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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12화 (112/240)

112화

* * *

왕의 길은 변경백의 기억에 따라 북부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정말 놀랍군요. 게이트끼리 연결하지 않고도 이렇게 대단위의 이동이 가능하다니.”

”과연 성검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순식간에 달라진 풍경에 감탄한 감찰관과 수행원들이 이런저런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반면 북부의 전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경외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침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변경백님!"

"은인, 부디 저를 우르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변경백이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북부가 새 거점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야 없지.'

나는 대역이 끝난 후에 정착할 장소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호의적인 북부는 이사할 장소로 제격이었다. 가능하다면 변경백과도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았다.

“그럼 영주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참, 저는 이블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가 감히 어찌…….”

나는 난처해하는 변경백을 설득해서 아저씨라는 호칭을 얻어냈다. 그리고 변경백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걸로 가장 어려운 협상은 끝난 셈이었다.

"여기서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여기라면 마차를 타고 사흘 정도만 가면 됩니다.”

목적지에는 안타깝게도 왕의 길이 닿지 않았다. 왕의 길이 만들어졌을 때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목적지까지는 마차나 말로 이동해야 했다.

“앞으로는 숲과 황무지만 계속됩니다. 이곳이 마지막 마을입니다. 하지만 물자가 풍부하고 말도 지치지 않았으니 오늘은 계속 이동하다가 야영을 하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가는 게 목표인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감찰관이 강하게 반발했다.

"첫날부터 야영이라니요. 벌써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데 서두른다고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그냥 이 마을에서 하루 쉬었다가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를 뻔히 쳐다봤다.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를 보니 진짜 마을에서 쉬고 싶은 게 아니라 기 싸움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이걸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감찰관은 내가 공작 부인이 되기 전에 공을 세우려고 여기 왔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 정도 꼬장을 부려도 내가 어르고 달래 줄 거라고 주판을 튕기는 듯 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북부 사람들과 만나서 호감을 쌓는 것이었다. 감찰관을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그동안 쌓은 호감까지 몽땅 깎아 먹을 것 같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리처드 해리슨입니다. 해리슨가의 차남이죠.“

감찰관이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얌생이 같은 놈이 왜 이름까지 똑같고 난리지.

"해리슨 씨, 혹시 전에 북부에 가 보셨나요?"

“아뇨,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감찰관의 ’이런 곳’이라는 말에는 약간의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 길이나 야영하기 좋은 장소는 아세요?"

“저는 길잡이가 아니라 감찰관입니다.”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이 내뱉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북부에 가 본 적도 없고, 길도 모르고, 야영지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뭘 믿고 그러시는 건데요?"

"······예?"

"민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있으세요.”

나는 가차 없이 그의 꼬장을 잘라 냈다. 여행 와서 이런 사람한테 일일이 맞춰 주면 전체가 다 피곤해지는 법이다.

“미, 민폐라니! 지금 저한테 하신 말씀이십니까?"

"네, 정 쉬고 싶으면 혼자 마을에서 쉬다 오세요. 전 먼저 갈 테니까.”

나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마차에 올랐다.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얼굴의 우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일행을 재촉했다.

감찰관의 눈치를 보던 수행원들이 허둥지둥 말을 타고 쫓아왔다. 북부 전사들의 보호 없이 낯선 곳에 버려 지긴 무서웠던 것이다.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감찰관이 제일 뒤에서 따라오는 게 보였다.

나와 함께 마차에 탄 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가씨, 북부 사람들 때문에 해리슨 가문과 척을 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나한테는 북부 사람들이 훨씬 중요하거든. 그리고 내 경험상 저런 사람은 맞춰 주면 끝이 없어.”

이번 일로 북부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면 그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쉴 새 없이 달리던 마차는 날이 거의 저물어서야 멈춰 섰다. 야영지에 먼저 도착한 북부 사람들은 빠르게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뭔가 도와줄 것이 있을까 싶어서 마차에서 내렸다. 안나도 데려갈까 했지만 너무 깊게 잠들어 있어서 깨우기가 미안했다.

"공작 부인! 뭐 해!"

그런데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갈색이가 촐싹거리며 달려왔다. 나는 이 덩치만 큰 어린애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직 공작 부인 아니니까 이블린이라고 불러.”

"공작 부인이 더 멋있는데?"

“그럼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든가.”

“그건 싫어.”

