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 *
원래 내 계획은 왕의 길을 열 수 있는 곳까지 마차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여기 올 때 사흘이 걸렸으니 가는 것도 그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세스가 마차를 멈추게 했다.
“아무래도 마중을 나온 것 같군.”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더니 거기서 흘러나온 연기가 낯익은 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왕실의 문장이었다.
“세스, 저게 대체 뭐예요?"
“폐하의 전령이 이쪽으로 울 모양이야."
담담한 세스의 설명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뜬금없이 전령이라니? 이 멀고 먼 북부에?
설마하고 있는데, 잠시 후 진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왕실의 마법사들이었다.
어쩐지 지치고 쭈글쭈글해 보이는 마법사들은 정중하게 인사한 후 여기 온 목적을 밝혔다.
"북부 감찰관 대표 일행을 빠르게 모시라는 폐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사흘 동안 마차로 이등할 것 없이 마법을 써서 오라는 왕의 배려였다. 그걸 위해 주십 명의 마법사들이 들들 갈리고 있었다.
‘그냥 마차 타고 가면 되는데 굳이?'
사흘 동안 세스와 노닥거릴 생각이었던 나는 왕의 배려가 썩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꾀죄죄해진 마법사들 앞에서 싫은 티를 낼 순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순간속마음이 튀어나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옆을 보자 세스가 백탑주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백탑주는 태연한 얼굴로 받아쳤다.
“당신이 무책임한 거겠지요. 지금의 당신에겐 이블린 님의 안전을 맡길 수 없으니까요.”
"입은 잘 놀리는군.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뭐야, 왜 나 빼 놓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거야?
무슨 이야기 중이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왕실 마법사가 이동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이동 마법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이동하고 잠시 쉬고, 한 번 이동하고 잠시 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일행의 책임자인 나는 이동할 때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인원과 짐이 빠짐없이 도착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에 세스와 백탑주 사이의 의미심장한 대화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띠잉!
허리띠에 매달려 있던 주크가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수십 번의 이동 끝에 마침내 왕의 길을 열 수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계속 마법을 쥐어짜서 파리해진 마법사들은 그럼에도 잔뜩 기폐하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왕의 길을 볼 수 있게 되었군요.”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흩어지지 말고 가운데로 모이세요. 개별 행동 하시면 안 됩니다. 손에 뾰족한 것을 들고 있으면 옆 사람을 찌를 수 있어요. 주머니에 다 넣으세요."
자꾸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에게 주의 사항을 설명한 나는 곧바로 왕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목적지인 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것이 왕의 길! 연합왕국의 정수!"
“이미 사라진 기술이 몇 개나 겹쳐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만 더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왕의 길을 처음 경험한 마법사들은 말 그대로 흥분해서 날뛰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붙잡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세스!"
나는 얼른 그들을 피해서 세스에게 다가갔다. 정신적인 피로에 지친 탓에 어서 왕에게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세스의 얼굴이 유독 창백하다는 것을 알아 쳤다. 놀란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아파요?!"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 달리 휘청한 고가 힘없이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그를 붙들었지만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같이 쓰러질 뻔했다.
“아가씨!"
서둘러 달려온 네빌 경이 대신 세스를 부축했다. 나는 정신없이 세스를 살폈다.
정신을 잃은 세스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상태에 나는 네빌 경을 재촉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겠어요. 아니면 의시를······.”
‘천공신의 신전으로 가야 합니다!"
갑자기 끼어든 백탑주가 말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백탑주가 더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블린 님, 저를 믿어 주십시오. 공작을 낫게 하려면 지금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천공신의 신전이죠?"
다짐하듯 묻는 내 말에 백탑주가 멈칫했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나중에 물을게요.”
“예, 부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세스를 업은 네빌 경과함께 천공의 신전으로 달려갔다.
* * *
왕은 차가운 눈으로 로엔 공국의 사절을 바라봤다.
“그래서? 평화 회담에 참석하겠다는 로엔 공국의 입장을 바꿀 생각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사절이 파리처럼 두손을 싹싹 비비며 덧붙였다.
"공국은 아스트리아의 오랜 맹우였습니다. 공왕께서 가장 먼저 회담에 참석하겠다고 밝히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처음 왕의 길이 열렸을 때 아스트리아, 선성 왕국, 나바르 왕국, 로엔 공국의 대표가 모여 회담을 열었다.
