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 *
정령수에서 치솟은 초록빛이 아스트리아의 하늘을 꿰뚫는 순간이었다.
옥좌에 앉아 있던 소년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걱 쏟아졌다. 옆에 서 있던 노인이 경악하며 그를 부축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세계수, 이 추잡한 망령이…….”
소년의 눈이 피보다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인간보다는 악귀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아스트리아 전체에 결계가 쳐졌다. 방심하다가 완전히 당했어.”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 죽어 가는 세계수에게 그럴 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노인의 반박대로 신들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세계수의 자식인 정령수와 세 마리 신수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의 협력 없이 결계를 펼치는 것은 아무리 세계수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가 믿든 안 믿든 사실이다 결계가 있는 이상 노예 들을 움직이기는 글렀어.”
소년에겐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노예들을 각 나라에 보내 혼란을 일으키는 데 사용했다.
변종 마나석을 폭발시켜 127명의 사망자를· 낸 닉스 강의 참변 또한 그의 솜씨였다.
하지만 아스트리아에 결계가 처지면서 더 이상그곳의 노예들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아쉽군. 이럴 줄 알았으면 라리사를 버리는 게 아니었어. 한 번 정도는 더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대업에 방해가 되는 계집 이었습니다."
노인이 공손하게 손수건을 바쳤다. 대충 입가의 피를 닦아 낸 소년이 피식 웃었다.
"알아, 하지만 욕심만큼은 제법 쓸 만했지 노예도 아니면서 그렇게 맹목적인 여자는 처음이었거든."
라리사의 활약 덕분에 소년의 방해물은 세스 엘마이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를 제거하면 소년의 오랜 꿈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아스트리아 왕도 헛된 발버둥은 그만둬야 할 텐데. 7년 전쟁에서 승리하면 뭐하나.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인 것을.”
아스트리아 왕실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직계인 왕과 왕의 동생이 불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였고 마침내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걸림돌만 제거하면 소년은 합법적인 아스트리아의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아스트리아와 카스티야, 그 외의 수많은 나라들을 통일한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나바르 왕에게 서두르라는 지시를 내려. 분쟁을 일으켜서 세스 엘마이어를 국경으로 끌어내라고 해.”
"주인님, 아직 태자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자의 세력이 남아 있는 이상 뒤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태자가 죽었다고 발표해라. 어차피 검은 꽃의 뿌리를 구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야. 절대 해독할 수 없도록 손을 써놓았으니.“
"과연, 영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노인이 감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귀찮은 얼굴로 손을 내저은 소년이 다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결계에 부딪혀서 아직 어린 몸뚱이가 큰 타격을 입은 듯했다.
“어린 몸은 이래서 귀찮아. 몸을 옮겨 가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 이였으면 좋겠군.”
아직 어린 소년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인간에게 자신의 조각을 심어 노예처럼 복종시키는 정도였다.
‘이전의 몸이 죽지 않았다면 7년 전쟁에서 패배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때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나빴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힘을 사용한 터라 육체의 내구도가 빠르게 소모됐다.
그래도 몇 년은 더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스 엘마이어의 공격에 당해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그때 찔린 가슴의 상처가 괜히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는 소년을 눈치챈 노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가서 약을 달여 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좀 쉬겠다.”
한결 더 파리해진 소년이 옥좌에 기대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린 노인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지금 결계가 나타나다니 좋지 않군.'
소년과 노인의 목표는 달랐다. 노인은 신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시 마도시대를 여는 것을 꿈꿨다. 그런 의미에서 정령 결계의 부활은 그의 목표가 위험해졌다는 경고였다.
‘따로 정보를 모아야겠어. 어쩌면 이번 일도 사도가 강림했다는 증거 일지도 몰라.’
사도, 신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신성한 존재.
하지만 사도라고 해서 이렇게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지상에 내려오는 순간 인과율에 의해 엄청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모르겠군.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능력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순조롭다고만 생각했던 미래에 짙은 안개가 끼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오랫동안 공들여 온 대업이 무너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그레이 일족의 장로 메티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신성한 초록빛이 그녀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물들이는 중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레이인 메티스에겐 창공을 뒤덮은 결계가 똑똑히 보였다. 온몸이 떨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런,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당장 축어도 여한이 없구나.”
감격하는 그녀와 달리 백탑주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이블린이 일으킨 기적을 목격한 바였다. 그래서 정말 놀라운 것은 저런 풍경 따위가 아니라 이블린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장로님, 아직도 이블린 님을 모시는 일에 번대하십니까?"
백탑주는 이블린이 위대한 존재이며, 일족이 북부로 이동하지 말고 이곳에 남아 그녀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일족은 하찮은 인간이 위대한 존재라는 그의 말을 비웃었다.
