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 *
아트레유에게 이블린 하인즈는 굉장히 신기한 사람이었다.
예비 공작 부인.
왕의 총애를 받는 시녀.
대영주들과 맞서 싸운 북부의 구원자.
아버지 우르스에게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트레유는 아주 권위적 인 귀부인을 상상했다.
하지만 직접 만난 이블린은 무척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북부를 구원했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다른 귀족처럼 고에게 무시나 경멸의 시선을 던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우르스의 권위를 존중하고, 무례한 감찰관을 따끔하게 혼내기까지 했다.
아트레유가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내 본모습을 보고도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어.'
초콜릿에 취해 가장 중요한 비밀을 들켰을 때, 이블린은 무관심 같은 배려로 그를 감싸 주었다.
“그때 본의 아니게 너희들의 비밀을 봐 버려서 미안해. 이미 알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실제로 이블린은 그 약속을 지켰다. 이후 시일이 지났지만 수인족에 대한 소문은 전혀 나지 않았다.
이블린 외의 목격자가 많았는데도 그랬다. 아마 그녀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으리라.
이블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예들아, 내가 시선을 끌 동안 절대 큰소리 내시 말고 천천히 걸어서 도망쳐.”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신분이면서,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회생하려 했다.
단지 그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아트레유는 그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다들 그에게 변경백의 후계자로서의 자격과 어른스러움만을 기대했으니까.
너는 아직 어리니까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해 준 사람은 이블린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블린의 앞에서 자꾸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도 분명 낯설어서일 것이다.
“하야······."
자괴감 어린 한숨을 내뱉은 아트레유는 덤불에 조롱 조롱 달린 붉은 열매를 뜯어냈다.
금방 천 주머니 하나가 볼록하게 찼다.
장작을 줍는다는 핑계로 여기까지 열매를 따러 온 자신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별거 아니 지만 은인께선 분명 기뻐해 주실 거야.'
아트레유는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이블린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이유를 생각해 봤다.
사실 이유야 얼마든지 있었다.
이블린은 북부의 은인이고, 그의 비밀을 감춰 주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려 했으며, 귀한 정령수의 열매까지 선뜻 내줬다. 하나하나가 무엇을 갖다 바쳐도 보답할 수 없는 은혜였다.
하지만 아트레유는 그게 전부 핑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블린이 정령수의 열매를 먹고 얼굴을 찡그린 순간부터, 그녀에게 좀 더 맛있는 것을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건 한없이 본능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걸 깊게 생각하면 안 돼'
늑대는 어릴 때부터 사냥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 생존과 관련이 없는 일은 잊어버리고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아트레유는 자신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건 그냥 감사과 존경의 마음을 담은 선물로 족했다.
-그르릉.......
장작을 안고 돌아가던 그를 누군가 불렀다.
아트레유는 힐끗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늘 속에서 은백색 털이 반짝였다. 눈 요정이었다.
여행을 떠난 첫날 저녁 그들과 마주친 눈 요정은 계속해서 이블린의 근처를 맴돌았다. 하지만 이블린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것에 애가 탄 아트레유는 무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은인께선 눈 요정이 왜 뒤를 따라오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실은 그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블린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냥 우리가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아뇨, 은인께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음, 그럼 내버려 두자 나한데 원하는 게 있으면 알아서 말하겠지”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응? 당연하잖아?"
이블린의 대범함에 아트레유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나였다면 선택받은 것에 감격해서 무릎을 꿇고 사명을 내려 달라 외쳤을 텐데.'
하지만 그가 그런 것을 원한다고 해서 이블린에게 같은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트레유는 이블린의 뜻대로 눈 요정을 모른 척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애가 타는 것은 눈 요정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처음엔 은근한 암시를 주며 존재감을 홀리다가 이젠 대놓고 대낮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무시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말이 통할 자신에게 찾아온 것을 보면 이 위대한 짐승이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르릉······.
불만이 가득한눈요정의 눈초리에 아트레유는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크릉!
”은인께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직접 와서 요구하라 고하셨습니다."
아트레유는 이렇게 불경한 소리를 내뱉는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다행히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르르르······.
눈 요정 이 왠지 두고 보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트레유는 서둘러 야영지로 돌아갔다. 바스티안과 놀아 주던 이블린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트레유, 어서 와!"
괜히 쑥스러워진 아트레유는 대답 없이 고개만 꾸벅 숙이며 모닥불 옆으로 갔다. 쏟아 내듯 장작을 내려놓고 한참 머뭇거리던 그는 품속의 주머니를 꺼내 이블린에게 내밀었다.
“이거······.”
준비해 온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혀가 돌처럼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어물거리는 그의 손에서 이블린이 주머니를 받아 갔다.
“우와, 맛있겠다! 이거 먹어도 돼?"
주머니를 열어 본 이블린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 게 보였다 정말 소소한 선물인데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형, 이거 가져온다고 늦은 거야?"
