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 *
북부에선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설 그대로 눈 요정을 타고 나타난 소녀가 정령수를 부활시킨 것이다.
성주인 변경백은 정령수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밤마다 성 위의 하늘이 오색으로 빛나, 그곳에 정령수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정령수의 귀환을 알리듯 메마른 셈과 강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아무것도 없던 메마른 황야는 부드러운 풀로 뒤덮인 초원으로 변했다.
“구원자께서 우리에게 정령수를 돌려주셨어!"
“이제 가뭄은 끝났다고. 더 이상 농사를 망치는 일도 없을 거야."
“나는 직접 구원자님을 봤어 그분께서 내게 믿으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어.”
사람들은 희망에 들떠서 구원자와 정령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텅 빈 눈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내일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진 사건은 모두를 경악시켰다. 오랫동안 북부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대무녀가 직위를 잃고 유폐됐기 때문이다.
대무녀를 따르던 사람들이 항의했으나, 그녀가 구원자를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존경받는 대무녀라고 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으니까. 그만큼 북부에서 구원자가 갖는 의미는 컸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성 쪽으로 절을 하며 구원자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 구원자께선 지금 뭘 하고 계실까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겠지.’
그리고 북부를 구원한 이블린은 모두와 함께 술을 담그는 중이었다.
“곰아, 여기 좀 더 파자. 열매가 아직 많이 남아서 항아리 몇 개 더 묻어야겠다.”
이블린의 지시를 받은 곰이 한숨을 쉬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옆에선 백탑주가 항아리를 소독하고 있었다.
늑대 형제들은 항아리에 정령수의 열매를 넣고 설탕을 아낌없이 뿌렸다. 변경백은 그 위에 증류주를 붓고 밀봉한 후에 구덩이 속으로 옮겼다. 그러자 정령수의 뿌리가 스르륵 항아리를 휘감고 열심히 기운을 홀려보 냈다.
모두의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을 확인한 이블린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되고 있군.”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정령수가 너무 많은 열매를 생산한 탓이었다.
정령수는 보름 동안 무려 세 번이나 열매를 생산하는 업적을 이뤘다. 이블린의 협박도 있었지만, 정화된 저주가 전부 거름으로 바뀌어 영양이 풍부했기에 가능 한 일이었다.
“이러다가 열매 가격이 폭락하겠는데.”
예상외의 상황에 머리를 긁적인 이블린은 필요한 양만 남기고 모조리 술을 담그기로 했다.
“······예? 정령수의 열매로 술을요?"
정령수를 신성시하는 그레이 일족인 백탑주는 기겁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정령수의 열매라고 해서 술로 못 담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열매가 거기서 거기지, 뭐.’
모든 식물을 김치로 만들고, 모든 열매를 술로 담그는 문화권에서 살았던 사람의 신념이었다. 세계수의 열매라도 아마 취급은 비슷했을 것이다.
처음엔 당황하던 사람들도 나중엔 ‘구원자께서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라고 말없이 따랐다.
그들 중 누구도 이 술이 나중에 ‘왕국의 13가지 비보' 중 하나인 ’엘릭서’가 된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렇게 왕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술 담그기가 끝났다.
“이블린, 이거 언제 먹을 수 있어?"
늑대 형제 중 동생인 바스티안은 이제 어떤 술이 나올지 기폐하는 눈치였다.
"백 일 뒤에 열어 보고, 덜된 것 같으면 일 년 뒤에 열어 보고, 그래도 아닌 것 같으면 삼 년?"
정령수의 열매로 술을 담그는 게 처음이라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블린의 대답에 바스티안이 기대 어린 얼굴을 했다.
“그럼 백 일 뒤에도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나 내일 가는데?"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은 늑대 형제가 멍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이블린이 뺨을 긁적였다.
“어, 내가 아저씨한테만 말했구나. 미안. 결혼식 준비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거든.”
”······결혼식 준비군요."
아트레유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가슴이 곽 죄어 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왜 술을 만들자고 한 거야? 그냥 열매로 가져가면 되잖아?"
“응? 내가 왜 가져가? 이건 너희가 써야지.”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문이 막힌 바스티안 대신 아트레유가 나섰다.
"은인께선 북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정령수를 부활시키고 광맥의 위치를 짚어 미래를 털어 주셨죠. 그러면서 아주 작은 이득조차 취하지 않으시니 이유를 몰라 당황스러운 겁니다."
“어? 진짜 이유를 모르겠어?"
