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15화 (115/240)

115화

* * *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것은 먹으면 안 된다.

이건 다섯 살짜리도 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모르는 곰이 준 열매를 덥석 집어 먹은 나는 지금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허공에 이상한 빛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곰의 속삭임이 들렸다. 당연히 내 눈에만 보이고 내 귀에만 들리는 것들이었다.

‘이것만 봐도 미친 사람인데…….'

잠만 자면 죽은 나무가 꿈에 나타나 자기를 살려 달라고 랩을 해 댔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수면 부족에 걸 릴 정도였다. 전생이었다면 당장 정신 병원이나 무당을 찾아갔을 것 같았다.

반면 나와 함께 열매를 먹은 형제는 아주 멀쩡했다. 오히려 산삼이라도 먹은 것처럼 펄펄 날아다녔다.

결국, 나 혼자만 이상해졌다는 씁쓸한 결론을 내려야 했다.

‘내 정신이 좀 튼튼하지 않긴 하지.'

십여 년 동안이나 지하실을 굴러다녔으니, 튼튼하면 더 이상한 거다.

사실 나는 내가 언제 지하실에서 벗어났는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동생인 브란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 기억 속의 나는 브란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브란은 내 은인이었고 나는 항상 녀석을 좋아했다.

나는 내가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애써 떠올리려고 하진 않았다.

뇌가 지워 버릴 정도로 암울한 기억을 되살려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령수의 열매가 그 부분을 건드려서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진짜 미치면 대역도 못 하겠지?’

나는 정신을 다잡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 안 들리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임무는 북부에 식량이 잘 전달됐는지 살펴보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기를 봐 달라고 칭얼거리는 곰이나 나무 유령과 대화하는 게 아니었다.

‘후다닥 보고 빨리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목적지를 코앞에 둔 마지막 밤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너만 아니었어도…….'

나는 퀭한 눈으로 모닥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멧돼지 구이를 바라봤다.

진짜 잘되고 있었는데 저 멧돼지 때문에 다 망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곰과 말다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켜 버린 것이다.

물론 멧돼지는 목숨으로 사죄했으나 황천으로 간 내 이미지는 돌아오질 않았다.

’으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 신경 쓰여.’

말다툼만 아니었어도 ‘짠-곰과 종족을 초월한 친구가 되었습니다-’라고 뭉갤 수 있었을 텐데.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엄마, 재 곰이랑 이야기 해.' ’쉿, 그런 거 보는 게 아니야.'라고 수군거리는 것 만 같았다.

"아가씨, 고기가 다 익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변경백이 잘 익은 멧돼지 고기를 내게 바쳤다 하도 공손해서 제삿밥을 올리는 줄 알았다.

“어, 감사합니다.”

약간의 찜찜함을 뒤로한 채 접시를 받으려고 할 때 였다.

“흥, 우리 아가씨는 이런 거 안 드세요. 숙성된 것도 아니고 이런 갓 잡은 고기를 드리다니!"

후다닥 뛰쳐나온 안나가 고기 접시를 밀어냈다.

아니, 얘가 왜 내 이미지를 깎아 먹으려고 하지? 이왕 황천 건넌 거 아예 북망산으로 보내 버리겠다는 건가.

당황한 나는 얼른 고기를 받으며 안나의 등을 찰싹 때렸다.

“제 시녀가 제 취향을 잘 모르네요. 감사합니다. 저 이런 거 엄청 좋아해요.”

입을 삐쭉 내민 안나가 변경백을 노려봤다. 그러자 희미한 미소를 지은 변경백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방에서 찔러 오는 시선이 더욱 따가워지는 것을 느낀 나는 얼른 후퇴하기로 했다.

“전 잠깐 마차에 다녀올게요. 안나, 따라와.”

서둘러 마차로 도망친 나는 안나에게 멧돼지 고기를 먹였다. 배가 고파서 짜증을 냈을 수도 있으니까.

안나는 뭐가 그렇게 분한지 복실이처럼 쉭쉭거리면 서 내가 주는 고기를 씹었다.

하도 맛있게 먹어서 나도 몇 점 집어먹었는데, 의외로 누린내가 안 나고 기름에서 고소한 견과류 향이 났다. 변경백이 정말 맛있는 부분을 골라 준 듯했다.

나는 접시가 거의 비었을 때쯤 슬며시 물었다.

"안나, 아깐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야?"

“북쪽 사람들이 자꾸 뻔뻔하게 나오잖아요. 감히 아가씨를 넘보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응?"

“전하께서 걱정하실 때는 홀려들었는데, 그게 사실이 되니 어이가 없네요. 감히 누굴 뺏어 가려는 거야!"

안나는 북부 사람들이 뻔뻔한 도둑놈이라고 난리를 쳤다. 실제로는 그냥 미친놈을 보는 시선이었다.

-그르릉

그때 마차 밖에서 곰의 울음소리가 났다. 내가 도망치자 여기까지 따라온 것 같았다. 그러자 안나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생각해 보니 저 곰이 문제네요 저게 나타난 뒤부터 북부 인간들이 아가씨가 자기들 것인 양 눈을 번들거리잖아요. 당장 쫓아내야겠어요.”

