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 *
마거릿 그 뒤로 계속 인형을 찾고 있었던 거야?
11년 동안이나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당신을 죽인 그 여자는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반성은커녕 공녀인 당산의 자리를 빼앗고, 세스에게 동생과 형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웠는데.
용서할 수 없어.
나는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도와줘요!
분노로 이를 악문 나는 누군가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어두웠던 시야가 환히 밝아지면서 낡은 세탁실이 보였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띵!
그때 주크가 앞을 보라고 재촉했다.
-끼아아아악!
내가 환상에 사로잡힌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거꾸로 뒤집힌 악령이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이비, 괜찮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세, 세스?!”
악령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세스였다.
아니, 침대에서 코 자고 있어야 할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나를 보고 세스가 빙긋 웃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무섭게 느껴졌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헤맸는데, 늦기 전에 찾아서 다행이야."
“저, 그게……."
“자세한 이야기는 이걸 해치운 다음에 듣지.”
고개를 돌린 세스가 싸늘한 눈으로 악령을 노려봤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안 돼! 해치지 말아요!"
하지만 내가 달려가는 것보다 세스가 악령을 내리찍는 것이 더 빨랐다.
그리고 그때, 절묘하게 날아온 나무통이 대신 공격을 맞고 산산조각 났다.
빠각!
-하지 마! 마거릿을 내버려 둬!
아서가 주변의 물건들을 집어 던져 세스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세스가 성가신 얼굴로 아서 쪽을 돌아봤다.
"악령 주제에, 동료라도 거느리고 있는 건가?"
“세스! 그만둬요!"
"금방 끝날 거야. 걱정하지 마.”
세스의 팔을 붙잡은 나는 그가 굉장히 화가 났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내 태도만 봐도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 지금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셈이니까?'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더, 더 이상 못 막겠어요. 어떻게 좀 해 봐요!
아서가 죽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세스의 공격을 막기 힘든 모양이다.
"주크!"
나는 세스를 끌어안은 채 다짜고짜 왕의 길을 열었다. 세스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이동이 시작된 뒤였다.
‘어디로 가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프리지어 궁으로 갔다간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왕궁은 더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기에도 그렇고.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과감하게 선택했다.
우리가 떨어진 곳은 다름 아닌 정령수가 있는 정원이었다 이곳이라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고 정령수가 반갑다는 듯이 은은하게 빛나는 가지를 흔들었다.
아냐, 지금 그럴 분위기 아니야.
나는 정원에 내려앉은 뒤에도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났을까? 아니, 당연히 화가 났겠지 강제로 여기 끌고 온 거니까.
“이비."
그때 세스가 나를 불렀다. 나도 모르게 움찔해서 그를 붙잡은 손을 놓고 말았다. 그러자 세스가 내 손을 잡아서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당신에게 화난 게 아니야."
"저, 정말요?“
“나 자신에게 화가 났지. 당신이 악령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도 또 늦은 것 같아서…….”
한숨을 쉰 세스가 내 손끝에 입술을 눌렀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직 손이 차갑군. 안고 있어도 돼?"
붙잡고 있던 손을 내가놓아 버린 게 신경 쓰이는듯했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다정한 걸까.
그런 억울한 일을 겪고, 심한 상처를 받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올곧을 수 있을까. 나라면 분명 세상을 원망하는 쓰레기가 되었을 텐데.
"세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정말좋은사람이면 당선이 첫날밤에 날 버리고 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원망이 가독 담긴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용서해 주는 척 방심시켜 놓고 이럴 수가!
“그, 그러고 보니 제가 나간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저 때문에 쨌어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는 나를 보고 세스가 작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신부가 품에 안겨 있는데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남자가 더 드물지 않을까."
”헉!"
설마 자는 척하고 있었던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작은 기척에도 예민한 그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깨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다.
으으,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당신이 갑자기 일어나서 처음 보는 통로를 열기에 깜짝 놀랐지 뒤따라가려고 하니 입구가 열리지 않더군.”
추격자를 막기 위해 통로 안에 누군가가 있으면 문 이 열리지 않도록 설계된 모양이었다.
놀란 세스는 신방 밖으로 뛰쳐나와 나를 찾아 헤맸다고 한다. 결국, 악령이 주변을 때려 부수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지만 그동안 꽤 마음을 졸였다고.
"온갖 생각이 다 들었어. 새신부가 첫날밤에 도망갈 정도로 내가 매력이 없나하고.”
“절대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매일 음흉한 눈으로 세스를 보고 있다고요! 억울합니다!"
