줬을 가능성도 있나요?"

-······아뇨, 당신이 왜 아버지를 의심하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가문에 자부심을 갖고 계신 분이 었어요. 가문 밖의 사람에게 알려 주실 리가 없어요.

아서가 보기 드물게 정색했다.

아버님을 제물로 바쳐 마거릿 공녀의 마음을 풀어 보려고 했던 나는 속으로 좀 실망했다.

-아, 한 명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요?”

-트리스탄 숙부요.

트리스탄이라면, 세스가 털색 때문에 고민하게 만든 그 초상화의 주인 말인가?

-숙부는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공작이 되었고, 숙부는 그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죠.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키려 다가 들켜서 처형당했던 모양이다. 거기까지 말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소문이지만, 라리사가 숙부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네?"

갑자기 막장 드라마가 됐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숙부가 그녀에게 비밀 통로에 대한 정보를 남겼을 수도 있어요.

"알겠어요. 한번 알아볼게요.”

아무래도 라리사를 조사해 봐야 할 이유가 늘어난 것 같았다.

-이제 마거릿을 도와줄 건가요?

아서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아서, 마거릿은 지금도 살해당했던 순간에 묶여 있어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세스가 준 인형을 찾아서 헤매고 있죠.”

처음엔 마거릿이 찾고 있는 것을 가져다주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거릿이 원하는 것은 오빠가 자신에게 줬던 인형이었다. 이미 타 버려서 존재하지 않는 인형.

“인형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요. 그러니 시간이 필요해요. 1년만 더 기다려 주겠어요?"

1년 뒤엔 죽은 자와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정령수의 첫 꽃이 핀다. 그걸 사용해서 세스가 마거릿에게 새로운 인형을 주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1년이요?

"네, 1년 뒤에는 방법이 생길 것 같아요.”

굉장히 잔인한 요구였다. 11년을 버텨 온 사람에게 1년을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은, 희망을 주었다가 뺏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아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기다릴게요. 마거릿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저는 마거릿이 학대당한 것도, 살해당한 것도 몰랐던 못난 오빠인걸요. 일 년이든 백 년이든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어요.

아서는 닿지 않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잡은 것처럼 떠 있을 뿐이지만 왠지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요, 이블린.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아뇨, 당신의 존재야말로 제 구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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