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왕의 호출을 받은 것은 한참 시녀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새벽부터 진흙 목욕에 우유 목욕에 허브 찜질까지 당한 나는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목욕 좋아-마사지 좋아-’ 하고 얌전히 받았지만, 반나절이 넘어가니 힘들고 지겨웠다.
“아가씨, 자꾸 움직이지 마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불편한 건 아닌데, 이거 언제 끝나?"
“이제 시작인걸요. 피곤하면 주무셔도 괜찮아요.”
여기서 뭘 더 한단 말이지?!
몇 번이나 씻기고 주물러진 내 피부는 이제 부들부들하다 못해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속 뭔가를 발라 댔다. 이번엔 발효된 요구르트였다.
"안나, 사실 날 요리 중인 거 아니지?"
“네?"
“이대로 오븐에 들어가면 맛있는 구이가 될 것 같아."
“그게 웬 끔찍한 말씀이세요.”
진흙에 담갔다가 우유에 담갔다가 향신료를 바르는 과정이 너무 요리 준비와 똑같아서 찜찜했다.
“조금만 참아보세요 복실이는 이렇게 의젓하게 받고 있잖아요.”
-꾸우-!
나와 똑같은 관리를 받고 있는 복실이는 행복에 겨운 울음소리를 냈다. 결국 한숨을 쉰 나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림막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급히 입궁하라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지금요?"
“예, ‘길‘을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신답니다."
나는 얼른 관리용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시녀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꼭 가셔야 하나요?"
"왕명이잖아 급히 입궁하라고 하신 걸 보면 중요한 일일 거야.”
내가 서두르자 시녀들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요구르트를 씻겨 냈다.
“폐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세요. 새신부가 되실 분에게 결혼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미적거리는 그들을 보다 못한 시녀장이 말했다.
“전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서두르렴.”
입을 꾹 다문 시녀들이 바쁘게 준비를 시작했다. 그것을 본 복실이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짹짹 울었다.
"복실이 넌 여기서 계속 관리 받아도 돼.”
-뿍!
그렇게 관리를 좋아하던 녀석이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복실이도 함께 준비시켰다.
복실이는 추종자들이 바친 선물 중에서 자신을 치장 할 것들을 골라냈다.
오늘 간택받은 것은 마리아가 만든 노란색 모자와 세스가 준 연두색 타이였다. 당연히 복실이에게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아이고, 내 새끼. 귀엽기도 하지.”
-꾸우꾸!
나는 복실이를 마구 칭찬하며 쓰다듬었다.
관리의 효과인지 털이 부들부들하고 광택이 장난이 아니었다. 시녀들에게 보너스를 줘야 할 것 같았다.
‘내 관리는 좀 줄여 줬으면 좋겠지만…….'
앞으로 한 달 내내 이렇게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돌아와서 시녀들을 설득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우리는 ‘왕의 갈을 사용해서 곧바로 궁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면 대화를 나눌 시 간이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비? 왜 그래?"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눈웃음을 쳤다. 나는 그에게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세스랑 이야기할 시간이 없는 게 아쉬워서요.”
“그럼 돌아가기 전에 잠깐 산책할까?”
”와, 진짜요?”
기뻐하는 나를 보고 세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온화한 미소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어제 가출 돼지들이 돌아간 뒤로 세스는 계속 이렇게 온화한 상태였다.
‘회를 내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갈색이가 셋이서 결혼하자는 발언을 해도 아무것도 안 물어보는 게 좀 이상했다. 마치 에어컨이 고장 났는데 원인을 모르는 상황 같았다.
-꾸우?
복실이가 왜 가만히 서 있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멍하게 세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마음을 다잡고 어깨를 쭉 폈다.
우선은 알현을 무사히 끝내는 것이 먼저였다.
“이블린 하인즈가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왔느냐?"
왕은 우리를 알현실이 아닌 선룸으로 불러들였다.
작은 온실처럼 꾸며진 선룸은 기분 전환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온화한 빛과 사방에서 풍기는 허브의 향기가 우울함까지 날려 주는 듯했다.
하지만 왕에겐 별 효과가 없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네 녀석은 부르지 않았다만.”
뒤따라온 세스를 본 왕이 쓴 소리를 했다. 하지만 세스는 아무 말 없이 예를 표했다.
”뭐, 됐다 일단 앉아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권한 왕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신성 왕국에서 꽤 골치 아픈 녀석을 보냈다."
"네?"
“성기사단장인 레오디나스가 비밀리에 입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지금 정체를 감추고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스가 움찔하는 것을 느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신성 왕국은 대지의 주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세스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성기사단장은 성녀와 대신관 다음이니까 왕국 서열 3위였지?'
