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가까이에서 보니 곰은 정말 크고 털도 굉장히 폭신 폭신해보였다.
한번 꾹 눌러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은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안녕 나는 이블린 하인즈라고 해 혹시 나한테 볼일이 있어?”
-그그긍!
혹시 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렇구나. 그게 오늘의 저녁 식사는 바로 너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음,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미적거리며 묻자 곰이 달빛이 비치는 바닥에서 뭔가를 물어 올렸다. 은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뭇가지였다. 곰은 입에 문 가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받으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곰의 입에서 가지를 받아 들자 벌떡 일어난 갈색이가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헉, 저, 정령수……!"
“뭐? 무슨 수?"
애가 갑자기 킥킥거려서 등을 통통 두드려 주는 사이, 곰은 유유히 등을 돌려 떠나 버렸다.
아니, 설마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왔던 건가?
가지를 들고 떨떠름 행하는 나를 과묵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은인께선…… 혹시 로하십니까?"
“그냥 한 번에 다 설명해 주면 안 될까. 내가 지금 눈요정이 뭐야? 정령수가 뭐야? 로하가 뭐야?' 하고 계속 물어봐야 할 것 같은 상황이거든.”
간단히 요점 정리를 부탁하니 잠시 고민하던 과묵이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간단히 말해서 정령수는 세계수의 자식.
눈 요정은 정령수를 수호하는 곰.
로하는 정령수를 이곳 북부로 가져온 소녀라고 한다.
”로하는 눈 요정을 타고 나타나 정령수의 가지를 북부에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북부의 수인족들은 정령수의 가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독특한 문회를 지켜 왔고, 연합 왕국과 대동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정령수가 죽어 버리자 수인족들은 점차 자신을 잃어 갔다.
“그 뒤 저희 조상들은 아스트리아 왕국과 맹약을 맺고 북쪽의 산맥을 수호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럼 이게 죽었다는 정령수에서 나온 거야?"
나는 은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를 들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과묵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지를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선뜻 과묵이의 손에 가지를 넘겼다. 가지를 더듬어 본 과묵이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수는 맞지만 이미 말라서 땅에 심어도 되살아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 열매가 있는데 열매로는 번식을 못 해?"
"예, 힘이 응축된 가지로만 수를 늘릴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 시무룩해진 과묵이가 가지를 돌려주었다. 물끄러미 가지를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그럼 이 열매는 먹을 수 있는 거야?"
“예? 먹을 수는 있지만······.”
"잠깐만 그걸 진짜 먹을 거야?"
갈색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외쳤다. 나는 어리동절 한 얼굴로 되물었다.
“먹을 수 있으면 먹어야지, 왜 못 먹어?"
열매에서는 굉장히 상쾌하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무슨 맛인지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갈색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거 엄청나게 귀한 열매랬어. 그래서 다들 못 먹고 그냥 팔아 버린다고 했는데.”
갈색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열매 세 개를 똑 똑 따서 녀석들의 입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이런 건 원래 발견한 사람이 먹는 거야.”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열매를 씹는 순간 오만상이 다 써졌다. 혀끝이 아릴 정도로 쓰고 덟고 신맛이 났다.
순간 뱉어 버릴까 고민했지만 비싼 거라는 생각에 억지로 씹어 삼켰다. 코끝이 찡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앞을 보자 나처럼 오만상을 다 쓴 채로 눈물을 글썽 거리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왜 왜 웃어?"
그렇게 묻는 갈색이도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과목이도 어깨를 들썩였다.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져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자, 받아"
나는 열매를 하나씩 더 뜯어서 녀석들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나도 열매 하나를 잘 챙겼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줘. 나도 그럴 거거든.”
내가 줬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쓴 열매를 꾸역꾸역 삼킬 세스를 생각하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이제 돌아가자.”
나는 빈 가지를 숲에 내려놓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 * *
성기사 헥터는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는 대신관 후보였던 밸런타인을 모시는 기사였다. 하지만 밸런타인이 어리석게도 바실리스크를 사냥한다고 설치다 마비당해 후보 자격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그 뒤엔 헥터 역시 평기사로 강등 당했고 험한 곳에 끌려 다니며 잡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위대한 기적을 목격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분홍색 머리 여자가 바실리스크의 왕을 굴복시키고 바다를 둘로 가르는 모습을.
