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아뇨.”
딱 부러진 이블린의 거절에 왕은 조금 당황했다. 농담이긴 했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차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블린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모든 이들의 태양이신 폐하의 옆에 서려면 아름답고 총명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우면서도 엄격한 면이 있고 문무와 예술에서도 최고의 재능을 지닌 천재 중의 천재여야 하니까요. 저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부족하죠.”
“그, 그래.”
이블린은 왕이 영원히 혼자 살길 바라는 듯했다. 머쓱해진 왕이 이블린을 살짝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블린, 네가 나라를 위해 참으로 큰 공을 세웠구나. 상으로 받고 싶은 것은 없느냐?"
“네?"
이블린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럼 폐하 공작님을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응?”
"공작님이 북부까지 저를 따라온 일로 잔뜩 화가 나셨을 것 같아서요.”
"······끄응.”
왕명을 무시하고 북부까지 따라간 것도 그렇지만, 성기사단장을 다져 놓고 튀어 버려서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하필 그걸 용서해 달라는 말에 왕이 앓는 소리를 냈다.
‘무슨 벌을 내릴지까지 다 정해 놨는데.’
차라리 보석 광산이나 국보를 달라고 했으면 흔쾌히 허락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갈등하던 왕은 샛별처럼 반짝거리는 이블린의 눈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
“어쩔 수 없지 용서해 주마."
“감사합니다! 폐하!"
이블린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보는 사람까지 행복해지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걸 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 달리 바라는 것은 없느냐?"
"네, 이미 충분히 갖고 있는걸요.”
이블린의 놀라운 점은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왕은 이블린이 욕심이 아주 많다고 생각했다.
이블린이 제 목숨을 살려 달라는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다.
반지를 준 것도 이걸로 대체 뭘 할 것인지 지켜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블린이 바라는 것은 지금껏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세스의 옆에 있는 것인가.'
쓴웃음을 지은 왕은 이블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짐이 네 소원은 꼭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결혼 준비로 바쁠 테니 이만 물러가도 좋다.”
왕이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놓아주자 이블린은 뛸 듯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순간 싸늘한 얼굴로 돌변한 왕이 남아 있는 자들을 노려봤다.
"애 뒤치다꺼리하라고 같이 보냈더니 감히 발목을 물려고 해?"
가슴이 덜걱 내려앉은 해리슨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왕이 코웃음을 치며 명령했다.
“당장 해리슨 가문의 가주를 불러라 미친개가 사람을 물려고 하면 교육을 잘못시킨 주인이 책임져야지.”
“폐,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해리슨이 납작 엎드려 빌었지만 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왕이 차갑게 웃었다.
“짐이 그동안 퍽 물렁해 보인 모양이구나. 당장 이것 들을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왕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축시 해리슨과 그의 수행원들을 끌어냈다.
‘아니, 우리까지 왜……!'
‘저놈이 상사라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모난 놈의 옆에 있다가 같이 매를 맞게 된 수행원들이 원망스럽게 해리슨을 노려봤다.
“아, 안 돼!"
해리슨은 뒤늦게 이블린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치워 버린 왕이 선언했다.
"알고 있겠지? 오늘 있었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모두의 목을 베겠다.”
이블린이 워낙 시원하게 던지고 가 버려서 그렇지, 마광석의 위치는 목숨으로 지켜야 할 정도로 중요한 비밀이었다.
“폐하, 저도 모르게 발설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법사를 불러 금제를 거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피오나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에게 제약을 걸라고 권했다. 근위대장도 동조했다.
“국익을 해치는 지는· 반역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필요한 조치는 전부 취해야 합니다.”
“시험할 놈도 하나 있으니 이것저것 다 해 봐야겠군.”
왕은 해리슨을 떠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그는 이제 목숨을 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폐하, 빛의 창은 어디에 보관해야 합니까? 역시 보고에 둘까요?"
피오나가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빛의 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마광석의 충격으로 신기를 잠시 잊고 있었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에 두면 이블린이 적당히 돌봐주겠지. 공왕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가져가려 할지 궁금하군.”
눈치 없고 뻣뻣한 공왕은 주는 것 없이 얄미운 놈이었다. 그런 작자가 앞으로 눈치를 보며 벌벌 기어 다닐 것을 생각하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폐하, 참으로 뛰어난 충신을 얻으셨습니다. 이블린 양은 천공신께서 폐하께 내린 축복임이 틀림없습니다.”
흐뭇해하는 왕에게 근위대장이 말했다. 이블린이 마탑에서 자신과 수하들의 목숨을 구해 준 뒤부터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이블린의 열혈 팬이 되었다.
