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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31화 (131/240)

131화

* * *

황금의 왕국, 나바르.

한때 바다와 사막을 통한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던 나라.

그 과거의 영광이 고스란히 담아 있는 진주 궁은 마치 천국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진주 궁의 주인은 장식 하나 없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태자비 파라.

원래 사막의 무녀였던 그녀는 죽어 가는 태자를 살리기 위해 불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신성한 불꽃이여, 제 남편을 구해 주십시오. 이대로 죽어 가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대회의에서 아스트리아의 편에 설 것을 주장하던 태자는 갑자기 쓰러져 눈을 뜨지 못했다.

쓰러진 태자의 몸에선 검은 반점이 하나둘 피어났다. 온몸의 핏줄이 튀어나와 흉측하게 변했고, 손발은 타들어 가는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사람들은 태자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수군거렸다.

궁의도 학자도 태자의 증세가 병인지 독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사막의 떠돌이들이 파라에게 진실을 귀띔해 주었다.

“무녀여, 태자는 검은 꽃에 중독된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독의 해독제는 검은 꽃의 뿌리입니다.”

검은 꽃은 사막에서만 발견되는 마물이었다. 기생 식물인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만 뿌리를 내렸다.

검은 꽃의 해독재인 부리는 꽃을 자르는 즉시 조금씩 말라서 사라졌다.

뿌리를 얻고 싶다면 검은 꽃의 씨앗을 사람에게 먹여서 키워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태자를 구해도 악마 추종자로 몰려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파라는 그들이 끔찍한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신에게 남편을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파라의 힘으로는 그저 태자의 숨을 붙여 놓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피가 말라 가던 그녀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파라 님, 천공신의 신녀가 바실리스크를 부리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바실리스크는 만독을 지배하는 왕.

바실리스크의 눈물에는 모든 독을 해독하는 능력이 있었다. 태자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파라는 지금 당장 아스트리아로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을 올렸다. 하지만 왕은 선뜻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에야 왕이 보낸 시녀가 도착했다.

"파라 남 왕께서 보내신 전언이옵니다.”

시녀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간악한 아스트리아와는 어떤 협상도 할 수 없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왕께선 태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천공신의 신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예, 하오나 나라를 위해선 아들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파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왕은 태자를 중독 시킨 자들과 한패였다. 그는 태자를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태자비께서 오랜 간호로 몸이 상하는 것을 염려하시여 당분간 외출을 금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태자가 축을 때까지 진주 궁에 가둬 놓겠다는 뜻이었다. 주먹을 꾹 쥔 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시녀장을 불러다오."

”······예.”

잠시 머뭇거리던 시녀가 물러났다. 파라는 그녀의 시선에서 옅은 동정을 읽을 수 있었다.

“파라 님!"

잠시 후 진주 궁의 시녀장이자 그녀의 스승인 시린이 나타났다.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없었다. 파라는 재빨리 시녀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당장 아스트리아로 떠날 생각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태자님을 지켜 주십시오.”

“파라 님과 달리 저와 아이들의 신성력은 미약합니다. 최대한 버틴다고 해도 한 달 이상은 힘들 겁니다."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마탑으로 갈 생각이에요.”

파라에겐 마탑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스크롤이 있었다. 과거 어느 마법사를 치료해 주고 그 보답으로 받은 것이었다.

마탑의 위치는 아스트리아의 동쪽 끝.

그저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물건이지만 이것으로 아스트리아까지 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아스트리아의 수도에서 선녀를 만나고 다시 나바르 에돌아오기까지 한 달.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이동하면 어떻게든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파라에겐 혼자서 타국을 여행해야 한다는 두려움조차 없었다. 태자가 쓰러진 이후로 그녀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파라 님, 천공신의 신녀가 어떤 대가를 요구 할지 모릅니다. 잘못하면 매국의 누명을 쓰실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겁니다."

태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파라는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사막의 일족을 위해서 태자에게 투신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파라는 태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무녀의 본분을 버린 것이었다.

태자에게 파라는 수많은 아내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파라에게 태자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었다.

"선녀가 무엇을 달라고 해도 주겠습니다. 제 영혼이든 심장이든 고 이상이든."

하지만 무엇을 바쳐도 태자를 구하지 못한다면,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맹세하듯 속삭이는 파라의 눈동자가 검게 타올랐다.

* * *

고딕 호러 중 대저택이 나오는 영회는· 대체로 이렇게 시작한다.

허허벌판에 아주 거폐하고 음침하고 사치스러운 대 저택이 서 있다.

