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죽은 자가 부활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에 늑대 형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이블린!"
“은인!”
감격한 그들을 본 이블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숨이 잠깐 끊어졌었다는 사실을 짐 작조차하지 못했다.
-꾸우!
그리고 용수철처럼 튕겨 오른 복실이가 그녀의 뺨에 주둥이를 찍었다. 아파서 비명을 지른 이블린은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복실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복실아?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꾸꾸꾸! 꾸우!
복실이가 자랑스럽게 무어라 말했지만.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트레유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공작 전하께서 데리고 오셨습니다.”
”뭐?”
이블린이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곰과 격투 중인 공작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세, 세스?"
언제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왔으면 나랑 놀 것 이지, 왜 곰이랑 쎄쎄쎄를 하고 있단 말인가. 라는 뜻이 담긴 외침이었다.
“······이비?"
일방적으로 곰을 몰아붙이던 공작은 믿을 수 없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때까지 계속 얻어터지고 있던 곰은 절호의 기 회를 놓치지 않았다.
-구어엉!
곰의 앞발이 공작을 후려쳤다. 사정없는 공격에 이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놀란 그녀는 벌떡 일어나 공작에게 달려가려다가 그대로 철퍽 엎어졌다. 아직 몸에 힘이 없는 탓이었다.
"은인! 괜찮으십니까?"
이블린을 부축한 아트레유는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블린은 무척 용감한 사람이었다. 목숨이 날아갈 위기가 닥쳐도 태연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가 지금은 어린애처럼 훌쩍이고 있었다.
“나세스에게 데려다줘.”
“전하는 무척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아트레유는 어느새 벌떡 일어난 공직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곰의 앞발이 아니라 솜방망이로 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게 인간인가.'
튼튼하기로 이름난 수인족인 아트레유도 곰의 공격을 버텨 낼 자산은 없었다. 곰의 앞발에 얻어맞고도 당당히 서 있는 공작의 모습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세스!”
반면 이블린은 멀쩡한 공작을 보고 환해진 얼굴로 기뻐했다. 아트레유가 그녀를 부축해 공작에게 데려가려는 순간이었다.
-크르릉!
곰이 커다란 덩치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춤하는 아트레유와 달리 이블린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와락 달려든 그녀가 곰의 털가죽을 쥐어뜯었다.
“이 양심도 없는 짐승아! 내가 죽을 둥 살 등 너희 집 화분 살리고 있는데, 옆에서 내 약혼자를 쳐? 나랑 한 번 해보자는 거야?"
-크앙!
하얀 털이 눈송이처럼 휘날렸다. 곰은 사정없이 쥐어뜯기면서도 차마 이블린을 밀쳐 내진 못했다.
-뿌!
엄마의 용맹한 모습에 흥분한 복실이가 튀어 올라 곰의 귀를 물고 늘어졌다. 곰의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울러 퍼졌다.
뒤이어 이블린은 정령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야! 너희 엄마가 나한테 사기를 쳤으면 너라도 미안해해야지! 내 약혼자 두들겨 패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 너도 엄마 닮아서 사기꾼 꿈나무야? 어?"
부활하자마자 장작이 될까 봐 떨고 있던 정령수가 억울함에 가지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이블린의 눈에 그들은 그저 사기꾼이자 세스까지 때린 악당이었다.
“뭘 잘했다고 반항이야! 팔 똑바로 못 들어?"
정령수의 잎사귀가 부르르 떨렸다. 축 처진 가지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아트레유는 명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위대한 존재한테 저래도 되나 싶었지만, 말리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트레유! 나 좀 도와줘!"
동생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쓰러진 대무녀를 부축하는 바스티안이 보였다. 아트레유의 얼굴이 절로 차가워졌다.
“그냥 내버려 둬.”
이블린이 여기서 죽으면 그 대가는 북부가 치르게 됐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 대 무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바스티안이 곤란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나도 배신감 느껴. 그렇다고 여기 둘 수는 없잖아.”
"······.“
“형, 우리 역할은 끝났어. 이제 그만 가자."
아트레유는 여전히 곰을 쥐어뜯고 있는 이블린과 그녀의 옆에서 서성거리는 공작을 바라봤다.
조금 뒤에 이어질 그들의 재회는 아트레유에겐 가슴 아픈 장면일 것이다. 바스티안은 그 전에 떠나자고 권하고 있었다.
한숨을 쉰 아트레유는 대무녀를 짊어졌다 마음 같아선 그냥 버려두고 가고 싶었지만, 대무녀의 죄를 처벌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이블린을 돌아본 아트레유는 동생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블린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확히는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헥헥, 나 죽는다.”