"안나, 그러다가 네가 이번 생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멧돼지도 펀치 한 방에 날아가는데, 안나 같은 연약 한 여자애는 1 초 컷이었다.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거대한 곰을 훔쳐본 안나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대로는 제가 전하를 뵐 낯이 없어요.”

“그냥 내 발바닥에 공작님 이름을 쓸까?"

“헉!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자꾸 북부 사람들이 날 탐낸다고 주장하는 안나가 귀여워서 한 말이었는데, 진담으로 들은 것 같았다.

무엇으로 이름을 써야 할지 고민하던 안나는 이내 세스가 직접 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접 써야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테죠.”

아냐, 그 사람은 이미 이름표도 달고 도장도 찍고 다 해 봤어. 차마 세스가 이쪽으로 더 빠삭하다고 말하지 못한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날 밤 내 꿈엔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인 왕이 등장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희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초록왕이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봤다.

-넌 정말 고집이 세구나.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어? 폐하?"

왕이 나왔으니 로또를 살 꿈이라고 기뻐하던 나는 로또가 없는 현실을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마커스 씨에게 로또를 만들자고 해 볼까?'

그러자 초록왕이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직접 왔는데도 한눈을 팔아?

“앗, 죄송합니다!"

-정말 당돌한 아이구나. 백은의 곰이 도저히 설득을 못 하겠다고 우는 이유를 알겠다.

나는 왜 꿈속에서까지 혼나는지 의아했지만, 말하면 더 혼날 것 같아서 그냥 얌전히 있었다.

-나는 이미 너에게 수차례 계시를 내렸다. 이젠 네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지 헷갈리는구나.

“네?"

-어떻게 하면 내 아이를 살려 줄 건지 묻는 거다.

초록왕이 씁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 아이라니. 매일 밤 자길 살려 달라고 랩을 하던 정령수를 말하는 건가. 그걸 내 아이라고 부른다면 이 사람은…….

최종 보스의 등장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망상이 점점 스토리를 가지고 진행 중인데?'

내 망상의 설정대로라면 이 사람은 세계수였다.

그레이와 수인족의 신. 세상을 지탱하는 위대한 나무.

나는 세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네가 원한다면 네 주변 모든 사람에게 계시를 내려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증명하마.

무슨 스팸 문자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다.

“사실 꿈이 아니라도 별 상관은 없어요.”

백번 양보해서 내가 보는 빛 이 정령들이고, 코카콜라 곰은 정령수의 수호자고, 나만이 정령수를 되살릴 수 있다는 망상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내가 정령수를 살릴 이유는 없었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 뭐가 필요할지 어떻게 알고?

잘못하면 남의 집 나무 살려 준다고 설치다가 내일을 펑크 내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결혼식을.

결혼식장에 서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는 세스를 상상하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장님 하락 없이 알바하면 안 됩니다.”

내 단호한 말에 세계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원래 직장에는 전설이고 나발이고 끼어들 여지가 없는 거라고요.

-너는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설득할 수 없는 골치 아픈 아이구나. 아닌데? 나 부귀영화랑 무병장수에 무지 약한데?

-그것을 줄 테니 내 아이를 살려 달라고 해도 들어 주지 않을 테지.

그건 그렇다. 그런 것과 세스와의 약속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그럼 그 남자에게 이득이 되는 조건이라면 어떠냐.

"네? 세스에게요?"

세계수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 위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꽃이 피어났다.

-정령수가 피워 내는 첫 꽃이다. 강하게 염원하면 두 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하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남자가 원하면 죽은 자와 만나서 대화할 수도 있을 거란 뜻이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꽃을 바라봤다.

-네가 원하는 것은 그 남자의 행복이겠지? 하지만 그는 형을 죽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 직접 형을 만나서 용서를 받으면 될 테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형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들으면 세스의 죄책감도 아주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제가 정령수를 되살리면 바로 꽃을 받을 수 있나요?"

-아니,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이다. 내 아이가 몸을 회복하고 새로운 가지를 떨어뜨리고 그 가지가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울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세계수는 무척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리하자면, 정령수가 회복이 되어서 자식을 낳고 그게 꽃을 피울 때까지 1년이 걸린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럼 손주분 분가시킬 땅은 좀 알아보셨어요? 요즘 땅값 많이 비싼데."

-뭐?

세계수가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얼굴이었다.

아니, 요즘 공짜 땅이 어디 있다고 저런 표정이람.

“전 꽃만 받고 나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손주분께선 많이 불안하실 것 같아서요. 요즘 치안도 나쁘고, 눈감고 있으면 콱 베어 가는 사람도 많은데.”

-······.

“제가 괜찮은 땅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 드릴까요?"

우리 집 호수 앞에 남는 터가 있는데 거기가 참 양지바르고 좋다고 말하자, 세계수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복비는 많이 안 받을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