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34화 (134/240)

134화

"죄송하지만 전 지금 바쁜데요!"

당황한 나는 바보 같은 말을 해 버렸다. 그러자 소년이 환하게 웃었다.

-아, 역시 제 목소리가 들리는 거군요.

“헉!"

큰일 났다. 그냥 모른 척할걸!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리자 소년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죽은 뒤에 누군가와 대회를 한 것이 처음이라서 조금 들떠 버렸네요.

으아아, 유령 주제에 그렇게 예의 차리지마. 듣는 사람 기분 이상해진다고!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게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꼭 전해야 하는 사실이 있어서요.

"······예?"

-함께 온 분들이 고용인 구역에 머물고 있더군요. 하지만 그곳은 밤에 무척 위험해져요.

진지한 소년의 태도에 나도 좀 심각해졌다. 유령이 나타나 경고까지 한다면 무시 하고 넘어 갈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위험해지는데요?"

-사람을 해치는 악령이 나옵니다. 제가 최대한 막고 있지만, 거기서 밤을 보내는 건 위험해요.

"알겠어요. 지금 당장 숙소를 옮기라고 할게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니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알려 줘서 고마워요."

아무래도 이 소년은 단순한 유령이 아니라 저택을 지키는 수호령인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덜 무서워졌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눠서 정말 즐거웠어요.

“아, 네.”

-참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고, 고맙습니다?"

머쓱하게 인사한 나는 문득 소년의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귀족적이고 단정한 얼굴선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꼭 닮아있었다.

"저,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아서 엘마이어예요. 저를 봤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세스가 알면 분명 슬퍼할 테니까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소년이 스르르 사라졌다. 유령다운 퇴장에 흠칫 놀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서 엘마이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스의 죽은 형이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촛대를 옮겨 열린 통로를 닫았다.

* * *

"예, 전하의 형님께서 아서라는 이름을 쓰셨습니다. 보통 아서 경이라고 불리셨고요."

충직한 시녀장은 왜 갑자기 아서 엘마이어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도 묻지 않고 답해 주었다.

조금 전에 고용인의 숙소를 옮기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래야 되는지 설명조차 필요 없었다.

이러다 내가 공작가를 파산시키려고 해도 기꺼이 도와줄 것 같아서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시녀장의 확인으로 내가 만난 유령이 세스의 형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죽은 뒤에 계속 이곳에 있었던 건가?’

사람이 죽으면 바로 환생한다고 믿었던 내겐 좀 충격적인 일이었다.

"마님, 이제 등을 밀겠습니다.”

시녀장은 시녀들까지 물리고 손수 내 목욕 시중을 들었다. 아무래도 첫날밤이라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이리저리 씻기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아서 경은 어떤 분이셨어요?"

“······밝고 쾌활한 분이셨습니다 고용인들에게도 항상 예의를 지키셨습니다.”

왠지 시녀장은 아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의문이 담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분이셨지만 조금은 원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형으로서 동생을 감싸 주셨다면 전하께서 조금은 덜 힘드셨을 텐데 하고요".

아서는 아버지에게 구박받는 동생을 외면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동생을 구하다 죽은 착한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평가가 썩 좋지 않았다.

“그럼 공작님의 여동생은요?"

"······."

이번에야말로 등을 문지르던 스펀지가 멈췄다. 한참을 망설이던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마거릿 공녀께선, 몸이 좀 불편하셨습니다."

시녀장의 말에 따르면 세스의 여동생은 발달이 느린 아이였다. 신체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말과 행동이 어눌한 편이었다.

특히 여섯 살 때 계단에서 떨어진 후 증세가 더 심해 졌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다섯 살짜리와 다름없이 굴었다.

“저는 공녀의 사고를 막지 못한 죄로 다른 곳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시녀장이 쫓겨나고 세스가 신전에 끌려간 후엔 마거릿을 이해하고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인 공작은 딸을 보기 힘들어했고, 큰오빠인 아서는 상냥했지만 너무 바빴다.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된 아이는 점차 난폭해져 갔다.

마거릿은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고 날뛰었고, 종일 떼를 쓰거나 시중드는 사람을 때리고 깨물었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라리사 모어였다.

”라리사 모어라면······.”

“한때 전하의 약혼녀였고 지금은 클라멘스 백작 부인으로 불리는 여자입니다.”

마거릿은 이상할 정도로 라리사의 말은 잘 들었다.

라리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가 있을 땐 유독 고분고분해졌다.

