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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17화 (117/240)

117화

* * *

백탑주 히페리온은 마나 고갈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사정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공작은 말없이 마나 포션을 내밀었다.

이걸 마시고 다시 이동 마법을 쓰라는 뜻이었다. 공작에겐 죽어도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만 쉬게 해 주십시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손이나 발을 남겨 두고 이동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반밖에 이동하지 않았는데?"

히페리온은 공작의 단정한 얼굴을 마구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게이트에서 게이트로 이동하고, 이동 마법을 10번이나 썼습니다. 다른 마법사라면 게이트를 가동하는 것만으로도 뻗었을 겁니다.”

"흠.”

못마땅한 소리를 낸 공작이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지도를 꺼냈다. 그의 옆구리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겨우 붙어 있던 상처가 이동 마법 때문에 다시 터진 것 이다.

공작의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피를 봐 가면서까지 길을 서두르는 것이 의문이었다. 조금은 불안하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빨리 가야하니까.”

공작이 옆구리의 상처를 대충 싸매며 답했다. 히페리온은 속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빨리 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무슨 수단을 써서든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갈 것.

이것이 공작의 의뢰였다.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테지만 하필 북쪽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위대한 분께서 북으로 떠나셨다. 히페리온, 북쪽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낼 수 있겠느냐?"

그레이 일족이 섬기는 ‘백은의 곰’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히페리온은 이블린과 관계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일족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블린이 위대한 존재라는 비밀은 혼자서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백은의 곰이 이블린과 만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초조해진 히페리온은 결국 공작의 의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 일족과수인족의 동맹이 깨어져 히페리온 혼자서는 북으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미친 짓을 할 줄이야.’

공작은 히페리온의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이동을 재촉했다. 이러다가 죽는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행원 하나 없이 털 뱀 한 마리만 덜렁 데려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히페리온은 마나 고갈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때, 상처를 수습한 공작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공작이 어깨를 짚는 순간, 히페리온은 전기에 감전 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시야가 하얗게 타올랐다. 그의 눈에 다 담기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공작의 뒤에 서 있었다. 거대한 존재가 속삭였다.

-서둘러라. 어서.

그리고 공작이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내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히페리온은물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텅 비어 있던 마나가 어느새 꽉 차오른 것이 느껴졌다.

"바, 방금 그건 뭡니까?"

“너에게도 보였나?"

너에게도-라나 그럼 공작은 계속 그걸 보고 있는 것인가? 히페리온은 머리가 어쩔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존재감에 짓눌린 팔다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뭐, 뭘 서두르라는 겁니까?"

"글쎄, 북쪽에서 뭔가가 일어나는 거겠지.”

공작이 북쪽 하늘을 힐끗 바라봤다. 담담한 목소리 와달리 깊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히페리온은 그동안 공작을 미쳤다고 욕한 것을 반성 했다. 그가 공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복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 이다.

‘이블린 님이 위험하다.’

히페리온 역시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니까. 북쪽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고, 그게 이블린에게 썩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빨리 이동하죠.”

이동 마법을 쓰려던 히페리온이 멈칫했다. 이대로 이동하면 공작의 상처가 또다시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 상처는 신성력으로 회복 못 합니까?"

“아니, 가능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겁니까?”

"상대를 심하게 다져 버려서. 쌍방의 잘못이었다는 증거를 남겨 둬야 책임이 덜하겠지.“

공작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괜히 걱정해 줘서 손해 봤다는 것을 느낀 히페리온은 이를 악물고 마법을 발동시켰다.

* * *

거리를 벗어나자 요새 같은 성이 보였다.

높은 벽과 층층이 좁은 창문이 ‘나는 실전형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적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단단함이 느껴졌다.

곰은 성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쯤에서 일행을 기다리려고 했던 나는 당황했다.

“어디 가는 거야?"

-그르릉

곰은 정령수에게 간다고 툭 내뱉었다. 알바를 시작 한 김에 다 끝내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인! 은인!"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과묵이가 필사적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급히 곰을 멈춰 세웠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땀을 뻘뻘 홀리는 과묵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반드시 은인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짐이 되지 않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과묵이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 제 딴에는 비장한 표정 같은데, 서글픈 강아지 같은 눈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시무룩한 강아지 눈이 묘하게 브란을 닮아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좋아, 여기 타."

표정이 확 밝아진 과묵이가 얼른 곰의 등에 기어올랐다. 곰이 불평하듯 그르렁거렸지만 과묵이를 떨쳐 내진 않았다.