메티스 역시 인간 여자에게 흘려 앞뒤 분간도 못 한다며 백탑주를 질책했다.
그때를 떠올린 메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생각이 짧았다. 위대한 존재께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위폐하신 것을. 일족은 모두 그분의 명을 받들며 복종할 것이다.”
감히 하찮은 인간이라는 말로 위대한 분을 모욕하다니. 메티스는 당장 이블린의 발 앞에 이마를 부딪치며 사죄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 왜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지?"
“모릅니다. 그분께선 자신의 정체를 밝히길 꺼리십니다."
백탑주는 다소 냉담하게 답했다. 그는 일족에게 이블린에 대해 밝히게 된 것이 괴로웠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그녀의 존재를 끝까지 비밀로 간직했을 것이다.
“아니, 어째서 이름과 정체를 숨기신단 말인가. 숭배받아 마땅한 존재이시거늘.”
메티스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분 역시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것일지도.'
백탑주가 봤을 때 이블린은 사도가 아니었다. 사도라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단순한 인간이라기엔 그녀는 너무나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인간과 사도가 섞인 것 같군.'
인간의 얼굴을 한 사도를 상상한 백탑주는 터무니없다며 웃고 말았다. 어쨌든 이것으로 일족은 과거처럼 위대한 존재를 섬기게 되었다.
‘그분의 추종자는 나 하나로 족했는데.'
계속 씁쓸해지는 마음을 한숨으로 달랜 백탑주가 초록색으로 물든 하늘을 다시금 바라봤다.
* * *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저것들이 알아서 발광을 하더란 말이냐?"
“네, 폐하.”
왕의 추궁에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니 꺼릴 것도 없었다.
“······그래?”
하지만 왕은 왠지 모르게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아니, 진짜 저랑은 상관없다니까요!
정령수가 화려한 빛으로 몸을 감싸고 하이빔을 쏘아 올리는 바람에 잠자던 공작가 사람들이 다 뛰쳐나왔다. 정말 엄청난 민폐였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달래 돌려보내자마자 이번엔 왕궁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갑자기 솟아오른 빛기둥의 정체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그때쯤엔 이유 없이 빛나던 애들도 다 원래대로 돌아와서 증거랍시고 보여 줄 것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해명을 위해 급하게 입궁해야 했다.
다행히 내가 계속해서 결백을 주장하자 왕도 더 이상 추궁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를 지긋이 노려보던 왕이 한숨을 쉬었다.
“이블린, 네 말을 믿겠다. 그런데 신혼여행 간답시고 하객들마저 팽개치고 떠난 녀석들이 왜 거기에 있었던 것이냐?"
“헉!”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세스의 진-한 키스에 기절하는 바람에 그대로 식장을 뛰쳐나와 신혼여행을 떠난 것을!
당황하는 나를 본 왕이 마치 덫에 걸린 쥐를 보는 고양이처럼 씨익 웃었다.
“신혼여행이 끝난 모양이니 당장 일에 복귀해도 상관없겠구나."
“아, 아니! 폐하!"
집에서 노는 게 발각되었다고 휴가를 까신다니요. 소녀 정말 억울하옵니다. 흑흑.
왕은 울상을 짓는 나를 보고 만족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너희에게 미안한 말을 해야 할 것 같구나."
“예?”
“나바르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처음엔 내전이라 생각했는데, 이것들이 국경을 향해 울려들고 있어."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나는 세스를 돌아봤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왕의 말을 듣다가 입을 열었다.
"분쟁을 유도하는 겁니까?"
"태자가 쓰러진 이런 시기에 전쟁을 하자는 건 정상이 아니야 같이 망하자는 것이 아니면 달리 노리는 게 있는 거겠지."
왕이 미소 띤 얼굴로 세스를 바라봤다. 한숨을 쉰 세스가 답했다.
“저를 노린 함정이겠군요.”
“그래, 나바르 왕국과 협상하고 태자와 친분을 쌓은 이는 너뿐이다. 제일 먼저 책임자인 너를 불러서 대화 하자고 수작을 부리겠지.”
어,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전부 이해는 못 했지만 대충 세스가 국경의 전쟁터로 끌려간다는 것인가?
“일이 그렇게 되면 함정이라도 피할 수는 없겠군요.”
"함정은 피해야죠! 무슨 소리예요!“
나는 세스의 말에 펄쩍 뛰었다. 하지만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블린. 세스가 아니면 짐이 직접 가는 수밖에 없다.”
"어째서요?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요?"
국경에 분쟁이 일어난 거라면 그냥 장군 같은 사람을 보내면 되잖아 어째서 세스나 왕이 가야 하는 거지?
반쯤 따지듯이 묻자 손끝으로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린 왕이 말했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스가 내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예?"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세스가 다음 왕이 된다. 그리고 이블린, 너는 왕비가 되겠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