내가 억울해서 버둥거리자 당황한 세스가 날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농담이야 난 당선이 뭔가에 흘린 줄 알았어. 나도 모르는 비밀 통로를 거침없이 열고 들어가기에."
세스가 모르는 비밀 통로라는 말에 숨이 막혀 왔다. 공작인 그가 자기 가문의 비밀 통로를 모르다니, 이건 정말 문제가 있었다.
‘아버님,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이유로 세스를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거지? 왜 라리사를 이렇게까지 감싸는 거지?
친딸을 학대한 것을 용서할 정도로 양녀가 사랑스러운 건가? 단지 죽은 아내를 닮았다는 이유로?
‘아니, 무슨 이유가 있든 용서 못 해. 세스가 당한 일은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흴 찾을 것이다. 찾아내서, 복수할 것이다.
이를 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스가 물었다.
“이비, 어떻게 된 일이지 설명해 줄 수 있어?"
나는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끝까지 세스에게 안 들키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워낙 눈치 빠른 남자니까.
그렇다고 처음부터 들키는 것은 내 계획에 없었지만.
“사, 사실은 고용인 구역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궁금해서요.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서에게서 악령이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확인하러 간 거니까.
"저, 그런 거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심령 스팟이라든가, 유령이 나오는 저택 같은 거요. 설마 진짜로 그런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사실은 싫어한다. 호러도 싫고, 좀비든 유령이든 무서운 것은 다 싫다. 하지만 세스가 상처받을 바엔 그냥 내가 철없고 생각 없는 애가 되는 게 나았다.
"비밀 통로는 시녀장의 말을 듣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건드려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그렇군.”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내 말을 믿기보다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넘어가 주겠다는 것 같았다.
“다음엔 혼자 나가지 마. 나와 같이 가겠다고 약속해."
"약속할게요.”
다음엔 이렇게 세스를 속일 일이 없을 것이다. 당당하게 원수를 갚고, 모든 것을 밝힐 테니까.
"당신 손, 아직도 차갑군.”
세스가 내 손을 끌어다 천천히 입을 맞췄다. 조금 전과 비슷한 행동인데도 이상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묘하게 유혹적인 느낌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세, 세스······."
이상하다.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기억이 안 났다.
다른 생각은 모조리 사라지고 세스의 입술만 보였다. 홀린 것처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키스하듯 고개를 숙이다 멈칫했다.
아니, 갑자기 왜 멈춰?!
"불청객이 있군.”
불만스럽게 시선을 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정령수의 가지 곳곳에 시커먼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새파란 불빛이 곳곳에서 번쩍번쩍 빛났다.
-끼루루루?
-고르르르?
”으아아악!”
놀란 나는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기겁하며 주저앉으려는 나를 세스가 부축하며 속삭였다.
“쉿. 그리핀이야."
"네?"
“결혼식 날 봤던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
세스의 말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양이들이 생각났다. 개들이 내 웨딩 마차까지 부숴 먹었지. 아니, 잠깐. 개들이 왜 여기 있지?
세스가 작은 불빛을 위로 띄우자 나무 위에 옹기종기 참새처럼 앉아 있는 그리핀들이 보였다.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쟤들이 왜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집에 있는 거죠?"
“당신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정령수를 보고 눌러앉은 모양이야.”
떠돌이 고양이도 아니고, 왜 남의 마당에 동지를 틀 어? 주인 어디 갔어, 주인?!
-그르릉.......
그때 정령수 뒤에서 코크 곰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을 다그쳤다.
"코크, 어떻게 된 거야?"
정령수에 진심인 녀석은 뭔가가 다가오기만 해도 이를 드러내며 위협해서 쫓아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도 모를 날고양이들이 정령수를 차지하게 내버려 두다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크 곰은 말없이 새파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삐이이!
그 순간, 멀리서 낯익은 젝젝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흑룡의 머리 위에 올라탄 복실이가 호수를 건너오고 있었다. 반가워서 팔짝팔짝 뛰는 녀석이 보였다.
“아이고, 들켰네."
“조금 전의 비명을 들었겠지. 복실이는 당신 목소리의 파동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 목소리의 파동이라니, 뭔가 좀 낭만적으로 들린다.
그때 하얀 것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게 보였다. 나는 전보다 더 빨라진 복실이를 받아 안았다.
-구구우우!
"복실아, 진짜 보고 싶었어!"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실이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코크 곰이 푸른빛, 마지막으로 날고양이들이 황금빛에 휘감겼다.
“어, 어어?"
그리고 셋의 빛을 받아먹은 정령수가 초록색 빛기둥을 힘차게 하늘로 쏘아 올렸다.
야, 이 녀석들아! 나 지금 여기 온 거 비밀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