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 *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나는 흥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이대로 출구까지 가는 건 쉬웠다. 통로를 따라 걷기만 해도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저택의 외부가 아니라 고용인 구역이었다. 그러니 도중에 나가는 곳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무작정 해매는 중이었다.
‘첫날밤에 신부가 밖을 돌아다니면 안 좋은 소문이 날 것 같아서 비밀 통로로 왔는데…….'
이러다 아무것도 못하고 날이 샐 것 같았다.
“주크, 너도 길 모르겠지?"
-우우웅…….
주크가 면목 없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녀석의 잘못이 아니기에 검집을 토닥여 주었다.
“이런 길은 복실이가 잘 찾는데.”
-띠이잉! 띵!
내 중얼거림에 주크가 열심히 반응했다. 그러게 왜 복실이를 데려오지 않았나는 항의 같았다. 얘도 참 복실이를 좋아한다.
“아니, 애가 다 컸다고 신혼여행에 안 따라오겠다는 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같이 가자고 설득해 봤지만 복실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까미가 뭔가 교육을 시킨 것 같았다. 내 말에 잠시 시무룩해졌던 주크가 갑자기 황금색을 내뿜기 시작했다.
“뭐? 지금 집으로 가서 복실이 데려오라고?"
-띵!
“그럼 복실이를 이용하는 거잖아. 주크, 너 그런 검이었니?"
-띠잉······.
실망한 듯 주크의 빛이 팍 꺼졌다. 덕분에 주변이 어두워져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으아악!”
-띠이잉!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주크와 나는 펄쩍 뛰었다. 주크가 서둘러 빛을 내뿜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서가 보였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여긴 정말 위험해요. 어서 침실로 돌아가세요.
“전 그 위험을 보려고 온 거예요.”
나는 서둘러 목적을 밝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서의 도움을 받아 고용인 구역으로 나가야 했다.
-어째서죠? 악령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아서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했다. 나는 주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악령의 정체가 마거릿 공녀인지 확인해야하니까."
그러자 아서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역시 안 좋은 예감이 적중해 버렸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거릿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녀를 막았으니 그렇겠죠.”
아서가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이 그렇게 어린 모습인 것도, 마거릿 공녀를 막느라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해서죠?"
-······.
“그러다가 당신이 사라지면요? 그 뒤에도 마거릿 공녀가 아무도 해치지 않을까요?"
아픈 곳을 찔렀는지 아서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으아아, 무서워! 섬뜩한 광경에 어깨가 절로 부르르 떨렸다.
“지, 지금 두 사람에겐 도움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제가 직접 보고 해결하고 싶은 거예요."
-도울 수 없어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어!
아서가 거칠게 머리를 휘저었다. 덕분에 케첩이 휘날리듯 피눈물이 사방팔방 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도울 수 없는데요?"
-마거릿은 신을 믿지 않으니까. 어떤 기도도, 설득도 그 애한테는 통하지 않아요.
고용인 구역에 유령이 나온다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신관을 불러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 참, 당연하죠. 공녀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신이 널 보살펴 준다는 말을 하면 믿겠어요? 그럴 거면 진작 좀 알아서 잘하지 싶겠죠."
-······어?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지 아서의 얼굴이 멍해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가물었다.
-그, 그럼 어떡하죠?
“왜 악령이 됐는지부터 살펴봐야죠. 억울해서 그런 건지, 무덤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따로 제사상에 뭔가를 올려 달라는 건지.”
처녀 귀신조차 `사또오-억울하옵니다―'라고 민원을 넣는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신관을 불러 다짜고짜 퇴치해 버리겠다는 이쪽이 더 이해가 안 된다.
“자, 그러니까 어서 안내해 주세요."
당당한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서가 부탁의 말을 건넸다.
-대신 마거릿을 해치지 말아 주세요.
“아이고, 저는 그런 힘이 없답니다."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아서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아주버님이?
-이쪽으로 오세요.
아서는 나를 숨겨진 출구로 안내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장작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한밤중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어 나는 매우 손쉽게 고용인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내 낡고 허름한 복도가 나를 반겨 주었다. 한때는 밝은 녹색이었을 벽까지 우중충하게 빛이 바래서 무척 을씨년스러웠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티 가났다.
"공녀는 언제 나타나죠?"
-곧이요. 자정이 지나면 별채가 있던 자리에서 나타나서 이곳으로 온 다음 새벽까지 헤매고 다녀요.
"목적이 뭔지는 모르죠?"
-뭔가를 찾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대화를 할 수가 없거든요.
아서는 침울한 얼굴로 설명했다. 나는 그가 피눈물을 멈춘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가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챈 나는 복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스스슥.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가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쁘고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뭉쳐진 것처럼 새까맣고 구물구물한 것이 복도 끝을 거멓게 물들이며 기어 오고 있었다.