잠시 숨이 멈췄던 사람이 곧바로 활기차게 몸을 움직였으니 탈진하는 것도 당연했다. 보다 못한 공작이 그녀를 안아 올려 곰에게서 떼어 냈다.
“이비.”
“······어? 세스?"
흐릿한 눈으로 그를 쳐다본 이블린이 물었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숨이 끊어졌던 사람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에 쓴웃음을 지온 공작이 속삭였다.
“당신만 무사하다면 난 어떻게 되든 괜찮아.”
“괜찮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죠.”
입을 삐쭉인 이블린이 대꾸했다. 맞닿은 몸에서 콩 콩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이 온기를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다. 공작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세스?"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던 이블린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신기해요. 세스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나타나서 꿈인 줄 알았거든요. 곰의 펀치에 맞고 날아가는 것까지요."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덧붙인 이블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공작이 그런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그에게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을 느낀 이블린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은데, 지금 그랬다간 정말 기절시킬 것 같군.”
공작이 아쉬운 듯 속삭였다. 그때 이블린의 목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복실이가 꾸꾸 하고 울었다.
녀석은 공작의 입술에 주둥이를 박은 후, 이블린의 입술에도 뽀뽀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아이고, 내 새끼! 똑똑하기도 하지.”
이블린이 얼른 복실이를 칭찬하며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복실이는 더욱 의기양양해하며 머리를 꼿꼿이 세웠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공작이 그 걸 보고 웃어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따라잡은 거예요? 전 왕의 길을 사용하고서도 겨우 오늘 도착했는데.”
이블린의 목소리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혹시 그가 무리했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때마침 정답을 알려 주듯 백탑주가 변경백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그는 이블린을 끌어안고 있는 공작을 보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당신! 어떻게 사람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갈 수가 있습니까!"
"방해꾼이 동장했군.”
악에 받친 목소리에도 공작은 어깨만 으쓱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탑주는 탈진한 자신을 길바닥에 버리고 간 공작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변경백이 발견하고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길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제가 아니면 여기 도착하지도 못했을, 으악!"
씩씩거리던 백탑주가 갑자기 바닥을 굴렀다. 그를 부축하던 변경백이 예고도 없이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든 백탑주는 곧 변경백을 탓할 수 없게 되었다.
"저, 정령수?"
그가 변경백이었어도 독같이 넋을 잃었을 테니까.
전설 속의 나무를 멍하게 쳐다보던 백탑주는 그 아래 있는 곰을 보고 기겁했다.
‘위대하신 분께서 왜 여기 계신 거지?’
그레이 일족이 섬기는 백은의 곰은 세상에게 버림받은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백탑주는 더욱 혼란스러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사이 공작은 이블린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이비, 춥지 않아?"
“어, 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백탑주가 한 말이 신경 쓰이는데…….”
이블린은 찜찜한 얼굴로 백탑주를 쳐다봤다. 그러나 불행히도 백탑주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헛소리겠지.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당신은 지금 쉬어야 해.”
이블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녀가 제일 잘 느끼고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세스는 그녀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블린이 입을 열었다.
“세스.”
”······응?“
"여기까지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요.”
“내가 당신을 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야."
이블린은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도, 세계수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미뤄 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 * *
백은의 곰은 우울했다.
정령수를 수호하는 세 존재 중 둘이 사라진 지금, 그는 홀로 과중한 업무를 떠맡고 있었다.
그러다 동료인 뱀 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이제 겨우 일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겨우 만난 뱀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일을 나누기는커녕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난감해하던 곰은 정령수를 부활시키면 뱀도 기억을 되찾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정령수가 부활한 뒤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양심도 없다는 욕이나 먹고 신나게 털을 쥐어뜯기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사실 이블린이 뱀이 아니라면 말이 된다.
하지만 뱀이 아니면 이 땅 아래 고여 썩어 가던 것을 정화할 수 없었다. 그건 정령수 대신 저주를 삼킨 뱀의 몸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독기였으니까.
혼란스러워진 곰은 세계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세계수도 혼란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명을 마친 이블린의 영혼을 불러들인 세계수는 사기꾼이라고 거하게 욕을 먹었다.
”와, 이젠 나무가 사람한테 사기를 치네. 뭐? 뱀? 배 애앰? 어디 불뱀 맛 좀 봐라. 내가 여길 다 불 싸질러 버릴 테니까!"
날뛰는 이블린을 감당하지 못한 세계수는 그대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블린이 정말 뱀이라면 세계수를 만나는 순간 기억을 되찾아야 했다. 세계수를 만나고도 변화가 없다면 그녀는 뱀이 아니었다.
하지만 뱀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인가?
머리가 복잡해진 곰은 생각하길 포기했다. 그는 그냥 정령수 아래 엎드려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