"참으로 아쉽지. 이블린이 하나 더 있었으면 아스트리아가 세계를 정복했을 텐데 말이야.”
원조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은 근위대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주거니 받거니 놀고 있는 그들을 보고 피오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이블린을 응원하는 숨은 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 * *
성녀는 필사적으로 기도를 올렸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앞에는 성기사단장인 레오디나스가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온몸에 감은 붕대는 피에 잔뜩 젖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성기사의 몸은 강한 회복력을 갖고 있었다. 원래라면 치료받지 않아도 상처가 회복되어야 했다. 하지만 레오디나스의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았다.
신성력을 쏟아붓고 약초로 지혈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많은 피를 홀리는데도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신이시여,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성녀는 이것이 신이 내리는 벌임을 알고 있었다. 레오디나스가 신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처음부터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성녀는 레오디나스를 아스트리아로 보낸 걸 후회했다.
세스와 만나면 다툼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검까지 뽑아 들 줄은 몰랐다. 친형제처럼 사이좋던 둘을 기억하는 성녀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인 싸움이었습니다. 공작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글쎄요. 일부러 당해 줬다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둘의 다툼을 목격한 자는 레오디나스가 일방적으로 패배했다고 전했다.
“성기사단장이 쓰러진 후 공작이 하늘에 대고 외쳤습니다. 신의 종을 해쳤으니 무슨 벌이든 받겠다고. 다만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대지의 신은 그의 기도에 응답했다.
"저는 신성한 대지의 빛이 공작에게 강림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분께선 공작에게 어서 서두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작은 곧바로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신은 세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세스의 앞을 가로막은 레오디나스가 신벌을 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세스, 당신은 여전히 신과 함께하고 있군요.’
그것은 세스를 신전에서 쫓아낸 그녀의 선택이 틀렸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성녀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세스를 자식처럼 돌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스가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못했다.
성국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저 용기가 없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은 성녀는 다시 레오디나스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 * *
어떤 미남이 강아지 한 마리를 주워서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강아지가 울타리를 넘어 옆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키우던 개를 잃어버린 옆집 사람은 자신의 개가 돌아왔다고 믿었다.
옆집 사람은 강아지를 마당에 묶어 놓으려 했다.
그것을 보고 화가 난 미남의 엄마는 아들을 앞세워 옆집으로 쳐들어갔다. 미남의 엄마와 옆집 사람은 강아지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싸웠다.
둘이 그러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는 재미있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반면 엄마와 옆집 사람 사이에서 치인 미남은 집에 오자마자 드러눕고 말았다.
여기서 강아지는 나. 엄마는 대지신. 옆집 사람은 세계수다. 그리고 둘 사이에 끼여 새우가 된 미남은 바로 세스였다.
나는 불쌍한 미남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움찔한 세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비?"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
세스의 괜찮다는 말은 이미 신용을 잃은 뒤였다.
나는 붕대로 휘감긴 그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상처를 가리려던 세스는 이미 들킨 것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다쳤다는 건 왜 숨겼어요?"
“······당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
세스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비?"
“미안해요.”
당신을 좀 더 잘 보고 있어야 했는데. 내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군지 잊으면 안 됐는데.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세스가 나를 꼭 껴안았다. 상처가 덧날까 봐 그를 밀어내려던 나는 그냥 펑펑 울어 버렸다.
-구르르르르!
내 발치에서 고개를 쭉 밴 흑룡이 위로하듯 울었다.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세스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숲인가?”
나는 힘겹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수 위요.”
“응?"
나는 정령수가 온갖 병에 다 좋다는 마탑주의 말을 믿었을 뿐이다. 세스를 정원에 눕히고, 옆에 정령수 가지를 꽂아 두면 피톤치드 효과로 빨리 나올 줄 알았다.
설마 바닥에 꽂은 정령수 가지가 우리 둘을 매단 채 하늘을 돌파하며 자라 버릴 줄은 몰랐다. 결국 우리는 거대한 가지 사이에 한 쌍의 새처럼 끼여 있는 상태였다.
“아가씨! 곧 구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래에서 사람들이 외칠 때마다 그냥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세스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내 이마에 살짝 입 맞춘 그가 속삭였다.
“난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
순간 머릿속에 폭죽이 펑펑 터지는 것만 같았다. 세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준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나의 어떤 부분이 좋다고 말한 것뿐이지만,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행복했다.
나는 정령수 위에서 탈출할 때까지 그저 멍하게 세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