이블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당황한 아트레유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너희가 날 살려 줬잖아. 목숨을 구해 준 거에 비하면 내가준 건 아주 작은 거지. 안 그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습에 아트레유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은인께선······.'
이블린은 몇 번이나 그들을 구해 주었다. 그녀가 베푼 은혜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반면 그는 이블린이 시킨 대로 따른 것밖에 없었다. 그녀를 구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그 둘을 뭉뚱그려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더 이상 주고받을 것이 없는 관계처럼.
‘선을 그으시려는 거야.'
이런 식으로 밀려나긴 싫었다. 주먹을 꽉 쥔 아트레유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이비, 바빠?”
불쑥 정원에 나타난 공작이 이블린을 불렀다. 얼굴이 확 밝아진 이블린이 그를 돌아봤다.
“아뇨, 다 끝났어요.”
“다행이군. 내일 출발 때문에 의논할 게 있는데.”
“네?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깜짝 놀란 이블린이 그에게 종종 다가갔다. 공작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기며 아트레유를 힐끗 쳐다봤다.
공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트레유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마치 굶주린 사자가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공작은 이미 이블린을 데리고 사라진 뒤였다.
* * *
"까아악!"
라리사가 절망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앞에 놓인 상자엔 산산이 깨어진 거울이 들어 있었다. 라리사는 자신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발광했다.
“안 돼! 아니야! 이럴 순 없어!"
깨어진 거울은 라리사의 주인이 그녀를 버리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주인님께선 ‘알과 검은 꽃’에 손을 댄 것에 몹시 노여워하시며, 그동안의 성과를 봐서 목숨은 살려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뺨에 회초리 자국이 있는 시녀가 주인의 말을 전했다. 순간 라리사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네 짓이구나! 네가 주인님께 모두 일러바친 거야!"
“주인님의 눈은 세상 모든 곳에 있습니다.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신 게 더 이상하지요.”
시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라리사가 주인에게 버림받으면서 그녀 역시 자선의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절망 한 시녀는 라리사의 폭력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네가 일러바친 거잖아! 전부 네 탓이야! 이 못된 것!”
악을 쓰며 달려든 라리사가 시녀의 목을 졸랐다. 아름답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보기만 해도 무서울 정도였다.
버둥거리던 시녀의 몸이 축 늘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손을 놓은 라리사가 뒤로 물러섰다.
“안 돼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바닥에 쓰러진 시녀가 헛구역질과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라리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주인님이 다시 나를 보게 만들 수 있지?"
눈물과 침으로 젖은 얼굴을 든 시녀가 증오 섞인 눈빛으로 라리사를 노려봤다.
하지만 라리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그녀가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선대 공작뿐이야.'
선대 공작, 케인 엘마이어는 현재 팔머 항의 밀수 문제로 고위 귀족의 감옥인 하얀 탑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죄인은 아니었다. 왕은 엘마이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어떤 재판이나 기록도 남기지 않고 케인을 감금했다.
만약 케인 엘마이어를 탈옥시킨다면 그를 다시 잡아 가둘 명분이 없는 셈이었다.
‘끔찍한 인간 감옥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리사의 어머니는 선대 공작 부인인 캐서린 공주의 그림자였다.
암투가 일상적인 카스티야에선 왕족과 닮은 아이를 그림자로 선발하여 어릴 때부터 함께 키웠다.
라리사는 그런 어머니를 빼닮은 용모를 갖고 있었다. 그건 곧 캐서린 공주와도 닮았다는 소리였다.
캐서린 공주의 딸인 마거릿 공녀보다 라리사가 더 그녀와 비슷할 정도였다.
캐서린 공주가 죽은 후 상심에 빠진 선대 공작은 아내와 닮은 라리사를 딸처럼 아꼈다.
라리사는 그의 감정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을 대용품으로 여기는 공작을 경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라리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제게 맹목적인 선대 공작뿐이었다.
"당장 편지지를 가져와.”
"······. "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시녀가 편지지를 준비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라리사는 이내 펜을 잡고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갖 가석적인 말로 선대 공작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세스에 대한증오를 부추겼다.
그리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재회하는 날만 꿈꾸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블린 하인즈가 프리지어 궁에 있는 이상, 제가 돌아갈 집은 영영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예요.]
편지를 받은 선대 공작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는 라리사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블린을 프리지어 궁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블린이 보호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기회야.’
라리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블린을 죽이면 이번에야말로 그 강철 같은 남자가 무너질 것이다.
그럼 주인님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회심의 미소를 지온 라리사가 펜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