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세스가 처음 이블린과 만나게 된 것은 다소 충동적인 외출 때문이었다.
그날따라 서류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는 기분 전환 삼아 밀수선에 잠입했다.
사실 그가 직접 나설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밀수선을 조사하고 관련자는 처리했습니다.’라는 보고를 듣고 끝났을 것이다.
우연에 우연히 겹쳐 만들어진 그날. 세스는 좁고 더러운 우리 속에 갇혀 있던 운명과 만났다.
* * *
이블린의 첫 인상은 무척 마르고 작다는 거였다.
빗질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더러운 옷, 발목에 채워진 족쇄까지. 전형적인 노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모습은 어쩐지 노예답지 않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검의 선택을 받은 그를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에게 불쑥 말을 건 것 역시 낯선 기분 탓이었다.
"관찰당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순간 파르르 떤 이블린이 두 귀를 문질렀다. 마치 그가 귀를 간질이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거든요?"
예상 못 한 반응에 당황하던 그는 당돌한 대꾸에 실망을 느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건 우연이었군.’
그는 곧바로 작은 불빛을 만들었다. 왠지 심술궂은 마음이 들어, 깜짝 놀라 물러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스를 본 이블린은 외려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던지 민망할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자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그 뒤로도 힐끗힐끗 그의 얼굴을 훔쳐봤다.
‘설마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바짝 마른 얼굴에 눈만 남아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방향까지 다 보이는데.
세스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가 힐끗거릴 때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아니, 그보다 안쪽의 신경이 건드려지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블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자신을 사 달라는 엉뚱한 제안, 무례할 정도로 당돌 한 태도, 동생을 구하기 위한 헌신적인 모습까지.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스는 기꺼이 그녀의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을 위해 한 시간 뒤에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는 번거로움까지 무릅썼다.
세스 역시 자신이 왜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덕 인가?'
그의 하루는 공허함 속에 잠겨 있었다.
때로는 자기혐오와 절망이 죽은 물고기처럼 떠다녔고, 죄책감과 초조함이 잔물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무기력함에 사로잡혔다가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 외의 감정이 그의 마음에 닿았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은 잔잔한 표면에 파문을 일으킬 정도는 되었다.
‘나도 이럴 때가 다 있군.’
이 이상한 기분이 뭔지 모르겠지만, 새롭다는 것만 으로도 이블린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주군, 정말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실 겁니까?"
밀수선을 벗어났을 때, 동행중이던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스는 의아하게 그를 쳐다봤다.
“나더러 말을 바꾸라는 소린가?"
“아, 아닙니다. 고작 노예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필요는 없지 않냐 생각해서······.”
어물거리는 수하의 눈빛엔 의혹이 담겨 있었다.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그답지 않은 변명이었지만 확인해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이블린이 그렇게 자신하는 능력이 뭔지 궁금했다. 거짓이라면 살짝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또 내 예상을 빗나갔군.'
세스는 노예 상인을 잡고 있는 이블린을 보며 생각 했다 그녀의 손에 쥐여진 천에 빠르게 글자가 적히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고스란히 천에 적히는 것을 본 상인은 겁을 먹고 버둥거렸다.
확실히 저런 방법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빼낼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는 거겠지.’
신성력이라곤 한 톨도 없던 이블린의 몸에서 이질적이고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 이상한 느낌도 이것 때문이었나?'
어쩌면 성기사로서의 본능이 그녀의 신성을 감지했을 지도 모른다.
이블린의 힘은 사대신전에 속해 있지 않았다.
새로 태어난 신의 씨앗, 혹은 잊혀진 신의 그릇. 어느 쪽이든 이단으로 사냥당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만 힘이 드러나서 지금껏 무사했던 거군.’
세스는 계속 예상을 벗어나는 이블린에게 흥미를 느꼈다. 자신이 발견한 그녀를 신전에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블린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다음엔 또 무엇으로 놀라게 해 줄지 궁금했으니까.
어느새 그는 이블린을 옆에 남겨 둘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금껏 무시했던 약혼녀를 만들라는 왕의 명령 까지 끌어다 붙이면서 말이다.
