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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18화 (118/240)

118화

“위대한 존재께서 내린 사명을 무사히 완수하시길.”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던진 대무녀가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위대한 존재는 무슨. 사기꾼 세계수에겐 산성비만 줘야한다.

천을 어깨 위에 걸친 나는 새카맣게 탄 정령수에게 다가갔다. 그때 머뭇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온 과묵이와 갈색이가 호소했다.

”은인, 전 순수하게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맞아, 사명 같은 소리는 처음 들었어! 진짜야!”

둘은 대무녀의 말을 듣고 내가 오해할까 봐 걱정인 것 같았다. 나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알아, 옆에서 열심히 응원해 줘. 혹시 모르니까 내 몸에는 손대지 말고 피를 토하거나 해도 그냥 내버려 둬야해 알겠지?"

"······예?"

과묵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얗게 질린 동생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때 내가 한 말도 기억났다.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만약 내 몸이 검게 변하면 오른손을 심장에 올리고 왼손에는 천을 쥐여 줘 할 수 있겠어?"

"예, 알겠습니다. 은인."

과묵이의 대답에 환상이 깨지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방금 뭐였지?'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러다 저주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나는 천을 꽉 움켜쥐고 다른 손을 까맣게 탄 기둥 위에 올렸다. 정신을 집중하자 곧바로 새까만 것이 내 팔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그것이 피부에 닿는 순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으, 이거 생각보다 더 아픈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구역질이 아니라 피를 토할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검은 것들을 천으로 흘려보냈다.

저주는 글자로 변하는 대신 천을 불태웠다. 천에 섞인 무녀들의 머리카락이 저주에 저항하는 게 느껴졌다.

지지직, 뜨거운 철판 위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으, 은인!"

“괜찮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아이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너희를 지켜 줄게.

나는 눈을 감고 남은 저주를 가늠해 보았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데도 고작 한 컵 정도의 저주만 뽑아냈을 뿐이었다.

‘서둘러야 해.’

이대로는 저주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저주를 내 몸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저항하지 않고 저주에 몸을 내주었다. 흐르는 물처럼 저주가 내 몸을 통과하도록 내 버려두었다.

감각이 점점 흐릿해졌다. 반복되는 통증을 버티지 못한 의식이 몸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제일 처음엔 눈이 어두워지고, 그다움 코가 둔해졌다.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멀어지고 마지막엔 귀까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둠이 내 몸 위로 내려앉았다. 꼭 밤바다 위를 둥실 둥실 떠다니는 해파리가 된 것 같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지?'

이젠 시간 감각도 희미했다. 저주를 모두 없애 버렸는지, 아니면 없애는 중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 세스보고 싶다.'

고작 사흘이 지났는데 세스를 본 지 삼 년은 된 것 같았다. 복실이와 다른 사람들도 그리웠다. 빨리 저주를 해결하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

무의식중에 발을 꼼지락거리는 순간 발아래가 퍽 하고 금이 갔다. 마치 계란이 깨지듯 사방에서 빛이 쏟아 져 들어왔다.

”으아아, 내 눈!"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어, 잠깐만. 손이 움직이잖아? 뒤늦은 깨달음에 멈칫하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어서 오렴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단다.

-드디어 사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구나.

* * *

“이블린! 정신 차려!"

바스티안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눈을 감은 이블린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손에 쥔 천은 이미 재가 되었고, 분홍색이었던 머리카락은 검게 물들었다. 원래 하얗던 피부는 완전히 핏기를 잃고 백지처럼 변해 버렸다.

반면 그녀의 손과 맞닿은 정령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조금씩 자라난 금색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피어났다. 뒷면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나뭇잎은 전설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아트레유는 정령수의 부활에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정령수가 마치 이블린의 생기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만!”

그는 이블린의 몸을 잡아당겼다. 손대지 말라는 이블린의 경고가 생각났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블린의 손은 나무줄기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아트레유가 정령수의 줄기를 내리쳤다.

“그만해! 이제 충분하잖아!"

"바스티안. 그만둬라!"

소란스러움에 기도를 멈춘 대무녀가 소리쳤다.

“정령수는 위대한 세계수의 자식이자 일족의 수호자다.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이러다가 은인께서 잘못되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대무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트레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정령수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사명이라고요?"

“구원자는 정령수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이다. 부활을 위해서는 회생이 필요한 법.”

아트레유는 한 번도 대무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믿음이 깨어졌다.

“그럼 제 사명이 은인을 축음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너는 훌륭하게 완수했다.”