삐쭉 입술을 내민 녀석이 갑자기 ‘참, 이리 와 봐!’하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내 호위 기사인 네빌 경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지만 괜찮다는 손짓에 그가 멈춰 섰다.

갈색이는 나를 변경백과 형이 있는 모닥불로 데려갔다. 나름대로 상석이었다.

“아가씨, 식사 준비가 끝나는 대로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변경백이 송구한 듯이 말했다. 덩치 커다란 곰같은 아저씨가 자꾸 굽실거리니 이쪽이 더 미안해졌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너무 빨리 왔네요.”

"바스티안의 짓이겠지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슬며시 일어난 과묵이가 숲을 향해 걸어갔다. 왠지 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변경백에게 양해를 구하고 녀석의 뒤를 쫓았다. 갈색이가 신이 나서 나를 따라오며 외쳤다.

“아트레유! 같이 가!"

동생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과묵이가 나를 보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놀란 사슴처럼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트레유? 어디 가는 거야?"

"잠깐! 기다려! "

어두운 곳에서 뛰어다니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당황한 우리는 과묵이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우리가 따라오는 것을 느낀 과묵이가 당황한 듯이 돌아보며 소리쳤다.

“따라오지 마!"

"네가 도망치지 않으면 나도 안 따라가!"

나도 이를 악물고 외쳤다. 계속 도망가도 답이 없다는 것을 느낀 과묵이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멈춰 섰다.

“왜,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휴, 할 말이 있어서?"

나는 숨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과묵이는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것이 안쓰러워진 나는 서둘러 용건을 털어놓았다.

“그때 본의 아니게 너희들의 비밀을 봐 버려서 미안해. 이미 알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

“그러니까 나한데 안 좋은 감정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하고 풀었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로 피해 다니면서 지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과묵이가 계속 나를 피해 다니면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 풀고 갔으면 싶었다.

“왜 그러는지 말해 줄 수 없어?"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로 머뭇거리던 과묵이가 입을 달싹였다.

“······러워서.”

"응?“

“그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게 처음이라서 부끄러운데, 은인을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나서······.”

반쯤 울먹이며 부끄러워서 그랬다고 고백하는 과묵이를 보자 이번엔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크르릉

그리고 대답은 다른 애가 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핵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커다란 곰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Q. 숲에서 곰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네, 죽으시면 됩니다.

Q. 곰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면요?

A. 그건 간식이고 님이 주식입니다.

전생의 쓸데없는 지식들이 머릿속을 주르륵 지나갔다. 곰은 나무도 잘 타고, 수영도 잘하고, 엄청나게 빨라서 인간은 절대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생의 끝은 곰 밥인가?'

속으로 탄식한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곰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애들아, 내가 시선을 끌 동안 절대 큰 소리 내지 말고 천천히 걸어서 도망쳐.”

“뭐, 뭐?"

“쉿, 조용히 말해 나는 발이 느려서 도망가도 어차피 잡힐 거야 그러니까 형 손잡고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도망가.”

내가 조곤조곤 이야기하자 아이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어른이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제발 시간 끌지 말고 발리 도망가라.

“가, 같이 도망가."

갈색이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어린애답고 귀여웠지만, 한시가 급한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은인을 두고 저희만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과묵아, 일단 동생은 살려야지?

"차라리 은인께서 제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십시오.”

“다 같이 도망가자니까.”

갈색이는 문어처럼 나를 붙들고 늘어지고, 과묵이는 나랑 동생을 뒤로 떠밀며 자기가 앞으로 나서려고 난리였다. 양쪽에서 당겨지고 밀쳐지니 정신이 없었다.

-그르릉!

그때 곰이 마치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숲속에 환한 달빛이 쏟아졌다. 그림자 같던 곰의 모습이 순간 똑똑히 보였다.

달빛이 곰의 은백색 털을 찬란하게 빛나게 했다. 새 파란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와 가슴에 박힌 삼각형의 푸른 보석이 인상적이었다.

‘코카콜라 좋아하는 북극곰?'

나와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란 두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눈 요정?"

“전설이 아니라 진짜 있었어?"

뭐지, 여긴 곰을 눈 요정이라고 부르나?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두 녀석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갈색이가 나를 재촉했다.

“정령수의 수호자인 눈 요정이야 빨리 예를 표해." 그

렇게 꿇어앉아 있으면 차려진 밥상 같잖아. 당장 일어나!

그런데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곰을 보자, 더는 애들의 말을 완전히 헛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어졌다.

눈이 마주친 곰이 정말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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