그곳에서 아스트리아의 왕은모두에게 요구했다.
두 개의 강대국, 카스티야와 아스트리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자,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는 강요였다.
왕의 길로 하늘을 점령당한 나라들은 맥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나바르 왕국에선 아스트리아에 우호적인 태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태자는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 당해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사막의 무녀였던 태자비의 노력으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나바르 왕은 태자의 상태가 위중하니 조금 더 생각 할 시간을 달라는 서산을 보내쌓다. 사실상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신성 왕국의 성녀는 아직 침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세스가 성녀의 오른팔인 성기사단장을 다져 버렸다.
‘내가 왜 이블린을 북으로 보냈는데!'
넝마나 다름없는 성기사단장을 본 왕은 뒷골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어떻게든 잘 수습해서 돌려보내긴 했지만, 성녀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듯했다.
그렇게 두 나라가 삐딱선을 타자 앞서 참석하겠다고 답했던 로엔 공국 역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입장을 바꾸기도 힘드니 공국을 우대해 달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말이 우대지, 회담에 참석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은헛웃음이 나왔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비공식적인 알현을 요청한 거였군. 대체 뭘 믿고 건방지게 구는 거지?'
7년 전쟁의 승자인 아스트리아는 현재 눈부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재력은 넘쳐났고 전쟁을 경험한 노련한 병사들도 즐비했다. 지금 당장 공국과 싸우게 된다고 해도 무조건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국과 전쟁을 일으키면 카스티야에게 숨을 돌릴 시간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국 역시 그것을 알고 교활하게 구는 것일 터였다.
왕이 옥좌의 손잡이를 두드리며 이것들을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시녀장인 피오나가 들어왔다.
“폐하, 북부 감찰관 대표가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지금 보고를 받으시겠습니까?"
순간 왕은 체면도 잊고 ‘우리 귀염둥이가 왔다고?'라고 외치며 일어설 뻔했다. 피오나의 강렬한 눈빛에 겨우 정신을 차린 왕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온 모양이군. 보고는 나중에······.”
귀염둥이의 방에서 받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피오나가 다시 눈짓했다.
‘지금 당장 보고를 받아야 한다는 뜻인가?'
왕은 잠깐 고민했다. 사절이 있는 상황에서 이블린을 안으로 들이면 북부에 대한 정보가 정국에 노출된다.
‘하지만 정령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은 이미 공국에도 전해졌겠지.'
무엇보다 피오나는 이블린을 들였을 때 얻는 이득이 클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피오나의 판단을 믿기로 한 왕은 사절을 바라봤다.
“중요한 보고라 잠시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군.”
"양해라니요.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었지만 사절은 뻔뻔하게 엉덩이를 뭉갰다. 그럴 거라 예상했던 왕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불평하진 않겠지.'
이제부터 무슨 기상천외한 일이 생겨도 그건 왕의 책임이 아니었다. 왕은 은근히 기폐하는 마음으로 문을 바라봤다.
잠시 후, 고하는 소리와 함께 이블린과 감찰관 일행이 나타났다.
"북부 감찰관 대표 이블린이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폐하의 명을 무사히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따라 의젓하게 차려입은 이블린이 우아하게 절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 대신 옆에 풍선처럼 떠 있는 뭔가에 향해 있었다.
리본에 묶여서 허공을 동동 떠다니는 그것은 아주 거대한 바늘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꼼지락거리는 바늘에서 힘겹게 시선을 떼어 낸 왕이 입을 열었다.
“그래, 고생이 많았다. 별다른 일은 없었고?"
"예, 폐하의 은덕으로 무탈하게 다녀왔습니다.“
······응, 그래, 별일이 없었구나.
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무탈하게 다녀왔다는데 옆에 있는 그 바늘은 뭐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넘기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니.
"저, 죄송합니다. 폐하.”
이블린이 동장한 순간부터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찰관 대표께 한 카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지금 감찰관 대표의 옆에 떠 있는 것이 저희 공국의 신기인 빛의 창이 아닌지요?"
모두의 시선이 이블린에게 돌아갔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이블린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폐하께 바치기 위해 가져온 북부의 특선물인 반쪽이입니다.”
"······반쪽이?"
“예, 이쑤시개입니다."
천연덕스러운 이블린의 대답에 왕도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