선대 공작은 라리사가 죽은 아내를 닮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라리사에게 마거릿에 대한 모든 권한을 넘겨 버렸다. 그 후로 라리사는 제가 공녀가 된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보통 그런 일이 있으면 애를 학대하는지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세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라리사가 동생을 학대했다고 고발하며 증거까지 제출했다. 그 증거가 꽤나 확실했기에 라리사는 숙소에 감금되어 처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별채에서 불이 났다.

“저는 라리사 모어가 불을 질렀다고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숙소 안에 갇혀 있었지요.”

검사 결과, 화재의 원인은 인형으로 밝혀졌다.

하필 세스가 동생에게 선물한 인형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형에 불이 붙었고, 그게 마거릿의 방에 번져서 저택 전체를 태우고 만 것이다.

"화재를 제일 처음 목격했던 시녀는 공녀의 방문이 잠겨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말썽꾸러기였던 마거릿은 종종 문을 잠그는 장난을 치곤했다. 사용인들이 창고에서 일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방에 불이 났는데도 문을 잠그고 가만히 있는 것은 너무 이상했다. 그것이 세스가 동생을 죽이고 불을 지른 범인이라는 소문이 났던 이유였다.

세스가 나타난 것은 내가 목욕을 마친 뒤 머리를 빗질하고 있을 때였다.

“나머지는 내가 하지."

세스의 말에 멈칫한 시녀장이 허락을 구하듯 나를 봤다.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방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시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그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빗을 넘겨받은 세스가 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세스의 손길이 닿는 순간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마치 머리카락에 새로 신경이 생긴 것 같았다. 잔뜩 움츠린 내 뺨을 살짝 쓰다듬은 세스가 속삭였다.

“결혼하니 정말 좋은걸.”

”뭐가요?"

"당신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밤늦게까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세스의 손이 스친 귀가 찌릿찌릿했다.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을 마주친 세스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세스를 바라봤다. 겁먹은 나를 눈치겠는지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무서워하는 일은 안 해."

"······미안해요."

“지금 사과하면 내가 너무 파렴치한이 되는데."

빗을 내려놓은 세스가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내 이마에 쪽 입을 맞춘 세스가 고백했다.

“켄트 박사가 경고하더군. 당신은 몸이 약해서 임신을 하게 되면 산모와 아이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견디기 힘들 것 같으면 약을 주겠다기에 정중하게 사양했어.”

박사님, 당신이라는 사람은…….

"시녀장은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었어. 당신이 아직 어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당신에게 손을 댔다간 나를 화형 시킬 기세던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녀장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런 뜻이었나 보다. 그걸 망한 성교육쯤으로 오해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왠지 사랑받고 있는 기분이네.'

나는 헤헤 웃으며 세스의 품에 뺨을 비렸다. 한숨 같은 소리를 낸 세스가 나를 침대에 눕혔다.

“걱정하지 말고 자, 아가씨. 지금은 얌전히 갇혀 있어 줄 테니까.”

“정말자요?"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세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 쪼끔 만져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성자가 아니야, 이비.”

미개봉 새 상품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세스가 억지로 내 눈을 감겼다.

입을 삐쭉 내민 나는 세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따끈따끈한 체온이 무척 기분 좋게 느껴졌다.

* * *

‘헛!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번쩍 눈을 돈 나는 창가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한 밤중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세스를 살폈다.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세스가 불을 끄지 않아서 잠든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잠자는 왕자님 같은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어떻게 자는 모습도 잘생겼지?'

잠시 감상의 시간을 가진 나는 꼬물꼬물 세스의 폼을 빠져나왔다. 소리 죽여 침대에서 내려온 뒤 숨겨 놓았던 로브를 덮어쓰고 허리에 주크를 찼다.

-띵!

”쉿!”

나는 눈치 없이 구는 주크를 한 대 때린 후 살금살금 벽으로 다가갔다. 촛대를 잡아당기자 조금 전의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나는 통로로 들어가기 전에 세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세스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요.’

하지만 꼭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세스에겐 절대 밝힐 수 없는 일이라 나 혼자서 가야 했다.

통로 안으로 들어서니 저절로 문이 닫혔다. 눈치를 보던 주크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주크, 너만 믿을게.”

-띠링!

주크가 자신 있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살짝 미소 지은 나는 앞을 비추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 목표는 아서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던 고용인 구역이었다. 하지만 위험에 몸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여차하면 주크를 사용해 왕의 길로 도망칠 작정 이었다.

-사람을 해치는 악령이 나옵니다. 제가 최대한 막고 있지만, 거기서 밤을 보내는 건 위험해요.

별채에서 죽은 사람은 두 명.

하나는 악령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령이 되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안 좋은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것을 확인하러 갈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