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일어나라. 밖에서는 예를 생략해도 좋다."
"예! 주군!"
세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난 소년, 제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주인을 향해 꼬리 흔드는 멍멍이 같았다.
‘응?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슬쩍 몸을 움직여 제이의 시선을 가로막은 세스가 입을 열었다.
“제이 리드, 정리가 끝난 후 다시 부르겠다. 그때 임무에 대해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제이가 기쁨에 찬 얼굴로 경례를 올렸다. 고개를 끄덕인 세스가 곧바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좋아. 다들 물러가라.”
즉시 절을 한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아쉬운 표정이 된 제이도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났다.
방해꾼을 모두 치워 버린 세스가 만족스럽게 나를 돌아봤다.
“이비, 우리도 이제 들어갈까?"
“앗, 네!"
나는 서둘러 세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검은 머리 소년이 떠올렸다.
‘그냥 어딘가에 숨은 거겠지? 진짜 곱]신은 아니겠지?'
나는 살짝 긴장하며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별다른 일 없이 그랜드홀에 다다랐다.
프리지어 궁보다 작지만 높은 천장과 넓은 채광창 때문에 답답한 느낌은 전혀 없는 공간이었다.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오픈 홀 구조였는데, 내부 인테리어를 붉은색 나무로 통일해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면의 벽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자리했다. 처음 보는 은발의 남자가 한껏 잘난 척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었다.
초상화를 보고 멈칫한 세스가 그 앞에 멈춰 섰다.
“내 숙부님인 트리스탄 엘마이어야."
"숙부님과는 친하게 지내세요?"
“아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 친분은 없어.”
그런 사람의 초상화를 왜 여기 걸어 둔 거지? 의아해하는 나를 눈치챈 세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숙부님과 내가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거든.“
"네? 대체 어딜 봐서요?"
"안 닮았나?"
"숙부님은 큐트계 온미남이잖아요. 세스는 섹시계 냉미남 이라고요. 대체 뭘 보고 닮았다는 거예요?"
큐트 온미남과 섹시 냉미남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었다. 내 전문적인 분석에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인 세스가 변명했다.
"숙부님도 나도 은발이니까.”
“그건 그냥 털색이죠. 그렇게 치면 하얀 개랑 하얀 고양이는 같은 품종이게요?"
”······털색.”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린 세스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나를 번쩍 안아 든 그가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왠지 닮지 않았다는 말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캐물었다.
“세스, 저 초상화는 누가 여기 걸어 둔 거예요?"
"선대 공작이.”
응? 선대 공작이면 세스의 아빠잖아?
“선대는 숙부님을 무척 싫어했어. 하필 내가 숙부님과 닮아서 더 밉다고 했지. 여기 걸어 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세스가 보고 상처받으라고 걸어 둔 거라는 소리야?
우와, 진짜 성격 나쁘다! 세스도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님 쪽이 원조 맛집이었네!
“그런데 왜 계속 걸어 두고 있어요? 당장 떼버리지.”
“그건······ 잘 모르겠군. 이걸 떼면 선대의 말을 인정 하는 것 같아서 못 본 척했던 것 같아.”
친척끼리 닮은 것이 무슨 홈이 될까 싶지만, 세스는 그것조차 인정하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미움을 받을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을 테니까.’
나는 그 체념과 같은 자기 학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불쑥 손을 내밀어 초상화를 가리켰다.
“세스, 이 그림 저한테 줘요.”
"응?”
"잘게 쪼갠 다음 불태워서 고구마 구워 먹게요.”
이왕이면 밉살스러운 아버님도 같이 태워 버리고 싶다. 이굴이글 타오르는 내 눈을 본 세스가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공작 부인의 방에 짐을 풀었다.
세스는 공작의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머물기로 한 것 같았다. 왠지 선대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유를 묻지도 못했다.
‘괜히 세스랑 같이 본가에 왔나?'
나는 멍하게 거울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적진 시찰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했었는데, 여기가 이렇게 지뢰밭일 줄은 몰랐다.
세스가 상처받을 것을 생각하지 못한 내게 자괴감이들 정도였다. 시무룩해진 내게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네?"
내 머리를 빗겨 주던 시녀장이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그 초상화를 떼어 주셔서요. 모두가 바랐지만 어찌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님.”
상처 주려는 아버님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세스 사이에서 세스를 아끼던 사람들도 같이 상처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말문이 턱 막힌 내 표정을 오해한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주제넘은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저 어떻게든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고마워요. 리드 부인."
