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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16화 (116/240)

116화

세계수와의 거래를 마치자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다.

마차의 창문 가리개 틈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느새 아침이 됐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길게 하품을 했다.

‘깨꿈인지 진짜인지 몰라도 잠은 푹 잤네.'

간만에 숙면을 취해서인지 몸이 아주, 개운했다.

괜히 일어나기 싫어 뒤척이던 나는 마차 구석에 처 박혀 있는 안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야 안나? 거기서 뭐 해?"

“아가씨를 지키고 있어요.”

안나가 몹시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설마한숨도 안잔 거야?"

“아뇨, 자다가 악몽을 꿨어요.”

안나는 내가 허허벌판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게 순식간에 자라서 꽃을 피우는 꿈을 꿨다고 했다.

아니, 얘가 예지몽을 꿨나? 순간 속이 뜨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내가 나와서 그렇지, 아주 평범한 꿈인 것 같은데?"

“저분만 아니라 모두 같은 꿈을 꿨거든요. 저는 그게 무슨 나무인지도 몰랐는데, 북부 사람들은 전설에 나오는 정령수라고 하더라고요.”

"······."

세계수가 진짜 전체 스팸을 돌린 모양이다.

“새벽부터 북부 사람들이 마차에 절하고 기도하고 난리였어요. 이건 신의 계시고, 아가씨는 자신들의 구원자라면서 광신도 같은 소리를 하면서요.”

”뭐?”

창문 가리개 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진짜 마차에 절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이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안나, 일단 옷 갈아입고 나가 봐야겠어.”

적어도 찬 바닥에 무릎 꿇는 것은 막아야 할 것 같았다. 안나는 입을 삐쭉였지만, 얌전히 씻을 물을 준비하고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사장님 몰래 알바하는 것이니 만큼 동네방네 알릴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수습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마차의 문을 벌칙 열었다.

거의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작은 무지개가 생기고 새들이 날아와 꽃을 떨어뜨렸다. 세계수가 나와 계약했다는 것을 광고하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아오,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좀!"

창피한 건 둘째 치고 너무 올드하다. 손을 마구 휘젓자 새들이 짹짹거리며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이건 옛날 스타일이라고요. 요즘은 이런 거 하면 사이비라는 소리 들어요.”

-짹······.

반항적으로 울던 새들이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지개도 민망한 듯 스르륵 사라졌다.

나는 아직도 허공에 날아다니는 꽃잎을 쳐 내며 한 숨을 쉬었다. 요즘 누가 무지개와 동물 친구들의 콜라 보를 보고 감격한단 말인가.

봐라, 저기 멍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반응도 제대로 못 하고 있잖아. 나는 속으로 한탄하며 헛기침했다.

"잠깐 위쪽과 혼선이 있었어요 . 신경 쓰지 마세요.”

"······예에."

사람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애써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마차에 절하고 기도하시는 분들. 저는 그냥 계약직이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예?”

"돈 받은 만큼 일해 주는 일꾼이라고요. 저한테 빌어 봤자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난 딱 부러지게 사실을 밝혔다.

세계수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기대 받는 것은 질색이다. 나는 정말 받은 만큼 일할 거다.

“하, 하지만 저희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나에게 절하던 사람들 중 하나가 반항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계시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아가씨께서 정령수를 다시 심으시는 모습을 저희 모두가 봤습니다.”

“아, 그거 잘못 전달된 거예요.”

“예?"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계시를 할 거면 제대로 해 주지, 내 입으로 설명하려니까 민망하잖아.

“제가 맡은 일은 정령수를 새로 심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나무를 되살리는 거거든요.”

세계수의 말에 따르면 정령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냥 저주받은 무기에 찔리는 바람에 놀라서 기절한 상태였다. 내가 무기를 뽑아 주기만 하면 알아서 깨어 나회복할 수 있을 거란다.

“저는 그냥 무기 뽑는 일만 맡은 일꾼입니다. 제가 선택받은 것도 저주에 강한 체질이라서 그렇고요.”

“그게 구원자 같은데요?"

“아니라니까요. 그냥 일용직 계약 관계라니까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납득한 것 같았다 특히 변경백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거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다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복부 사람들 전체가 같은 꿈을 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변경백의 말에 근처를 얼쩡거리던 새들이 포르르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진짜 북부 전체에 스팸을 뿌린 거야?

“죄송하지만 북부 사람들을 위해 잠깐이라도 구원자 인 척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구원자인 척요?"

"북부는 아직 힘든 상황이니까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구원자가 나타난다면 좀 더 버틸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처량한 표정의 변경백을 보자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창피함으로 사람들이 버틸 힘을 얻는다면 잠깐 정도는 어울려 줄 수 있었다.

“까짓것 그러죠, 뭐.”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변경백은 감격한 듯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구원자 역할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 * *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거리를 가독 채운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 멈춰 섰다.

우리가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바짝 마른 사람 들이 눈만 반짝이며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환호성은 없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를 힘도 없다 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속삭임 같은 웅성임이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로하······.”

”로하께서 저기 계신가?"

"구원자시여······!"

그제야 나는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람들에게 구원자를 주고 싶었던 변경백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 사람들에겐 정말 희망이 필요한 것 같았으니까.

-크르릉!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하얀 곰이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새파란 눈동자가 세스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차 문을 열고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있잖아, 이번 한 번만 날 태워 줄래?”

-그릉!

곰이 허락한다는 것처럼 내 손에 자신의 코끝을 갖다 댔다. 나는 주저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안나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부업 좀 하고 올게 금방 올 거야."

“아가씨!"

나는 잔소리하려는 안나에게서 도망쳐서 곰의 등에 기어올랐다. 내가 타자마자 곰은 저벅저벅 무리의 제일 앞으로 나아갔다.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뒤에서 과묵이가 외치는 것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분위기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누, 눈 요정!"

“눈 요정이다!”

벌써부터 곰을 발견한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곰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피해 다급하게 물러서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느 정도 나아가던 곰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사람들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혹시 내가 구원자 일까 기대하는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잘 느껴졌다.

세계수님, 보고 계십니까. 이제부터 제가 최신 유행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시험 삼아 크게 소리치자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수가 힘을 쓴 모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영 센스 없는 신은 아니란 말이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세계수와 정령수를 믿지 않고 끝까지 의심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 손을 번쩍 쳐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계수께서는 그런 제게 구원을 내리셨습니다. 여러분, 세계수께서 제게 직접 모습을 보이시고 여러분에게 가라 명하셨습니다!"

나는 양손을 힘차게 뻗으며 위엄 있게 소리쳤다.

“가라, 어서 가서 구원을 보이라!"

"······아아!"

사람들의 탄식 같은 신음이 사방에서 울러 펴졌다.

반응 좋고. 나는 좀 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새사람이 되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여러분께 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정령수는 부활할 것입니다!”

”······와아아!"

한 박자 늦게 환호성이 터졌다. 다들 기뻐하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여러분, 믿습니까? 정령수가 부활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나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손짓을 했다.

“세계수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쳐 주십시오. 믿습니까!"

“믿습니다. 아악!"

“믿습니까!"

“믿습니다아아악!"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들불처럼 번져 갔다. 나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길을 열어 주십시오. 저는 정령수와 함께 여러분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 양쪽으로 갈라섰다. 아까의 힘없는 표정이 아니었다. 다들 생기 가득한 얼굴로 울거나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곰의 등을 두드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세계수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것처럼 내 위에 거대한 무지개를 띄웠다. 아니, 이거 하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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