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과묵이의 이름은 아트레유.
갈색이의 이름은 바스티안.
올해 열여섯 살, 열세 살이 되는 꼬꼬미들이었다.
‘아니, 갈색이 재가 내 동생과 동갑이라고?'
과묵이는 나보다 훨씬 컸고 갈색이는 나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북부 사람들은 인종 자체가 다른 듯했다.
"은인께서 북부에 큰 은혜를 베푸시고도 감사 인사를 받지 않으셔서 저희가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직 아기 티가 나는 과묵이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과묵이의 말에 따르면 대영주 회의에서 내가 ‘혼자 있고 싶으니 전부 나가 주세요.’를 외쳤을 때, 변경백도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변경백은 북부를 도와준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 해 몇 번이나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까미 수술 때문에 휴가 내고, 주크가 사고 쳐서 가택 연금형 받고, 흑룡이 데리러 죽음의 섬에 갔다 오고, 선녀 데뷔 무대 준비한다고 바빴으니까.’
결국, 내게 인사도 못 하고 떠나게 된 변경백은 크게 상심했다. 그것을 본 과묵이와 갈색이가 아버지 대신 은혜를 갚으러 찾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어, 그럼 변경백께선 두 사람이 여기 왔다는 사실을 모르신다는 거네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사실을 안다 해도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심지어 가출 청소년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당당한 둘을 허허 웃으며 바라봤다.
“그런데 왜 밤에 몰래 숨어 들어온 거예요?"
“낮에 찾아와 문지기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보통 담을 넘나.
"은인을 만나서 사실을 말하면 분명 받아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순찰을 돌던 까미에게 걸려서 냉동 참치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하인으로 쓰셔도 좋고, 노예로 부리셔도 됩니다. 북부 사람들을 살려 주셨으니, 무슨 일을 시키시든 목숨을 바쳐서 해내겠습니다.”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더니, 이 아이들은 은혜를 갚는 데 미쳐 있는 듯했다. 나는 갸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어요. 그럼 같이 식사하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냥 밥이나 먹여서 돌려보내야겠다.
* * *
과묵이와 갈색이는 정말 잘 먹었다.
청소년기의 위장이 블랙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 만, 거의 까미만큼 먹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한 기 분이 들었다. 전직 한국인의 영혼이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휴, 이제 좀 배부르다!"
식탁 위의 모든 접시를 비운 갈색이가 배를 두드렸다. 과묵이 역시 만족했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있었다.
그래, 인간이면 지금쯤 배가 부를 때도 됐다.
나는 식탁을 치우고 디저트를 내오게 했다. 집시에 가득한 초콜릿을 본 갈색이가 코를 킁킁거렸다.
“이 까만 건 뭐야?"
"초콜릿이야 한번 먹어 봐.”
사실 이 초콜릿은 제스터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내 부탁에 기꺼이 신녀 역할을 맡아 준 제스터에게 뭔가 주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초콜릿을 떠올렸다.
"초콜릿? 그거 마시는 거 아냐? 이건 딱딱한데?"
“그걸 어떻게 해서 잘 뭉쳐서 만든 거야.”
이곳에서 초콜릿은 커피처럼 마시는 음료였다.
발효된 카카오 콩을 볶아서 온갖 향신료와 설탕을 넣고 팔팔 끓여 마시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쓰고 카카오 버터 때문에 느끼한 맛이 났다.
이럴 때 초콜릿을 만드는 레시피를 선물하면 제스터가 무척 기뻐할 것 같았다. 그게 쉬우면 누가 이미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로.
대충 카카오 콩 볶은 것을 빵아 버터를 빼내고 설탕과 우유와 섞으면 될 줄 알았던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일단 안 섞였다. 정말 미친 듯이 안 섞였기 때문에 마법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다음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이론만 아는 자의 최후지.’
결국, 레시피 없이 마법의 힘으로 만들어진 초콜릿은 제스터에게 선물하기도 애매해졌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 입에서 막 녹아!"
그래도 갈색이의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다.
동생과 달리 경계 어린 눈으로 초콜릿을 노려보던 과묵이가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이내 그는 눈을 반짝이며 계속 집어 먹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래 . 우리 가출 돼지들 많이 먹어라.
그런데 신나게 초콜릿을 먹던 과묵이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심장을 부여잡더니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것이다.
“아트레유, 왜 그래?”
갈색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형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과묵이는 동생이 잡아 흔드는데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트레유! 형! 정신 차려!"
‘설마 독?'
깜짝 놀란 나는 과묵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자 과묵이가 내 발소리에 움찔 반응했다.
“가까이 오지 마!"
번쩍 고개를 든 그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녀석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황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짐승의 것처럼 안광을 내뿜는 눈이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기괴하게 길어진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날, 쳐다보지 마!"