그녀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내가 보지 않는다고 세스의 상처가, 그리고 세스를 상처 주는 것들이 사라지 는 건 아니었다.
‘그럼 내 손으로 모조리 없애 버리는 수밖에.'
내 안의 유교걸이 이번엔 아주 잠잠했다 아버님(의 흔적)을 지우는 데 동의하는 것 같았다.
"참, 들어오면서 보니까 건물은 참 멋있지만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있더라고요. 그 초상화처럼요. 이번에 모조리 태워 버릴까 하는데, 도와주실래요?"
“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내 뜻을 읽은 리드 부인이 재빨리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 역시 이 저택에 쌓인 게 많은 것 같았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즉시 모든 고용인들을 호출했다. 그리고 리드 부인과 함께 저택 앞에 거대한 캠프파이어를 열었다.
자, 오늘은 불꽃 파아터를 하겠어요.
제일 먼저 마음에 안 드는 초상화들을 불태우고, 아버님의 소중한 사슴 머리 컬렉션도 불속으로 처넣었다.
아버님의 가구? 아버님의 옷가지? 이제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
“이런 게 왜 여기 있죠?"
"얼마 전까지 어르신께서 여기에 머무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더 이상 필요 없겠네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일부러 흔적을 남기고 간 모양이지만, 내게 알 박기 따윈 통하지 않았다. 여기에 아버님을 넣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나중엔 알아서 물건을 찾아와서 불속에 집어넣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저택에도 아버님의 편은 남아 있지 않은 모양 이었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마님, 이것도 태워도 될까요?"
“우선 태워 보고 생각하죠. 이것이 결백하다면 불에 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일단은 가보인데요.”
그 말에 나는 곧장 가보를 불속으로 던져 넣었다.
“얍! 가보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내 사라짐 마법을 보고 감탄한 사람들은 이내 후련한 표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바라봤다. 나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 연기를 보며 세스의 상처도 함께 사라지길 빌었다.
“그곳에선 행복하기를.”
“이비."
언제 왔는지 세스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의 제이 리드도 함께였다.
나는 세스의 손을 끌어 캠프파이어에 대고 녹여 주었다. 아직은 그렇게 춥지 않지만, 그리고 세스의 손도 얼지 않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을 상처 주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 줄게 그러니 까 더 이상 상처받지 마.’
세스는 말없이 그런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제이 리드가 속삭였다.
"역시 마님께선 브랜든과 무척 닮으셨습니다."
응? 누구? 내 동생 브란?
우리는 급하게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알고 보니 제이 리드는 세스가 아카데미에 보낸 첩자였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의 보고를 들었다.
"주군의 명을 받고 아카데미에 편입한 후 브랜든의 룸메이트가 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브랜든아 저를 안 좋아합니다. 브란이라고 불렀다가 한 대 맞을 뻔했습니다."
제이가 씩씩하게 말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나는 기겁했다.
“명령 때문에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고요? 괜찮아요?"
내가 알기로 아카데미 편입 시험은 무척 어려운 편이다. 다시 말해 상사의 명령 때문에 수능을 다시 쳤다 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올 1등급 목표로.
깜짝 놀라는 나를 본 제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어 그러니까 싫은데 입학한 게 아닌지······."
나는 말끝을 흐렸다. 싫다고 해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재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부모님이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공부는 재미없지만 친구들과 노는 건 즐겁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합치면 아주 좋습니다.”
말을 끝낸 제이가 무척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마를 감싸 쥔 세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이렇게 보여도 또래 중엔 꽤 강한 편이야. 당신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보호해 줄 거야.”
본인도 만족한 것 같지만 진짜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럼 브란은 잘 지내고 있나요?”
"매일 열심히 공부합니다. 밤낮으로 코피가 날 정도로 합니다. 걱정이 돼서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어 보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제이가 세스의 눈치를 살폈다. 세스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그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변태 귀족이 누나를 납치해 가면서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야 만나게 해 준다고 했답니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세스를 바라봤다. 세스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수석으로 졸업해야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서. 동기 부여를 좀 해봤어.”
무슨 동기 부여를 어떻게 했기에 변태 귀족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지?
무척 수상해하는 눈으로 세스를 바라보는데 제이가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덧붙였다.
“아, 그런데 저 들켰습니다. 브랜든이 제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수상하다면서 변태 귀족의 수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비밀 임무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는 제이였다.
······아, 이 녀석 시녀장의 조카였지
엄마, 우리 회사에 낙하산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