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이런 결국 들켰냐."
세스는 의외로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냥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들켜도 괜찮아요?"
“괜찮지는 않지만. 당신 동생 옆에 실력 있는 자를 붙이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으니까."
브란의 또래면서 실력 있는 자는 정말 드물 것이다. 그럼 제이는 낙하산이 아닌 건가?
"편입 시험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이야 내심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저 주군 사실은…….”
세스의 말에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변한 제이가 진실을 고백했다.
"편입 시험에 또 떨어졌는데, 기부금을 내면 실기로 대체해 준다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세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카데미는 기부금으로 입학자를 받지 않을 텐데?"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들킨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또 들켰단 말이야? 결국은 공작가라는 배경을 보고 억지 합격시켜 줬다는 소리였다 매우 몹시 아주 정말 진짜 낙하산이었군. 거의 체념하는 표정이 된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기밀 유지를 팽개치지는 말고, 임무에 최선을 다해라.”
“예! 브랜든을 지키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쪼그마한 가슴을 탕탕 치는 모습이 제법 든든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제 동생을 잘 부탁해요.”
‘예, 마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제이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모습이 꼭 귀여운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세스가 차갑게 내뱉었다.
"보고가 끝났으면 이만 물러가도록."
어라 설마 질투하는 거야? 의미심장한 눈으로 세스를 응시하니 그의 귀가 슬쩍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휴,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지? 얼른 잡아서 보보나 해야겠다.
"주군, 아직 보고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슬쩍 세스의 손을 잡는 순간 씩씩한 외침이 들려왔다. 멈칫한 세스가 제이를 돌아봤다.
“······달리 보고할 것이 있나?"
"예! 브랜든이 마님을 뵙게 되면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제이는 여기서 말해도 되냐고 확인받듯 나를 응시했다.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전 공작님께 비밀을 만들지 않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왠지 감탄한 표정이 된 제이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브랜든은 ‘만약 누나가 우리 셋이서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면 괜찮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빨리 나한테 돌아와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셋이요?"
"예, 저도 왜 셋인지 물어봤지만 누나라면 알 거라는 말만했습니다.“
뭐지? 셋이라니? 나와 브란을 뺀 나머지 하나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제이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기숙사로 돌아가서 좀 더 캐 보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제이에게 말해 줄 거였다면 처음부터 다 말했을 것 이다. 아마 말할 수 없거나 말하면 안 되는 내용이겠지 아무래도 나중에 브란을 만나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동생의 소식을 전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마, 마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제 기쁨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제이가 경례를 올렸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스가 녀석의 목뒤를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놀란 제이가 바동거렸지만 밖으로 던져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온 세스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괜찮아?"
“네? 당연히 괜찮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뭔가를 머뭇거리던 그가 물었다.
"동생에게 가고 싶어?"
"네?"
혼자서 공부 잘하고 있는 애한테 왜 가?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전 그냥 세스 옆에 있고 싶은데요.”
시무룩하게 말하자 세스가 내게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나를 꽉 끌어안는 팔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했다.
“세스?"
나는 조금 당황해서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세스는 나를 안은 채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혹시 제가 다 때려치우고 동생에게 가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나에 대한 신용이 없지?
조금 얄미워진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들립니까? 이블린입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직접 말을 걸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불안해할 때가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얼른 새 신부에게 보보를 하는 겁니다.“
"······."
순간 나를 꽉 껴안고 있던 팔이 떨리더니 세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니, 웃어? 나는 지금 심각한데?
재촉하듯 등을 콕콕 찌르자 고개를 든 세스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이어서 이마에, 콧등에,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정말 순수한 보보라는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이 정도로도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조심스럽게 내 뺨을 쓰다듬은 세스가 속삭였다.
“이비, 난 굉장히 교활한 인간이야. 지금도 어떻게 하면 당신을 내게 묶어 둘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어."
“네?”
교활? 이게 무슨 교회에서 활어회 시키는 소리지?
"숙부님의 초상화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이 날 동정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야. 당신은 불쌍한 사람에게 약하니까.”
