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 *
곰 인형 1 호는 태양왕 곰이었다.
백금색 털과 사파이어 눈동자를 가진 곰은 작은 왕관을 쓰고 왕 홀을 든 채로 대관식 복장을 입고 있었다.
의상부 시녀들은 드레스에 박힌 보석과 정교한 자수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 왕관과 망토에는 화려한 태양무늬를 새겼다.
심지어 곰 인형이 앉을 옥좌까지 만들었다. 그야말로 미친 퀄리티였다.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만들었죠?"
인형을 확인한 나는 잠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디자인한 것은 그냥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곰이었는데 이건 차원이 달랐다.
“흐흥, 그 표정을 보고 싶어서 열심히 했어요.”
카밀라가 고양이 같은 얼굴로 코를 찡긋거렸다.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곰을 보다가 혹시나 싶은 생각에 물었다.
"혹시 7호까지 전부 다 이런 수준이에요?"
"1호에 제일 공을 들였지만, 거의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형 소품을 담당한 핀이 부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 사람들. 자기들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도 모르네.
“여러분, 이건 특허를 내야 할 것 같은데요?"
“네? 특허요? 그냥 인형인데요?"
"특허가 아니면 독점 계약이라도 해요. 이건 이대로 세상에 나가면 안 되는 물건이에요.”
이게 발표되면 오래 지나지 않아 무수한 짝퉁이 만들어 질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만들고 아무런 보상도 못 받을 병아리들을 보니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랑 뭘 계약하는 거죠?"
“인형을 판매하고 유통할 권리를 상단이나 가게와 계약해야죠.”
"판매요? 이 걸 돈을 받고 팔겠다고요?"
순수 귀족인 병아리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사렸다. 아니, 물건을 돈 받고 팔아야지 그럼 공짜로 주나.
“그런 일은 상인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그걸 저희가 어떻게 해요?"
“직접 만들어서 파는 게 아니라 권리를 주는 거라니 까요. 땅을 빌려주는 정도는 다른 귀족들도 하잖아요?“
내 말에 겨우 진정한 병아리들이 잭잭거렸다.
“그렇지만 인형 같은 게 이득이 될까요?"
“저희는 아는 상단도 없는데요?"
”······그냥 저랑 계약해요. 판매도 유통도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카드를 뽑아 들었다. 글로리아나 백화점의 총책임자인 마커스 씨에게 연락해 봐야할 것 같았다.
"그럼 하인즈 양이 권리도 다 가져가면 되지 않나요? 어차피 하인즈 양의 아이디어였잖아요.”
“아나 누굴 악덕업자로 만들려고! 조용히 하고 그냥 계약해요!“
결국 나는 즉석에서 계약서를 만들었다.
지금은 임시지만 총관 할아버지에게 검토를 받은 후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만들 생각이었다.
‘이래도 짝퉁이 만들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정품은 백화점에서 파는 걸로 밀고 나가야지.’
계약서 한 장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태양왕 곰에게 주인을 찾아 주러 나섰다.
우리는 왕의 앞에서 짧은 공연을 했다.
주크가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곰 인형을 조심스럽게 옥좌에 앉히며 대관식을 연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이용해 곰 인형의 머리 위에 빛을 내리쬐게 하면서 공연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입을 털었다.
“앞으로 왕국에 큰 영향을 끼친 명사를 선발하여 그와 닮은 곰 인형을 선물할 계획입니다. 아스트리아의 태양이신 국왕 폐하께 가장 먼저 인형을 바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럼 그것이 짐이냐?"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옥좌에 앉은 곰 인형을 받았다. 생소한 모양의 인형이라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거참 정교하구냐 진짜 그때의 옷을 보는 듯해."
인형의 드레스를 쓸어 본 왕은 옥죄를 보고 잠시 말 이 없었다. 마치 과거를 더듬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짐이 처음 이 자리에 앉았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마음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엄숙한 왕의 목소리에 ‘저게 뭐 하는 짓이지?'라는 표정이던 대신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짐은 왕국의 명사 1호로서의 미음을 잊지 않고 국가를 수호할 것이다. 참으로 좋은 선물이었다.”
“영광이옵니다! 폐하!"
의상부 시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나도 눈치껏 따라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 수여식이 끝났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서로 손을 맞부딪치며 기쁨을 나눴다.
“앞으로도 이 분위기로 계속 나갑시다!"
“하인즈 양이 북부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2호 수여식을 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떠들던 우리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형을 바친 다음 날 내가 ‘북부 감찰관 대표'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임명되는 바람에, 곰 인형은 곧 화제의 폭풍에 휩쓸린다는 것을.
* * *
-삐이이이익! 삑! 삐이익!
늦은 밤, 복실이가 마트에 드러누운 아이처럼 온몸을 꿈틀거리며 떼를 썼다.
