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 *
나는 정령수에 기대 잠들어 있는 세스를 바라봤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나뭇잎이 세스의 은발과 멋지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크-누구 약혼자인지 진짜 잘생겼다.'
주문한 사진기가 내 손에 없는 것이 한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세스?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움찔한 세스가 깨어났다. 처음 보는 멍한 표정에 절로 음흉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우리 보보나 한번 할까?
그때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세스가 나를 보고 살짝 웃었다.
“이비.”
음흉한 마음까지 활활 태워 버리는 성스러운 미소였다.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 나는 얌전히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참 찾았는데 정령수 옆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런 나를 세스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지? 일부러 가까이 앉은 거 티 났나?
“내일이면 여길 떠나는군.”
“그러게요.”
워낙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서 떠날 때가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서운하지 않아?"
“음, 아뇨. 여기서 할 일은 다 했으니까요.”
팔자에 없는 구원자 노릇이라니, 적성에 안 맞아서 죽을 뻔했다. 이제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든 놀러 오면 되는걸요.”
언제 오든 반겨 줄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도 없었다.
“다행이군.“
안도 어린 세스의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가 여기 남아 있겠다고 떼쓸 줄 알았어요?"
“당신이라면 비밀리에 여기서 살 계획을 짜겠지.”
뭐지, 귀선인가? 찔끔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여기서 살면 하루 종일 시달릴 걸요?"
안 그래도 세계수 때문에 여기서 살 마음은 접은 뒤였다. 내 대답에 세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참, 세스. 오늘은 주크를 깨워야 할 것 같아요.”
나는 허리띠에 끼워 둔 주크를 꺼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옮긴 탓일까. 북부로 오자마자 잠들어 버린 주크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왕의 길을 열었을 때도 잠들었지만, 이렇게 오래 깨어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걱정이 된 나는 세스에게 주크를 보였다. 주크를 살 핀 세스는 녀석이 멀쩡하다는 답을 주었다.
“그냥 잠들어 있는 것뿐이야 계속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손을 쓸게.”
만약 오늘도 주크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출발을 미뤄야 했다. 왕의 길을 사용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짜야하니까.
"지금 깨워 놔야 내일까지 정신을 차리겠군.”
주크를 받아 검집에서 뽑아낸 세스가 드러난 검날에 주저 없이 손을 그었다.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주크를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스!”
깜짝 놀란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세스가 벌써 아물어 가는 상처를 보여 주었다.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나으니까.”
“그, 그래도 아프잖아요!"
“별거 아냐."
아무리 빨리 낫는다고 해도 아픔은 그대로일 텐데.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깨우는지 미리 물어볼걸.’
“그런 표정 짓지 마. 정말 괜찮으니까.”
시무룩해진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세스가 멈칫했다. 상처는 사라졌지만 피는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을 당겨 소매로 슥슥 닦아 준 다음 내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피식 웃은 세스가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띠링······.
그때 주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야 겨우 눈을 뜬 녀석이 주변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주크, 괜찮아?"
-띵!
오랜만에 듣는 오르골 소리가 반가웠다. 그때 마치 주크에게 대답하듯 우웅하고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응? 이 게 무슨 소리지?"
마치 아랫집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진동이 정령수의 안쪽에서 난다는 것을 눈치겠다.
“범인이 너야?"
내 물음에 정령수가 억울하다는 듯이 가지를 흔들었다. 그리고 지퍼를 내리듯 껍질을 벌려서 제 속을 보여 주었다.
벌어진 껍질 속에는 옹이가 파인 것처럼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속에서 우웅우웅-울고 있는 물체를 발견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건?"
* * *
“이블린 정말 가는 거야?"
갈색이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늑대보단 순한 강아지 같은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보고 싶으면 편지 보내.”
“응, 꼭 보낼게!"
“아트레유, 너도 잘 있어.”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과목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 고개를 숙이나 싶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서 무릎을 꿇었다.
"북부의 아들인 아트레유가 당신께 검을 바칩니다.”
"북부의 아들인 바스티안이 당신께 검을 바칩니다.”
갈색이가 형을 따라 무릎을 꿇고 똑같은 말을 반복 했다. 이어서 변경백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도미노처럼 무릎을 꿇었다.
북부의 전사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내게 검을 바치겠다고 외쳤다. 공기가 우렁우렁 울릴 정도였다.
“제 검은 당신의 적을 벨 것이고, 제 심장은 당산의 명에 따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인 과묵이가 답을 기다리 듯 나를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맹세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나를 구원자라고 불러 준 이들에게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제야 무릎 꿇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과묵이는 어딘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언제든 부르시면 달려가겠습니다.”
“하도 멀어서 오는 도중에 볼일이 끝나지 않을까?"
