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 *
나는 세계수와 총 두 가지 계약을 했다.
첫 번째는 정령수를 부활시키는 것.
두 번째는 새로운 정령수가 자랄 땅을 제공하는 것.
사실 두 번째 계약은 내 영업으로 이루어졌다.
"호수 앞이 싫으시면 호수 한가운데는 어떠세요? 거기가 진짜 명당 중의 명당이거든요. 양지바르고, 물도 풍부하고,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도 않고. 굉장히 안전 한곳이에요.”
고심 끝에 세계수가 고른 장소는 바로 금고처럼 안전한 별채의 정원이었다.
-땅을 주는 대가로 바라는 게 뭐지?
기다리던 말이 나오자 나는 냉큼 요구했다.
“세스에게 축복을 내려 주세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아주오래 살도록.”
-그 남자는 이미 대지의 축복을 받고 있는데?
“세계수님, 이런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예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대지의 신이 못 챙겨 주는 부분을 세계수가 챙겨 줄 수도 있지 않는가.
내가 빡빡 우기자 결국 세계수는 세스에게 축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세스는 북부에서 돌아오자마자 쓰러지고 말았다.
‘건강하게 오래 살게 축복해 준다며!'
세계수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정령수의 가지를 잡고 화풀이를 했다.
“당장 세스가 좋아지지 않으면 널 시장에 팔아 버리겠어. 아니면 푹푹 삶아서 세스에게 먹이든가!"
내 협박을 들은 정령수의 가지는 아주 해괴한 방법을 썼다. 절대 팔려 가지도, 죽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자라 버린 것이다. 세스와 나를 위에 태운 채로.
“아니, 이러지 말고 그냥 세스를 낫게 해 달라고!"
졸지에 나는 환자를 나무 꼭대기에 메달아 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눈을 돈 세스를 볼 면목이 없을 정도였다.
밑에선 사람들이 구해 주겠다고 펄펄 뛰지, 내려갈 방법은 없지 민망해서 딱 죽을 맛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란을 들은 까미가 나타났다.
날렵한 까미는 쉽게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올랐고, 꼬리로 우리를 휘감아 아래로 내려 주었다. 밑에서 대기 중이던 흑룡이 재빨리 우리를 받아 냈다.
“우와아아!"
아래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을 찾던 나는 문득 세스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세스는 두 마리의 뱀이나 박수 치는 사람들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상하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마치 세상이 멈추고 우리 둘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아주 기묘한 느낌이었다.
"야 아가씨 ! 다친 곳은 없으세요?"
“주군, 괜찮으십니까? 들것을 준비할까요?"
“당장 켄트 박사님을 불러와!"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고, 곧 시끌벅적한 소란이 밀려들었다. 나는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 * *
정령수에서 내려온 나는 곧바로 방으로 끌려갔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준비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세스와 떨어지게 되니 퍽 우울해졌다.
‘모처럼 세스에게 내가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뽀뽀 백만 번을 해도 부족할 시기에 결혼식 준비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시무룩해진 나를 살피던 안나가 물었다.
“아가씨, 제가 가서 복실이를 데려올까요?"
“아냐,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걸.”
복실이는 요즘 통 내 옆에 머무르질 않았다. 북부까지 따라와 놓고도 방에서 혼자 놀거나 새로 친구가 된 곰과 어울렸다.
이번에도 따로 떨어져 있다가 세스가 쓰러진 것을 뒤늦게 눈치챘을 정도였다. 충격을 받은 복실이는 세스의 목을 휘감은 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세스에게 붙어 있고 싶었는데.’
그놈의 평판이 뭐라고 옆에 있을 수가 없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공작님은 괜찮으시겠지?"
켄트 박사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걱정 어린 얼굴을 하자 안나가 상냥하게 답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알려 주기로 했으니까요."
그때 기다렸다는 것처럼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온 시녀장은 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거대한 상자를 양손에 받쳐 들고 있었다.
“아가씨, 신부 베일이 도착했습니다.”
"네? 신부 베일이요?"
어리둥절한 내게 안나가 들뜬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신부 베일은 전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전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예요.”
나는 선뜻 상자를 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뚜껑을 들어 올리자 반투명하게 빛나는 천이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집어 드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휘감겼다.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베일이 반짝거리는 빛을 냈다. 마치 보석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이걸 대체 뭐로 만든 거지?'
전생에서도 이런 신기한 천은 본 적이 없었다. 베일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시녀장이 권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써 보시지요.”
“아가씨, 제가 씌워 드릴게요!"
신이 난 안나가 베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베일의 길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내 키를 훌쩍 넘어서 방 전체에 깔릴 기세였다.