“아뇨,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트레유가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발밑에서 대지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정령수가 기지개를 켜듯 가지를 뻗었다.

그제야 이블린의 손이 정령수에게서 떨어졌다. 아트레유는 힘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은인?"

축 늘어지는 작은 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트레유는 떨리는 손을 그녀의 코끝에 갖다 댔다.

‘숨을 안 쉬어?'

믿기 힘든 현실에 아트레유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심상찮은 상황을 눈치챈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만져 보고 깜짝 놀랐다.

"손이 차가워.”

“이비.”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들이 선 공간을 비집고 들어 왔다. 고개를 돌린 형제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고, 공작 전하?"

당연히 수도에 있어야 할 공작이 신기루처럼 나타난 상황에 아트레유가 더듬거렸다.

“대지신의 사도가 어떻게 여기에…….”

대무녀의 얼굴엔 낭패감이 서렸다. 백은의 곰이 자신이 상대하겠다는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공작은 그들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트레유의 품에 안긴 이블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아트레유는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이블린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비, 눈 좀 떠 봐.”

이블린을 품에 안은 공작이 속삭였다. 그는 차갑게 식은 이블린의 뺨을 어루만지고 검게 변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무 늦어서 화가 났어?“

창백한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잘못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날 좀 봐 줘, 응?“

현실을 부정하는 말과 달리 그의 몸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이블린의 얼굴을 적셨다. 하지만 생기를 잃은 입술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꾸우······.

공작의 품에서 기어 나온 하얀 뱀이 이블린의 뺨을 건드렸다. 녀석은 몇 번이고 이블린의 얼굴에 입을 갖다 댔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실망해서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꾸?

“괜찮아. 너무 깊게 잠들어서 그래. 깨울 수 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공작이 겉옷을 벗어 평평한 곳에 깔고 이블린을 눕혔다.

그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깨워 줄 테니까 기다려.”

몸 일으킨 공작이 천천히 정령수에게 다가갔다.

그 앞을 대무녀가 가로막았다.

“그만두십시오. 구원자께선 자신의 목숨과 바꿔 정령수를 부활시키려 하셨습니다. 이러시는 건 구원자의 뜻과도 어긋나는······."

다음 순간, 대무녀의 몸이 조약돌처럼 튕겨 나갔다. 너무 빨라서 공작이 공격한 게 아니라 대무녀가 몸을 뒤로 던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역시 저게 범인이었군.“

공작이 정령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를 드러낸 맹수 같은 표정이었다.

-그르릉!

백은의 곰이 정령수를 감싸듯이 앞으로 나섰다. 뒷발로 일어선 곰의 크기는 집채만 했다.

하지만 공작은 오히려 잘됐다는 반응이었다.

“너만 쓰러뜨리면 저 나무를 불태워도 되는 건가?"

-크아악!

곰이 사정없이 앞발을 휘둘렀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공작이 마치 검을 휘두르듯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곰의 앞발이 싹둑 잘려 나갔다.

떨어진 앞발은 눈으로 변해 흩어지고 곧바로 새로운 발이 생겼지만 신을 담은 육체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의 화신은 다르군. 곧바로 죽지 않아.”

공작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갈기갈기 찢을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강한 살기에 오싹함을 느낀 아트레유가 뒤로 물러섰다. 그때 바스티안이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형, 아까 이블린이 말한 것 기억나?"

“뭐라고?"

“오른손을 심장에 올리고······ 그거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지금 이블린의 머리색이 검게 변했잖아.”

아트레유는 멍하게 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스티안이 답답하다는 듯이 화를 냈다.

"뭐라도 해 봐야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아트레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있으면 남은 건 파멸뿐이니까.

“가자!”

아트레유는 이블린에게 달려갔다. 이블린의 위에 엎드려 있던 뱀이 숙숙 회를· 냈지만 무시했다. 물고 싶으면 물라는 심정이었다.

“만약 내 몸이 검게 변하면 오른손을 심장에 올리고 왼손에는 천을 쥐여 줘. 할 수 있겠어?"

아트레유는 그녀의 오른손을 심장 위에 올렸다. 왼손에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쥐여 주었다.

그러자 검은색이 옮겨 가듯 망토가 검게 물들면서 이블린의 머리카락이 분홍색으로 돌아왔다.

흥분한 바스티안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트레유는 검게 물든 망토 위에 새겨지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글자가 사라지는 순간, 이블린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쿨럭 거리며 기침을 토해 낸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아이고, 삭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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