‘이건 정말 나답지 않군.'
탈진한 이블린을 안아 든 세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품에 매달린 온기가 생소해서 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블린은 하얀 장미 저택에 놀라울 정도로 잘 적용 했다. 모리스가 붙인 선생도 그녀의 학습 능력에 놀라워 할 정도였다.
이블린은 이미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았고, 작문과 낭독 산술에선 교육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다만 악기 연주는 조금 서툴렀고, 자수는 기초부터 부족했으며, 예법에서는 아예 까막눈 수준이었다.
모리스는 다시 전문적인 교육을 주장했으나 세스는 예법만 가르치면 충분하다는 처음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굳이 필요도 없는 걸 시켜서 괴롭힐 필요는 없지.’
유독 마르고 작은 몸이 눈에 밟혔다.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그녀가 편하게 쉬었으면 했다.
[식사량은 여전히 늘지 않았습니다. 다시 주방장을 교체하겠습니다. ]
[밤에 불을 켜 놓고 주무십니다.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하가 언재 방문하는지 계속 물어보십니다. 말씀 하신 대로 전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블린에 대한 보고를 읽던 세스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그는 지나치게 자주 하얀 장미 저택을 방문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방문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블린을 찾아갔다. 진짜 약혼자라고 해도 미혼 여성이 사는 집에 이렇게 자주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지.'
이블린은 그가 무심하다고 여겼고, 차만 마시고 돌아기는 것을 서운해 했다. 방문할 때마다 선물을 잔뜩 사서 안겼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블린이 바라는 것은 세스가 더 자주 찾아오는 것뿐이었다. 오래 찾아가지 않으면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머리로는 이블린의 반응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스는 마치 홀린 것처럼 저택으로 찾아갔다 통제되지 않는 자신이 한심할 정도였다.
왜 이렇게 그녀에게 휘둘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 도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날은 네 번째로 하얀 장미 저택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의 옆에서 묵묵히 말을 달리던 모리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주군, 혹시 이블린 양을 보면서 형님인 아서 경을 떠올리고 계십니까?"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물음에 세스는 약간의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둘이 닮았나?'
너무 달라서 공통점을 찾기 힘든 두 사람이었다.
“이블린 양 역시 동생에게 헌신적인 사람이니까요.”
덧붙여진 설명에 세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블린은 분명 동생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문제는 아서가 그런 사람이었나는 것이었다.
세스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어머니의 기일 뿐이었다. 그 외에는 집으로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반면 언제든 세스를 보러 올 수 있는 아서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나러 신전을 방문하지 않았다.
세스에게 아서는 낯설고 매정한 형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아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블린 양과 아서 님은 다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그녀는 제 역할을 다할 겁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모리스에게 아서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설명 하고 싶진 않았다 모리스의 진정한 주인인 아서를 모욕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무어라 덧붙이려던 모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그들은 하얀 장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정문 근처에서 이블린이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온한 문지기의 태도를 보면 자주 저러는 듯했다.
"공작님!"
그를 발견한 이블린이 제자리에서 팔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모리스가 예법 교사를 잘라야겠다고 투덜거렸다.
뒤늦게 그를 알아챈 문지기가 문을 열자 이블린이 망아지처럼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당황한 세스는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이블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툭 부딪치는 체온이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오래된 연못처럼 가라앉아 있던 세계가 뒤흔들렸다. 세스는 품에 안긴 그녀를 멍하게 쳐다봤다.
“어때요? 사랑받는 약혼녀 같아요?"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아프게 눈에 박혔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세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 * *
“세스?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어깨를 건드리는 손에 세스는 눈을 떴다.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고 있었다. 너 무나 사랑스러운 동작이었다.
“이비.”
“한참 찾았는데 정령수 옆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의 옆에 앉은 이블린이 활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고 그렇게 웃었다. 그를 만나서 기쁘다는 것처럼 그가 있어서 행복한 것처럼.
그럴 때마다 공허한 세스의 마음에 빛이 내리쬐고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피었다.
이제 세스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자격이 없어 이름 붙이길 망설일 뿐이었다.
‘만약 복수를 끝내면······.'
그때는 이블린에게도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