나는 북부로 가져갈 것들을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못 데려가. 거기는 추워서 복실이 같은 아기는 못가요.”
온실에서 매일 몸을 지지는 까미나 열대의 섬에서 살던 흑룡만 봐도 바실리스크는 추운 곳을 싫어하는 생물이었다.
게다가 식량이 부족한 곳인 터라 매번 복실이에게 먹일 질 좋은 고기를 구해 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복실이를 데려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뿍뿍!
삐진 복실이가 벽 쪽으로 홱 머리를 돌렸다. 나를 도와 짐을 정리하던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전 복실이 마음이 이해돼요. 갑자기 북부로 가신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요.”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움직이는걸,”
왕도 내 안전을 약속했고,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북부의 변경백도 내가 위험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 이다.
그러자 안나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가씨는 너무 용감하신 것 같아요. 전 북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그렇게 무서운데 왜 따라오겠다고 한 거야?"
“전 아가씨의 전속 시녀잖아요. 당연히 따라가야죠.”
담담한 대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안나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전체 관리는 불가능해도 얼굴 관리는 여행 중에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믿고 맡겨 주세요.”
“······.”
아니, 얼굴 관리를 출장 가서도 받아야 하다니.
-뿌?
그때,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복실이가 머리를 들었다. 뭔가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창문쪽으로 열심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복실아?"
의아하게 부르는 순간, 용수철처럼 퐁 뛰어오른 복실이가 열린 창문 너머로 휘리릭 사라져 버렸다.
”으아악! 복실아!"
깜짝 놀란 나는 짐을 팽개치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밖은 너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복실아! 대답해! 복실아!"
복실이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방은 2층이라 복실이에겐 꽤 높았다. 떨어져서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이비, 복실이는 괜찮아. 내가 잡았어.”
나는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세, 세스? 진짜 세스 맞아요?"
”······응, 놀라게 해서 미안.“
그 말과 함께 밑에서 작은 반딧불 같은 것이 날아올랐다. 그러자 복실이를 안고 창문 아래에 서 있는 세스가 보였다.
“아가씨, 전 준비할 게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멍하게 세스를 쳐다보던 나는 안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창틀에 발을 올렸다. 세스가 그런 나를 말렸다.
“이비, 내가 올라갈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네?”
세스가 올라오는 것보다는 내가 뛰어내리는 쪽이 더 쉽지 않나?
하지만 뭐라 하기도 전에 두어 걸음 물러선 세스가 새처럼 뛰어올랐다. 벽을 걷어차 몸을 위로 띄운 그는 아주 쉽게 창틀을 잡고 올라왔다. 깜짝 놀란 나는 뒤로 물러섰다.
"들어가도 될까, 아가씨?“
창에 걸터앉은 세스가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창에서 내려온 그가 복실이를 내밀었다.
"보다시피 무사해. 내가 밖에 있다는 걸 눈치채고 뛰어내린 모양이야.“
-뿌!
나를 본 복실이가 팩 고개를 돌렸다. 한숨을 쉰 나는 복실이를 혼냈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뿍!
반항적으로 소리친 복실이가 세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침대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저 녀석이? 요즘 뱀춘기인가?
“당신이 이해해 줘. 복실이는 당신과 떨어지는 것을 상상조차 못 해 봤을 테니까.”
“세스, 지금 복실이 편드는 거예요?"
서운한 얼굴로 쳐다보자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내가 그런 심정이거든. 차라리 복실이처럼 떼를 쓰고 싶군.”
아니. 그건 좀······ 귀엽겠는데?
떼쓰는 세스라니, 한번 보고 싶다. 기대 어린 내 시선에 움찔한 세스가 주변을 둘러보는 척했다.
“여기가 당신 방이군.”
"평소엔 정리가 잘되어 있어요. 진짜예요.”
하필 여행 준비 때문에 이런저런 물건들이 널려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세스가 내 변명에 작게 웃었다.
“정리는 지금도 잘되어 있는걸. 갑자기 찾아와서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군."
“아뇨. 전 세스가 와 줘서 기뻐요. 정말로요.”
앞으로 한 달 가까이 그를 못 본다는 생각에 아쉬웠는데, 갑자기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세스가 별재까지 찾아오는 건 몹시 드물었다. 만약 나타난다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 생긴 거였다.
"음, 그러니까…….”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그를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세스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야. 당신 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하다가 여기까지와 버리고 말았어.”
“네?"
“당신이 보고 싶었어.”
힘겹게 고백한 세스가 시선을 피했다. 빨개진 그의 귀를 보자 나도 괜히 뺨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저도 세스가 보고 싶었는데.”
속마음을 툭 내뱉자 세스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진짜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요.”
그러자 성큼 다가온 세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도 있는 힘껏 그를 마주 안았다. 왠지 기쁜데도 조금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