바스티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아트레유는 화끈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그냥.’하고 얼버무렸다. 붉어진 얼굴을 모닥불이 비친 것으로 속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거 진짜 맛있다. 먹어 봐.”
그때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입에 열매를 밀어 넣었다. 손사래를 치던 바스티안이 엉겁결에 받아먹고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 참 어른 먼저 드려야 하는데 저희 먼저 먹어서 죄송해요. 아저씨도 좀 드세요.”
이블린이 손수건에 열매를 반쯤 덜어 우르스에게 나눠 주었다. 아트레유는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흠흠,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아들을 힐끗 본 우르스가 열매를 우물우물 씹었다. 아트레유는 왠지 아버지와 동생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트레유, 너도 먹어 봐."
하지만 자신의 입에 열매를 넣어 주는 이블린을 보자 도저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폭쉬며 애꿎은 모닥불만 쑤셔 댔다.
“참, 내가 오늘 배운 거 볼래?"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이블린이 짐 옆에 놓인 석궁을 집어 들었다. 깜짝 놀란 아트레유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쳤다.
"은인! 위험합니다!"
“걱정 마. 오늘은 그냥 장전하는 법만 배웠어.”
이블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석궁을 바닥에 대고 눌러서 화살을 장전시켰다.
아트레유는 이번 일의 원흉일 바스티안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블린이 사냥하는 법을 알고 싶다고 해서…….”
우물쭈물 변명한 바스티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블린이 쉬는 시간마다 바스티안을 졸라 이런저런 잔재주를 배우는 건 알고 있었다.
모닥불 쌓아 올리는 법, 부싯돌로 불붙이는 법, 마셔도 되는 물을 알아보는 법 같은 것들이었다.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 저런 것은 왜 배우나 싶었지만 이블린이 워낙 즐거워해서 내버려 뒀다.
하지만 석궁 같은 무기는 차원이 달랐다. 잘못해서 이블린이 다치면 엄청난 일이 되어 버릴 테니까.
“바스티안이 철없이 굴면 영주님께서 말리셨어야죠!”
아트레유가 회를 내자 우르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몸을 지키는 재주 하나 정도는 익혀야 한다고 말씀 하시는데, 그것을 막아설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대견하다는 듯이 이블린을 바라보는 시선에 뒷골이 땅겨 왔다.
“아트레유, 그렇게 화내지 마. 이제 안 할게, 응?”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이블린의 말투에 갑자기 힘이 쭉 빠진 아트레유가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회를 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위험하니 그건 제게 주세요.”
"응.“
이블린이 얌전히 석궁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트레유가 그것을 받아 드는 순간, 뭐가 잘못됐는지 화실이 폭 하고 발사되어 숲속으로 날아갔다.
-뀌이이익!
그리고 날카로운 비 명 소리가 숲속에서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덤불 속에서 석궁에 맞은 멧돼지가 튀어나왔다.
-뀌익!
엉덩이에 화살을 맞은 녀석은 잔뜩 화가 나서 이블린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피하세요!"
당황한 아트레유가 이블린을 밀치려던 그때였다.
은백색의 바람이 몰아치나 싶더니, 후다닥 달려온 눈요정이 앞발로 멧돼지를 후려쳤다.
-꾸에에엑 !
멧돼지가 빙글빙글 돌며 하늘을 날았다.
사람들은 멍하게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어찌나 놀랐는지 갈기털이 몽땅 일어선 눈 요정이 숨을 몰아쉬며 이블린을 바라봤다.
”······눈 요정?"
"허억! 진짜 눈 요정이다!"
갑자기 나타난 전설적인 존재에 놀란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하지만 눈 요정은 사람들의 칭송을 들을 정신이 없는듯했다.
-그르르롱!
뒷발로 서서 저벅저벅 이블린에게 다가간 눈 요정이 앞발을 들고 무어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블린이 그에게 항의했다.
“아니 , 내가 쏘려고 한 게 아니고 사고였잖아!"
-크릉! 크릉!
“구해 준 건 고마운데…….”
-크르르릉!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두 존재 사이에 오갔다. 눈 요정과 무언가 합의를 본 것 같은 이블린이 한 숨 쉬며 우르스에게 말했다
"저기, 아저씨. 정말 죄송한데, 곰 한 마리도 같이 데려가도 될까요?"
"예? 아, 예 얼마든지 됩니다."
우르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블린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눈 요정이 모닥불 옆에 자리 잡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전설 속 존재를 목격하고 놀라 자빠졌던 사람들은 경외 어린 시선으로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로하.
아주 오래전, 눈 요정을 타고 나타나 복부에 정령수를 심었던 신성한 소녀.
그리고 북부의 식량난을 해결한 이블린의 앞에 눈 요정이 나타나자 다들 그것을 일종의 계시라고 여겼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이블린을 대하는 태도가 극도로 공손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치 대무녀를 대할 때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