“형! 같이 가!"

그런데 갈색이까지 허겁지겁 뒤쫓아왔다.

과묵이가 망설이듯 나를 쳐다봐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과묵이가 달려오는 동생에게 손을 내밀어 곰의 등 위로 끌어 올렸다.

-크릉!

우리 셋이 자리 잡자마자 곰이 뛰기 시작했다. 성의 입구가 아니라 높게 쌓아 올린 벽을 향해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곰의 털가죽을 붙잡고 눈을 꼭 감았다.

“이곳은…….”

깜짝 놀란 과묵이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황량한 정원이 보였다.

“아는 곳이야?"

“중정, 그러니까 성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정원입니다.”

분명 성 바깥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안으로 이동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감탄할 새도 없이 곰이 푸르륵 몸을 털었다 나는 벼룩처럼 튕겨 나갔다.

“아야, 아프잖아."

바닥에 나동그라진 우리를 비웃은 곰이 정원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 검게 타 버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벼락을 연속으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새카맣게 타서 몸통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었다.

"저게 정령수라고?"

그냥 죽었는데? 저러고도 살아 있으면 예의가 아닌데?

-그릉!

곰의 재촉에 비척거리며 일어난 나는 정령수에게 다가갔다. 까맣게 탄 기둥에 슬며시 손을 대자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게 뭐야?"

눈에 보이는 정령수는 물론, 땅속의 깊은 부분까지 저주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대왕 고래 크기의 저주를 축은 정령수가 마개처럼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터지면 어디까지 저주가 번질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나더러 어쩌라고?"

도저히 못 한다고 손을 떼려는데, 저주가 조금씩 위로 치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와, 이거 곧 터지겠는데?'

부실 공사한 댐이 무너지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나는 사기 계약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주받은 무기만 뽑아 주면 된다더니, 뽑는 순간 일대가 전부 날아갈 상황이었다.

"은인, 왜 그러십니까?"

과묵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입을 달싹였다.

야, 여기 있는 사람 다 축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른의 도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손을 정령수에게서 떼어 냈다.

지금 당장 도망가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도망가라는 말도 듣지 않을 테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이게 터지면······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겠지.’

어쩔 수 없다.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밖에.

나는 저주를 실체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백탑주의 몸통 크기였던 저주가 지네로 변했을 때 세스 외엔 아무도 감당하지 못했다. 고래 크기의 저주를 실체화시키면 세계를 부수는 투명 드래곤이 나올지도 모른다.

‘결국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내 몸을 필터로 써서 모든 저주를 글자로 바꾼다. 나는 아직도 저릿한 손을 꾹 쥐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 내 몸을 통과시켜서 천으로 옮기는 거니까.

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심을 굳힌 나는 아이 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천이 아주 많이 필요한데, 지금 성에 남는 천이 있을까?”

내 물음에 멈칫한 과묵이가 대답을 망설였다. 하긴, 식량도 부족한 곳에 천이 남아돌 리가 없었다.

뭐 되는 게 없네. 골치가 아파진 내가 이마를 짚는 순간이었다.

“그건 제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여자가 하얀곰 옆에 서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 슬퍼 보이는 눈 뿐이었다.

‘아니,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란 나와 달리 아이들은 반가운 듯이 소리쳤다.

"대무녀님을 뵙습니다.”

“대무녀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대무녀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아트레유, 바스티안. 구원의 샛별을 인도하는 그대들의 사명을 무사히 완수했군요. 훌륭합니다.”

아이들이 놀라 눈을 껌벅이는 사이, 대무녀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품에는 한 팔 너비의 알록달록한 천이 안겨 있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대무녀가 천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것은 위대한 존재를 모시는 무녀들이 대대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섞어 짠 천입니다. 이것을 그대에게 전하는 것이 저희의 사명. 부디 받아 주십시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느낀 것은 세계수가 아주 공을 들여서 사기를 쳤다는 것이었다.

‘내가 속을 수밖에 없었네!'

주변 인물 다 끌어들여서 사기를 치는데 별수가 있나. 내가 멍청해서 속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되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감사합니다. 마침 필요했거든요.”

선선히 천을 받아 드니 대무녀가 놀란 눈을 했다. 내가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여기서 안 죽어요.”

내 목숨은 세스에게 줬으니까 이런 곳에서 낭비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정수기 필터 역할을 해치우고 돌아가겠다. 나는 결심을 다지며 천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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