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
세상 어디에나 잡초처럼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이비다.
그들은 몹시 집요하다. 평범한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포석을 깐다.
-그레이 일족의 아이가 말하지 않았니? 너는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존재라고.
친구나 지인이 알고 보니 날 포교하기 위해 접근한 사이비였다는 사연은 이제 별처럼 많을 정도다.
-너는 사설 영원을 지키는 뱀이란다.
그리고 표적이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한다. 평범한 일상이 지겨워진 사람들이 홀랑 넘어가도록 말이다.
-너의 자리는 그곳이 아니야. 어서 돌아오렴.
소속을 강조하는 것조차 전형적인 사이비였다. 물론 전생에서 수많은 ‘도를 아십니까?'를 겪은 나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내 전생을 기억하는데 무슨 뱀이야?'
문제는 상대가 수작을 부려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화? 말이 통하면 그게 사이비겠는가?
그래서 나는 머리에 꽃을 꽂기로 했다. 이건 누가 더 미친 짓을 할 수 있느냐의 승부였다.
내가 이 구역의 방화범이라고 미쳐 날뛰자 사이비들 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놓아주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사이비에게 끌려가 있는 동안 내 몸은 가사 상태였던 모양이다. 참 여러 가지로 오싹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 엄마가 나한테 한 짓은 네가 대신 갚아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정령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령수는 바스락 거리며 이파리를 떨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덕분에 준비해 온 성냥을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 역시 오래 살려면 눈치가 빨라야 해.
“얘들아, 지도 펴라.”
내 말에 뒤에서 대기 중이던 과묵이와 갈색이가 얼른 지도를 펼쳤다. 변경백에게 부탁해서 받은 지도는 제법 상세하게 산과 평야를 묘사하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어디에 뭐가 묻혀 있는지 표시하자. 금은동철 순서로. 보석은 따로 표시하고.”
정령수의 가지가 왔다 갔다 흔들렸다.
“응? 그걸 어떻게 아냐고?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 잔뿌리만 움직여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겠더라.”
가지를 축 늘어뜨린 정령수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세계수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르르 몰려든 빛 덩어리들이 지도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알록달록 그어지는 선들에 나는 인상을 썼다.
"야, 선만 그으면 어떡해. 매장량이 얼마인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도 적어야지. 내가 몇 백 년 동안 그것 만파고 있을까?"
멈칫한 빛 덩어리들이 다시 열심히 움직였다. 음, 좋아. 아주 잘되고 있군.
"근데 광산 파려면 시드 머니가 좀 필요하거든? 너 이번 주까지 열매 얼마만큼 생산할 수 있니?"
정령수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얘들아, 자루 좀 갖다 줘라.”
과묵이와 갈색이가 사람 키만 한 자루를 꺼내 정령수 아래 착착 깔았다. 크, 그림 좋고.
“내가 내일까지 이거 채우라고 하려다기가 인간적으로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이번 주로 늘렸거든. 고맙지?"
정령수가 너무 고맙다는 것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하하, 녀석도 참.
“아참, 잊을 뻔했다. 열매 키우다가 남는 시간에 이것도 좀 키워라. 쉬엄쉬엄하면 돼.”
나는 마지막으로 정령수에게 채소 모종을 건네주었다.
일하다 심심할까 봐 취미까지 책임져 주는 나란 사람. 좀 괜찮은 것 같다.
“아이고, 난 이제 쉬어야겠다. 오늘 일을 너무 많이 했는지 힘드네.”
“무리하셨습니다.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과묵이가 눈치껏 나를 부축했다. 나는 정령수를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그래, 난 들어간다. 수고하고.”
정령수의 이파리에 눈물처럼 오색찬란한 이슬이 맺혔다. 순간 저것도 모아서 팔아 볼까 히는· 마음이 들었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압박을 주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 * *
왕은 그레이 일족의 장로, 메티스의 방문을 받았다.
이전의 뻣뻣했던 모습과 달리 메티스는 왕의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동행한 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천공신의 나라, 아스트리아의 주인이시여. 이전엔 제가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흐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그대의 제안을 거절한 기억밖에 없는데?"
제안이라는 말에 메티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전에 그녀는 이블린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정령수의 열매를 내밀었다. 왕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지 생각하자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폐하께서 이블린 하인즈를 북부로 보내 정령수를 부활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듣는 귀가 빠르군. 첩자를 불인 건가?"