하지만 그가 몸담은 선전에선 기적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기적의 장면을 담은 영상 기록구를 깨트려 증거를 없애 버렸다.
‘이제 대지의 신전에는 미래가 없다. 나는 이곳을 떠나 기적의 주인께 봉사하는 종이 되겠다.’
굳게 결심한 헥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며 신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아마 뒤에서 머리를 맞은 첫 같았다.
이단 심문관의 방에서 눈을 뜬 그는 말로만 들어왔던 온갖 고문을 당했다.
하얀 가면을 쓴 상대는 집요하게 그날 헥터가 본 장면에 대해서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안 돼 그분께서 위험해지실 거야.'
처음엔 필사적으로 말하길 거부했지만 나중엔 최면 같은 것에 걸려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예상과 달리 하얀 가면은 그를 죽이는 대신 치료해서 아스트리아로 끌고 왔다.
‘그 미친놈이 성기사단장일 줄이야. 좀 더 빨리 신전을 벗어났어야했는데'
한숨을 삼킨 그는 우울한 기분으로 바닥을 바라봤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하다 앞으로 만나는 여자가 그때 기적을 일으킨 사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제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자신만만한 성기사단장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악마 같은 놈. 사람 고문에만 도가 튼 놈.
도중에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노력했지만, 놈은 조금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서러워하며 끌려 다니던 헥터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프리지어 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헥터는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제발 그분께서 자리에 없으시기를.’
자신의 입으로 기적의 주인을 인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기도하는 그에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군. 레오디나스.”
아니,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을 번쩍 뜬 헥터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님께서도 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하지.”
햇빛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 상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푸른 눈동자.
세스 엘마이어.
고결하고 고귀한, 성기사의 표본이었던 사람. 갑자기 나타난 과거의 우상에 헥터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반면 세스를 본 성기사단장, 레오디나스의 얼굴은 사납게 뒤틀렸다.
“이렇게 미중 나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너를 쫓아내야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이만 순순히 돌아가 주지 않겠어?"
“아니 , 내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어.”
레오디나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큰소리칠 정도로 실력이 늘었는지 한번 볼 까?"
그는 따라오라는 것처럼 먼저 몸을 돌렸다.
주춤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가던 레오디나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니, 이건 전혀 너답지 않아.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하지?"
세스가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이렇게 널 상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넌 이제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레오디나스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봤다.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사검의 기운에선 풀려난 것 같군.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넌 여전히 신 앞에서 회개하지 못했어.”
레오디나스가 사납게 말을 이었다.
“부귀영화를 위해 형제를 죽인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복수를 마치면 신전으로 돌아오기로 했잖아! 하 지만 지금의 넌 그때의 맹세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군.”
“맞아, 난 이제 선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어.”
세스가 웃으며 대꾸했다. 충격을 받은 레오디나스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대지의 신께도 더 이상 그분을 섬기지 못하는 죄를 고했다. 나는 신전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그곳엔 더 이상 내 자리가 없으니까.”
“세스 엘마이어!"
분노에 찬 레오디나스의 고함이 공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세스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쳐다 볼 뿐이었다.
그가 정말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 눈이었다.
“그 여자냐? 그 여자가 널 미치게 한 거구나. 사교도의 성녀가 너를 타락시켰어.”
이를 악문 레오디나스가 메이스를 뽑아 들었다. 광기가 비치는 초록색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지금이라도 회개한다고 말해라 사교도 여자를 버리고 다시 신을 모시는 순결한 기사가 되겠다고 맹세해."
살짝 미소 지온 세스가 오른손을 늘어뜨렸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지만, 주변의 공기가 야생마처럼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레오디나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이들을 위해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는 고통까지 느껴질 정도거든.”
"······."
“그러니 더 이상 고녀를 모욕하지 말고 덤벼 내가 진심으로 화내기 전에.”
이제 세스 주변의 공기까지 사납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레오디나스가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움켜쥐었다.
오신기 중 하나인 자비의 방패가 주인을 위해 사나운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두 명의 신기 선택자 사이에 끼게 된 헥터는 필사적으로 기도를 올렸다.
잠시 후, 사납게 부풀어 오른 두 힘이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