엥? 내가? 딱히 동정심이 넘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 점을 이용해서라도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떠나지 않을게요.”
냉큼 떨어진 내 말에 잘생긴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되돌려주듯 그의 이마에 살짝 입 맞췄다.
“세스가 절 필요로 하는 동안엔 절대 떠나지 않아요. 약속할게요.”
“이럴 땐 영원히 옆에 있겠다고 하지 않아?"
그건 불가능한 약속이니까. 나는 말없이 세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스가 괴로운 얼굴로 내 손에 입을 맞췄다.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당신의 대답도 달랐을까?“
“아뇨, 그럼 세스가 절 믿지 않았을걸요.”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마음의 벽이 높은 이 남자는 결코 내게 옆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스와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좋아요.”
세스를 만나서, 그를 좋아하게 돼서, 그리고 대역이라도 그의 아내가 돼서 정말 기랬다. 그러니까 이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감히 바랄 처지도 못 되고.’
신분의 차이를 빼고 봐도 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될 수 없는 체질이었다.
손을 잡을 때도, 입을 맞출 때도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아이를 낳거나 키우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생을 이해해 달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이해해 준다고 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함께 있어 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세스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고러니까 모든 것이 끝나면 나는 세스의 옆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게 내가 그에게, 영원을 약속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브란을 지켜 주려고 해서 고마워요. 초상화에 대해서 말해 준 것도요. 세스가 저한테 마음을 열어 준 것 같아서 정말 기뻤어요."
“······.”
“정말로 좋아해요."
고개를 숙인 세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조금은 아플 정도였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멈칫한 나는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시 캠프파이어로 돌아온 나는 이대로 불을 끄기 아쉬워 고용인들을 위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결혼 축하용으로 준비된 음식들과 술을 풀자 다들 흥청망청 먹고 마셨다.
흥이 오른 요리사는 모닥불에 구운 고구마로 타르트까지 만들어 왔다. 그게 의외로 꿀맛이라 나는 타르트로 배를 채웠다.
“마님, 이제 신방으로 드실 시간입니다."
시녀장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날이 컴컴해져 있었다.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용인들이 일제히 술을 바닥에 뿌리며 축복의 말을 건넸다. 대충 튼실한 아들딸 많이 낳으라는 말이었다.
그럴 예정은 없었지만 나는 오른손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당황한 시녀장이 서둘러 나를 안으로 끌고 갔다.
우리의 신방은 검은 말 홀에 꾸며져 있었다.
황금색 침구에 붉은색 커튼을 드리운 침실은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무척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구석에 놓인 향로에선 부드러운 장미향이 났고. 곳곳에 놓인 등불이 은은한 빛을 비추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분위기일 줄 몰랐던 내가 멈칫하자 시녀장이 내 손등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겁니다.”
응? 설마 이게 첫날밤의 교육인가? 굉장히 무책임하게 들리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침대에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 예정이었다. 더 하고 싶어도 내 체질 때문에 불가능하니까.
‘미남이 앞에 있는데 왜 손을 댈 수가 없니.’
서러운 내 처지를 한탄하며 한숨을 쉬니 시녀장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뭔가를 오해하는 것 같았지만, 차마 이것은 그런 쪽의 아쉬움이 아니 라고 해명할 수가 없었다.
“마님, 저는 목욕 준비가 끝났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이곳에 앉아 계십시오.”
푹신한 의자에 나를 앉힌 시녀장이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던 나는 똑똑 노크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세스가 왔나 했지만, 문이 아니라 벽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멈칫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벽으로 다가갔다.
“세스?"
순간 벽을 두드리던 소리가 뚝 멎었다. 마치 자신은 세스가 아니라는 것처럼.
"누구세요?"
그러자 다시 똑똑 소리가 울렸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딘가 딱 잡기 좋게 되어 있는 촛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빙글 벽이 돌아가면서 안쪽에서 있던 검은 머리 소년이 나타났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서 엘마이어라고 합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무척이나 예의 바른 유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