그리고 눈치 없는 여주인공이 마차에서 뛰어내려서 “어머 , 정말 멋진 저택이네!"하고 호들갑을 떤다.

누가 봐도 귀신돌이 모여서 화투 치고 있을 것 같은 곳이지만 행복해서 눈이 뻔 여자 주인공에겐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를 여기까지 끌고 온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여기서 일어날 천국 같은 일에 대해 늘어놓는다.

그래, 천국 같겠지 . 다 같이 황천을 건너갈 테니까.

하지만 팝콘을 씹으며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던 영화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이비?"

눈앞의 대저택을 멀거니 쳐다보던 나는 세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엄청 멋진 저택이네요!“

여기서 ‘저택 이름이 혹시 폭풍의 언덕이나 사일런트 힐인가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세스가 태어나고 자란 엘마이어 본가였기 때문이다.

세스와 나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었다.

사실 아스트리아에는 신혼여행이라는 문화가 없었다.

결혼식을 마친 뒤에 축하 파티를 열고 다음 날 아침 에 양가에 인사를 드리면 끝이었다.

하지만 멋모르는 내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냉큼 미끼를 문 세스가 여행 계획을 짰다.

뒤늦게 내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코스가 준비된 뒤였다.

그 첫 번째 코스가 바로 세스가 태어나고 자란 엘마이어 본가였다.

사실 이곳은 내가 가보고 싶다고 했다. 정직원이 되었으니 본사에 들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사가 이 꼴이라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 원래 본진이 더 번쩍번쩍해야 하는 거 아냐?'

왕궁보다 호화로워서 반역죄로 몰릴까봐 걱정되는 프리지어 궁에 비하면 이곳은 다 쓰러져 가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원래 밝은 색이었을 어두운 베이지색 벽면에는 담쟁이가 덕지덕지 붙어 스산한 느낌을 풍겼다. 낭만적인 곡선을 그리는 발코니와 우아한 지붕은 한때는 고풍스러웠을 테지만 지금은 어딘지 음산하고 흐릿한 유령 같은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걱정하지 마. 겉으로는 낡아 보여도 수리를 해서 머무르기 불편하지 않을 거야.”

"불편한 건 걱정 안 해요. 저야 바닥에서도 구르면서 잘 수 있는걸요.”

“내 신부를 바닥에서 재우진 않아 식장에서처럼 안고 있으면 몰라도.”

의미심장한 세스의 말에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하객들에게 인사도 못 하고 도망치듯 식장을 나와야 했던 이유가 떠올라서였다.

‘알아서 잘한다며!'

키스만 하면 기절해서 걱정했더니, 키스할 때 기절 할 이유를 친절하게 만들어 준 세스였다.

만인의 앞에서 찐-한 키스를 선보인 나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내 안에 있는 유교걸이 벌떡 일어나 이게 무슨 짓이냐고 칼춤을 췄다.

도저히 파티에 참석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그대로 탈출해 회피성 신혼여행을 떠났다.

지금은 피했지만 무슨 낯으로 출근해서 사람들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눈이 촉촉해진 나를 눈치챈 세스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

눈치 빠른 남자 같으니. 입을 삐쭉이며 세스의 손을 잡은 나는 돌길을 가로질러 저택의 입구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내 시중을 들기 위해 미리 본가로 옮겨 와 있던 시녀장과 고용인들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시녀들 외엔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본 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인 것 같았다.

문득 시선을 돌린 나는 현관문 뒤에서 고개를 쏙 내민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13살 정도 되었을까. 검은 머리를 목덜미까지 기르고 제복 같은 것을 입었는데, 호리호리한 체형에 쾌활하고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비?"

반사적으로 따라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 세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아, 저쪽에 처음 보는 남자애가 있어서요."

하지만 고개를 돌리니 소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뭐지? 설마 귀신은 아닐 테고. 그냥 문 뒤에 숨은 거겠지?

“남자애?”

미심쩍은 듯 중얼거린 세스가 시녀장을 바라봤다. 시녀장이 죄송스럽다는 듯이 설명했다.

“제 조카인 제이 리드가 전하께 인사드리기 위해 저택에 와 있습니다."

“아, 아카데미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고 들었다."

"예, 전하의 은혜로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시녀장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기쁨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카의 머리색이 검은색인가요?"

"예 검은색입니다.“

그러면 아까 본 소년은 시녀장의 조카가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안도하기도 전에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타고 달려온 듬직한 검은 머리의 소년이 급히 안장에서 뛰어내려 무릎을 꿇었다.

“제이 리드가 주군과 마님을 뵙습니다!”

······아까 개가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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