악령.
그것은 꼭 거대한 네발 동물처럼 보였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도 복도를 꽉 메울 정도로 덩치가 컸다.
”와 이건 내 예상 밖인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악령이 꼭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라는 법은 없지.
-띵!
주크가 정신 차리라는 것처럼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악령의 관심을 끌어 버린 것 같았다.
구물구물 다가오던 악령이 멈칫하더니 갑자기 사사삭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기겁한 나는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아서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주크!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우우웅······.
주크가 미안한 듯이 빌빌거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악령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던 우리 는 낡은 세탁실로 내몰렸다.
콰앙!
악령이 문을 부술 기세로 방에 들이닥쳤다. 나는 급히 창을 열어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녹문 창문은 꼼짝도하지 않았다.
"으아악, 저는 맛이 없어요!"
덮쳐 오는 악령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이었다.
탕!
총을 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악령이 튕겨 나갔다. 어느새 나타난 아서가 악령을 들이박은 것이다.
-끼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른 악령이 온몸에서 붉은 물을 왈칵왈칵 토해 냈다. 하지만 아서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악령을 몰아붙였다.
얼떨떨해하던 나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악령 근처로 다가갔다. 아서의 공격을 받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손울 대 볼 생각이었다.
‘이걸로 안 되면 바로 도망치자.’
핏물이 흐르는 검은 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악령의 몸에 닿는 순간, 온몸이 얼음물에 푹 빠진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손을 뗄 틈도 없이 한기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마거릿은 오빠가 좋았다.
그녀를 멀리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빠는 마거릿을 좋아했다.
그래서 마거릿은 오빠가 슬퍼하는 것이 싫었다.
“그럼 죽어 버려 네가 축으면 모두가 기뻐할 테니까."
라리사가 차갑게 웃으며 속삭였다. 네가 죽지 않으면 네 오빠를 괴롭힐 거라고 매일 밤 소곤거렸다.
그런 그녀가 무서워서 울고 있을 때, 오빠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안해, 마거릿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오빠는 어느 때보다도 슬퍼했다. 하지만 그건 오빠의 잘못이 아니었다.
라리사는 잘 보이지 않는 곳만 때렸으니까. 모두가 마거릿의 말을 믿지 않고 거짓말쟁이라고 했으니까.
“더 이상은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누구도 너를 때리지 못하게 할게.”
오빠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거릿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가지 마 같이 있어. 마거릿이랑같이 있어.”
그녀는 오빠가 함께 있을 때만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빠가 있을 때는 라리사도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마거릿, 난 여기 있을 수 없어. 대신 이걸 줄게 이 인형이 너를 지켜 줄 거야.”
오빠가 내민 것은 인형이었다.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그것은 만질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가 나서 기분이 좋았다.
마거릿은 오빠가 준 인형을 꼭 껴안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날 라리사가 잡혀간 것이다.
마거릿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라리사에게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고, 마거릿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마거릿은 너무나 기뻤다. 그녀는 인형이 소원을 들어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마거릿은 잠을 자다가 머리채가 잡혀 침대에서 끌려 내려왔다.
“마거릿, 나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잔뜩 화가 난 라리사를 본 마거릿은 겁에 질렸다. 사람들은 이제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라리사는 다른 곳에 갇혀 있으니 그녀를 해칠 수 없다고.
하지만 라리사는 그녀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넌 나쁜 아이야, 마거릿 나는 네가 좋은 아이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배신해?"
“시, 싫어!"
마거릿은 필사적으로 라리사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침대로 달려가 인형을 끌어안았다.
"도, 도와줘 무서워 너무 무서워.”
“멍청하긴 그딴 인형이 널 지켜 줄 것 같아?"
라리사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그녀는 발버둥치는 마거릿의 품에서 인형을 빼앗아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인형, 내인형!"
마거릿은 울면서 달려갔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불이 붙은 인형을 꺼내자 라리사가 무섭게 화를 냈다.
“이 미친 계집애! 당장 내놔!"
마거릿은 인형을 빼앗으려는 라리사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몸싸움 끝에 그녀의 손에서 날아간 인형 이 커튼 위로 떨어졌다. 커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타올랐다.
하지만 마거릿은 위험하다는 것도 몰랐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빠가 준 인형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만하라고 했지!"
불타는 커튼 쪽으로 다가가는 마거릿을 본 라리사가 벽난로 옆에 세워진 부지깽이를 들고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마거릿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형을 잃어버렸어. 오빠가 준 건데. 어서 찾아야 하는데. 잃어버린 걸 알면 오빠가 실망할 거야. 어서 찾아야 하는데 라리사, 인형을 돌려줘 잘못했어요. 내 인형을 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