시녀장이 바닥에 늘어지는 베일을 정리했다. 그사이 내 머리에 베일을 고정시킨 안나가 거울을 보여 주었다.
“우와, 너무 예뻐요. 아가씨."
나는 멍하게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머리를 장식한 베일이 너무 반짝거려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있잖아, 나 잠깐만 혼자 있어도 돼?"
안 된다는 말이 돌아올까 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럼요.”
"부르실 때까지 나가 있겠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답한 두 사람이 방을 나섰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본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잖아.”
진짜 신부라도 된 것처럼 기대에 들뜬 눈빛을 한 내가 부끄러웠다. 지우개로 지우듯 거울을 문질러 봤지 만아무소용도 없었다.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결혼식에 아무 관심도 안 가지려고 했는데. 베일 하나로 내 결심을 무너뜨린 세스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아니, 나는 할 수 있다. 물처럼 고요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 관세음보살! 정신 통일! 아브라카다브라!"
나는 뺨을 때리며 설레는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이것은 일이다. 그냥 비즈니스다. 그러니까 헛된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
-꾸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데, 창문 쪽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기겁 했다. 창 밖에 복실이가 둥실둥실 떠 있었던 것이다.
"보, 복실아?"
순간 헛것을 봤나 싶어 눈을 비렸지만 복실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볍게 내 손바닥에 내려앉은 녀석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꾸! 꾸우!
“칭찬해 줘.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고개를 드니 언제 왔는지 세스가 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스 ! 벌써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이제 다 나았어.”
이런 거짓말쟁이. 옆구리가 김밥처럼 터진 걸 내가 분명히 봤는데.
-뿍!
그때 복실이가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세스에게만 관심을 쏟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복실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 너무 놀라서 그랬어. 한 번만 더 보여 줄래?”
-꾸!
그러자 내 손바닥에서 폴짝 뛰어오른 복실이가 허공을 볼볼 날아서 세스에게 가기 시작했다.
‘이건 나는 건가, 기는 건가.’
복실이가 나는 속도는 땅을 기는 것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일단 뱀이 날아다니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세스가 뭔가 한 거예요?"
“아니, 이건 복실이 스스로 선택한 힘이야.”
"선택이요?"
“자신이 어떻게 진화할지 선택한 거지."
세스의 말에 따르면 복실이처럼 특별한 개체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할지 결정할 수 있단다.
친아빠인 흑룡은 물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차가운 물을 싫어하는 왕자님인 복실이는 다른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왜 하늘을 나는 걸 선택한 걸까요?"
주변에 날아다니는 생물도 없는데 하필 가르칠 사람도 없는 나는 법을 배우려는 복실이가 걱정스러웠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네?"
“하늘을 날 수 있으면 어디라도 당신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까.”
순간 말문이 턱 막힌 나는 멍하게 복실이를 바라봤다. 막 세스의 어깨에 도착한 복실이가 의기양양하게 목을 치켜세웠다.
-꾸!
"몰래 연습해서 당신에게 멋지게 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나는 까맣게 몰랐다. 북부에 있을 때 복실이가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멋대로 생각했다. 갑자기 숨이 막 히는 느낌이었다.
“이비, 쉿. 진정해.”
어쩔 줄 모르는 내 손을 세스가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따뜻한 위로의 감정이 전해졌다.
"당신을 탓하지 마. 복실이는 그저 당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거야.”
-꾸······.
복실이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녀석을 쓰다듬었다.
“복실이가 나중에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죠?"
"절대 후회하지 않을걸."
세스의 대답은 마치 자신이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복실이를 칭찬해 주었다.
“우리 복실이, 정말 대단해. 너무 멋져서 놀랐어.”
-꾸꾸꾸!
신이 난 복실이가 내 쪽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나는 얼른 손을 내밀어 복실이를 감싸 주었다. 행복해하는 복실이를 느끼자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이 녹아내렸다.
‘나는 대체 뭘 무서워하고 있던 거였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려도, 기뻐하거나 들뜬 모습을 보이는 건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상처받기 싫어서 핑계를 댄 거였다.
이건 진짜 결혼식이 아니니까. 기뻐해서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혼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세스의 다정함은 진짜니까, 조금은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행복해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이비.”
그때 세스가 내 얼굴을 가린 베일을 살짝 건드렸다. 머뭇거리는 것 같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걸 쓴 당신이 정말 예쁘다고 내가 말했나?"
“아뇨."
“······키스해도 돼?"
나는 세스가 걷을까 말까 망설이는 베일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세스가 조금은 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다음 순간, 세상이 환한 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기절했다는 뜻이다.
키스만 하면 기절하는 이 고질병을 고치지 못한 상황에서 결혼식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