얼굴을 가린 과묵이가 다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켄트 박사님을 모셔 와 음식을 먹다가 발작을 일으킨 환자가 생겼다고 말씀드리고.”
"네, 아가씨.”
“다른 사람들은 담요와 물수건 갖고 와. 혹시 모르니 얼음도 가져오고. 서둘러!"
미적거리는 시녀들을 내보낸 나는 과묵이의 열을 재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과묵이가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내 손을 쳐 냈다.
“어허, 가만히 있어!"
나는 반항하는 녀석의 팔을 잡았다. 상태가 어떤지 살피려는데 이상하게 길어진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초콜릿에 이런 성분이 있었나?
“우릴 고발할 거야?"
그때, 갈색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보니 녀석의 눈동자도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갈색이가 얼굴을 가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우린 악마가 아니야. 진짜야.”
“고발 안 할 거고, 악마라고도 생각 안 해. 형이 아프니까 얌전히 있어 알겠지?"
”······응.”
갈색이는 기죽은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과묵이의 머리에 내 숄을 덮어 주었다. 눈이 가려지자 과묵이도 조금씩 진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과묵이의 등을 토닥이며 박사를 기다렸다.
두 녀석의 증세는 다름 아닌 카페인 과다 섭취였다.
짧은 시간에 스무 개가 넘는 초콜릿을 집어 먹는 바람에 탈이 난 것이다. 정말 많이도 먹었다.
“지금으로선 딱히 해 줄 것이 없습니다. 안정을 취하게 두고 물과 과일을 많이 먹이십시오.”
"박사님, 그럼 눈과 손톱은 언제 정상으로 돌아오나요?“
"글쎄요, 그건 두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군요.”
박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녀석들에게 과일을 먹이기 시작했다.
가출 돼지들은 과일도 잘 먹었다. 우울해 보이는 과묵이도 바나나 한 송이를 뚝딱 해치웠다. 달콤한 오렌지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갈색이가 신나서 재잘거렸다.
“사실 우리는 세계수를 모시던 수인족의 후손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지만 너한테는 가르쳐 줄게."
"응, 그래. 내 조상님도 알에서 태어났어.”
남의 족보 따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갈색이의 입에 오렌지를 쑤셔 넣었다. 인상을 쓰며 오렌지를 삼킨 갈색이가 항의했다.
"진짜란 말이야 대를 이을수록 피가 옅어져서 귀나 꼬리는 사라졌지만, 이런 흔적은 남아 있다고.”
갈색이는 자신의 뾰족한 손톱을 꺼내 들었다. 나는 저 녀석이 대체 언제 손톱을 깎았을까 생각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것을 눈치챈 갈색이가 눈을 반짝였다.
“넌 진짜 우리를 안 무서워하네. 신기하다."
"왜? 무서워할 이유가 있어?"
손톱 좀 뾰족하다고 무서운 것으로 취급하면, 기괴한 능력을 가진 나는 악마라고 돌을 맞아야 마땅했다.
“인간들은 다 무서워하던데. 그래서 우린 우리끼리 결혼하거든. 우리 아버지는 곰이고, 엄마는 늑대였어. 그래서 형이랑 나는 늑대야.”
"······어?"
늑대는 개과였지? 개한테 초콜릿을 먹여도 되냐?
“아트레유 ! 바스티안!"
그때, 문이 벌칙 열리더니 시커먼 곰 같은 아저씨가 뛰어 들어왔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키와 한쪽 눈에 찬 안대 때문에 꼭 산적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아버지!"
쪼르르 뛰어간 갈색이가 곰 아저씨의 품에 안겼다.
여전히 기운이 없는 과묵이가 비실비실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멀쩡한 두 녀석을 본 곰 아저씨가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전하께서 연락을 해 주셔서 망정이지······.”
“아, 아버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곰 아저씨 뒤에 서 있는 세스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갈색이가 나를 가리켰다.
"재한테 형이랑 내가 늑대인 걸 들켰거든. 그런데 잰 우리가 안 무섭대. 그럼 우리 셋이 결혼하는 거지?"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오던 세스가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갈색이를 반히 쳐다봤다.
반면 곰 아저씨 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가출한 아이 들을 맡아 준 내게 감사하면서도 비밀을 들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반품합니다. 둘 다 필요 없으니 빨리 데려가세요.”
우여곡절 끝에 나는 가출 돼지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갈색이는 끝까지 내 옆에 남겠다고 우겼지만 과묵이가 목덜미를 쥐고 강제로 끌고 갔다.
"두고 봐! 난 꼭 돌아올 거야!"
"응,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나는 질질 끌려가는 갈색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때는 진심으로 다시는 녀석들과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블린, 잠시 복에 다녀올 생각은 없느냐?"
다음 날, 왕에게서 뜬금없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