“그럼 부르시지 않아도 가겠습니다."
싱긋 웃는 과묵이는 큰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괜히 멋쩍어진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든 다음 돌아섰다.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자 뒤엉켜 싸우고 있는 단검과 거대한 이쑤시개가 보였다.
-띠링!띵!
-우웅! 우우웅!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한숨을 쉰 나는 주크와 이쑤시개를 떼어 놓았다.
“이 녀석들, 얌전히 있으라니까.”
하지만 두 녀석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말리는 사람이 나타나자 더 길길이 날뛰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 말은 통 듣지 않아서.”
정령수의 가지를 안고 있던 안나가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런 꼴이지만 오신기잖아. 누가 말리겠어.”
이런 꼴이라는 내 말에 이쑤시개가 웅웅 울었다.
오래전 대륙은 아주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도 나라가 많아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하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때 지고왕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 모든 나라와 동맹을 맺고 연합 왕국을 만들었다.
지고왕은 인간의 왕국뿐만 아니라 수인족과 그레이 일족 그 외의 수많은 이종족들과 평화롭게 살자는 협정을 맺었다.
덕분에 한동안은 모두가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았다.
그런데 지고왕의 마지막 후손인 배반의 기사는 모든 나라를 통일하여 하나의 왕국을 세우길 원했다.
콩 심은 데는 콩 난다는데, 어디서 이런 황제병자가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동맹국을 정복해 거대한 왕국을 세운 배반의 기사는 이종족과 맺은 평화 협정까지 화끈하게 깨 버렸다.
결국 전쟁이 터졌고 수많은 적을 만든 그는 측근에게 배신당해서 비참하게 축었다. 그가 세운 왕국도 아스트리아와 여러 나라들로 쪼개졌다.
통수는 통수로 돌아온다는 아주 좋은 예였다.
논란이 된 부분은 배반의 기사가 어떻게 이종족과 맺은 협정을 깼나는 것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수인왕을 두들겨 됐다, 유부남인 수인왕에게 청혼했다 동의 수많은 가설이 있었는데 지금 그 답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은색 이쑤시개.
정확히는 반으로 부러진 이쑤시개의 뾰족한 부분.
오신기 중 하나인 빛의 창이었다.
“전설이 사실이었군요. 정령수 안에서 빛의 창이 나오다니.”
내가 들고 온 이쑤시개를 본 변경백은 무척 놀라워했다.
수인족에게는 배반의 기사가 다짜고짜 정령수를 찔러 죽이는 바람에 오래된 맹약이 깨졌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고 했다. 정령수 안에서 배반의 기사가 사용하던 빛의 창이 나와서 전설 이 사실 이라는 게 증명된 셈 이었다.
나는 수인족이 왕국에 악감정을 갖지 않을까 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혹시 화가 나거나 이성을 잃으실 것 같다거나…….”
“예? 아무 생각도 안 듭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저희도 이제 왕국의 일원이니까요. 그저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변경백은 걱정하는 내가 귀엽다는 것처럼 웃었다. 그들에겐 거의 신라 시대 같은 느낌인 모양이다.
“제 생각에는 빛의 창도 구원자께서 거두시어 폐하께 바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변경백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내게 짐을 떠맡겼다. 결국 나는 이쑤시개까지 데리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르릉······.
게다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도 있었다. 하얀 곰이 어슬렁거리며 마차의 뒤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아니, 넌 또 왜 와! 저리 가, 귓귓!"
-크릉!
곰은 팩 고개를 돌리면서도 따라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집까지 따라붙을 기세였다.
‘아무래도 정령수의 가지 때문인 것 같은데.’
정령수의 수호자인 곰은 인간의 땅에 뿌리내릴 새 정령수가 걱정인 듯했다. 하지만 정령수의 첫 꽃이 필요한 나는 가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세스를 바라봤다. 눈치 빠른 남자는 괜찮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결국 나는 한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널 받아 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 다시는 날 속이거나 배신하지 마. 알겠어?"
억울한 표정을 지은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즉석에서 녀석의 이름을 지어 붙였다.
“넌 코크라고 하자. 코카콜라의 코크야.” -
-우우웅!
그러자 거대 이쑤시개가 자신도 이름을 달라는 것처럼 폴짝거렸다. 반쪽이 녀석이 이름은 무슨.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로하님!"
“구원자님!”
내가 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북부 사람들이 잔뜩 몰려나와 있었다.
나는 잠시 마차를 멈추고 코크의 등에 탄 채로 앞으로 나섰다. 가짜 구원자로서 마지막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여러분, 저는 이제 복부를 위해 싸우러 떠납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내 작별 인사에 북부 사람들이 울면서 함성을 질렀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선물과 추가된 일행을 데리고 북부를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결혼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