“아닙니다. 일족의 아이가 우연히 기적을 목격하는 영광을 입었을 뿐입니다.”
메티스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왕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치우지 않았다. 결국 메티스는 속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정령수가 불타올랐을 때, 저희 일족은 정령수를 지키지 못한 수인족에게 책임을 묻다가 그들과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령수를 훼손한 인간이 왕의 조상인 배반의 기사라는 사실은 입에 답지 않았다. 하지만 언급만으로도 왕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래서 정령수가 부활한 지금도 저희 일족은 북부로 갈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아무쪼록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길을 열어 주시길 바랄뿐입니다.”
왕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메티스를 말없이 바라봤다. 침묵의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정리하자면 내가 그대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여 북부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자존심 높은 그레이 일족이 인간의 신하를 자처하다니, 굴욕감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정령수가 부활한 지금, 어떤 치욕을 겪더라도 북부로 가야 했다. 그들의 존재 의미는 바로 정령수를 옆에서 모시는 것이었으므로.
“흠, 예상 그대로의 말이군. 알현을 청하기에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늘 실망이구나.”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메티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왕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블린을 북부로 보내 돌보게 한 것은 오랜 가뭄으로 그곳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겨우 안정의 기틀을 잡은 상황에 또 다른 혼란을 추가할 생각은 없다."
"북부를 안정시키는 것에 저희 일족의 힘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문제는 차후에 논의한 뒤에 결정하겠다.”
“폐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허나 왕은 차갑게 손을 내저어 알현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레이 일족은 쫓겨나듯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알현을 끝낸 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허세는 거기까지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왕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게 또 무슨 일이냐? 진짜 정령수가 부활했어? 이블린이 보낸 편지가장난이 아니었다고?"
“그러니 제가 심사숙고하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왕의 시녀장인 피오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왕이 듣기 싫다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애가 뭘 잘못 먹고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지 잔소리 그만하고 이블린이 보낸 편지나 도로 가져와.”
한숨을 내쉰 피오나가 이블린이 북에서 보낸 편지를 들고 왔다. 왕은 처음부터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정령수입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저회 애들을 잘 돌봐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계가 잠든 사이 세월이 몇 백 년이 흘러 나라 이름도 바뀌었더군요.
이제 와서 무국적자로 살려니 애들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제 앞으로 좋은 자리 하나 해 주시면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재가 광산 하나 팔 생각인데 빠른 허가 부탁드립니다. 애들이 아직 굶고 있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많은 열매로 보답하겠습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픈 정령수 올림.]
왕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걸 보고 진짜라고 생각 하는 쪽이 더 이상한 것 아니냐고.
“이걸 혹시 정령수가 쓴 걸까?"
"······."
조심스럽게 물어본 왕은 제정신이냐는 피오나의 시선을 받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니, 이블린이 정령수의 말을 듣고 대필을 한 것이 아닐까 해서.”
“이블린이 아무리 특이해도 그런 능력은 없을 것 같습니다. 폐하.”
"혹시나 해서 말한 거지! 혹시나!“
얼굴이 붉어진 왕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편지가 사실이라면 이블린이 정령수를 부활시킨 거로군 그리고 북부에서 광산도 하나 발견했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상대가 이블린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왕은 몇 차례의 경험으로 ‘음, 그래. 그렇게 됐군.’ 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정령수에게 작위를 내리면 앞으로의 혼란을 줄일 수 있겠지.'
정령수가 사라지기 전, 수인족은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였다. 정령수의 부활로 인해 그때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품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령수가 왕의 신하로서 작위를 받는다면 위험이 줄어들 것이다. 이블린이 그걸 다 생각하고 편지를 썼을까 의심스러웠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다.
“성기사단장도 피할 겸, 기분 전환도 할 겸해서 북부 로 보냈더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그게 더 이블린답긴 하지요.”
피오나의 말에 피식 웃은 왕이 이내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돌아오면 방에 묶어 놔야겠어. 눈만 떼면 사고를 치니.”
"공작께서도 그게 걱정되어 따라간 게 아니겠습니까.”
피오나가 슬며시 세스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왕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따로 불러서 이블린을 따라가지 말라고 명령까지 했는데 감히 왕명을 어겨?"
그냥 떠난 것도 아니고 성기사단장을 다져 놓고 훌쩍 떠나는 바람에 자신이 뒷수습을 해야 했다. 그동안 의 고생을 떠올린 왕이 부득 이를 갈았다.
둘 다 돌아오기만 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