세스가 차기 성기사단장이었으니, 둘이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레오디나스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놈의 목적은 뻔하다. 공작 부인이 될 너와 천공신의 신녀를 염탐하려는 거겠지.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왕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말하니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위험한 사람인가요?"
“성기사단장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단 심문관으로 일했던 자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느냐?"
오, 왠지 성격이 장난이 아닐 것 같은데?
“사냥개처럼 집요한데다, 산의 말씀이 세상 모든 것 보다 우선인 놈이지 아예 만나지 않는 쪽이 좋다.”
한 손에 철퇴를 들고 ‘도를 아십니까?’를 묻고 다니는 사람이 떠올랐다 확실히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상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블린 잠시 북에 다녀올 생각은 없느냐?"
"······네?"
설마 가택 연금에 이어 귀양인가요?
"북부에 식량이 잘 도착했는지, 어떻게 진행 중인지 관리하고 감독할 사람이 필요하다. 짐이 신뢰하는 네가 가 주었으면 좋겠구나.”
다행히 귀양이 아니라 출장인 것 같았다. 세스의 눈치를 보던 나는 미적미적 말했다.
“저, 폐하. 그런데 제 결혼식이 한 달 뒤인데요?"
"왕의 길을 써서 다녀오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다.”
왕은 북부의 모든 인원과 추가로 보낼 식량까지 왕 의 길로 이동하는 것을 허락했다.
“폐하, 북부는 고대 연합 왕국의 영토가 아니라서 왕 의 길이 끝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중에 마차나 말로 이동해야 할 텐데, 그녀는 몸이 약해서 그런 추운 여행은 못 버틸 겁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세스가 반대를 표했다.
그러자 왕이 피식 웃었다.
“그럼 이블린을 사냥개 앞에 던져두라?"
"······."
“네가 지키려고 할수록 놈은 더 집요하게 달려들 텐데? 왜? 이 번엔 놈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세스가 얼어붙은 것 같은 얼굴로 침묵했다. 왕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명분 없이는 이블린을 숨겨 둘 수 없다. 북부가 싫으면 나바르 왕국이나 로엔 공국의 사절로 보내 주마. 그럼 추워서 못 견딘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폐하, 그곳들과는 지금 관계가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고 하면 대책이 없다. 알잖느냐. 나도 좋아서 이블린을 보내려는 게 아니다!"
왕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폐하! 저 사실 북부에 가고 싶었습니다!"
“······.”
"식량이 잘 전달되는지도 궁금하고, 이제 막 친해진 아이들도 있으니까 문제없이 다녀올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러니 세스에게 화내지 마세요.
시무룩한 내 시선에 한숨을 내쉰 왕이 말했다.
“이블린, 약속하마. 네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너는 그냥 북부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네, 폐하.”
왕은 내가 북부의 지원을 감사하는 역으로 파견될 것이지만, 무늬만 대표일 거라고 약속했다. 한마디로 그냥 놀다가 오라는 것이었다.
“정식 임명은 내일 이뤄질 것이다 그렇게 알고 미리 준비해라.”
돌아가서 짐을 싸면 시녀들이 통곡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한동안 마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세스, 넌 잠시 남아라.”
나가서 세스와 할 말이 많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명령이 떨어졌다. 멈칫한 세스가 왕을 바라봤다.
"머리 굴리는 것 다 보인다. 헛짓하지 말고 다시 앉아라.”
왕의 다그침에도 세스는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먼저 입을 열었다.
“세스, 전 의상부에 가있을게요. 끝나고 다시 봐요.”
“······응.”
세스가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슬픈 눈으로 말했다. 아니, 왕명인데 나한테 그런 눈빛을 보내면 어떡하라고.
계속 보고 있다간 도저히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뒤따라 나온 피오나가 웃으며 경고해 주었다.
“이블린, 의상부에 갈 때 조심하세요."
“네?”
"버려진 사람들의 원한이랄까요. 다들 이블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네? 버려지다니요?"
그게 뭐야. 난 그런 적이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고 피오나가 고개를 저었다.
“다들 이블린을 좋아하는 만큼 서운해 하는 거니까 고냥 받아들이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나게 불안해지는데요?”
“원래 인기인은 괴로운 법이에요.”
피오나는 어서 가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며 내가 의상부에 뭘 했는지 고민해 보았다.
우선 손수건 공장 차리고, 그다음엔 곰 인형 공장 차리고, 그다음엔 아무것도 안 했지.
‘최근에 결근이 조금 잦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직장에 자주 안 나오는 상사만큼 좋은 게 없지 않나?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의상부 대기실에 도착한 나는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러분, 저 왔습니다!"
그리고 북풍한설 같은 차가운 기운이 밀려들었다.
마치 결혼식 첫날 버림받은 새색시 같은 얼굴을 한 마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배신자를 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