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 *
가짜라고 깔보던 신녀 앞에서 기절해 버린 귀족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교계에선 선녀의 ‘신'자를 꺼내는 것도 금기였다. 모두 필사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
하지만 이블린이 남긴 후유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뭔가 좀 심심하지 않나요?"
“음악이 좀 단조로운 것 같군요.”
멀쩡하다는 것을 과시하듯 파티를 찾아다니던 귀족들은 유독 지루함을 느꼈다.
“조금은 다르게 할 수도 있지 않나?"
“매일 비슷비슷한 레퍼토리만 보니 이제 지겹군.”
그들은 이제 예전의 자극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다만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음악은 참 이국적이었죠.”
한 귀부인이 불쑥 꺼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당황한 귀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폐하의 시녀인 이블린 하인즈가 음악을 선택했다더군요. 정말 그 여자다운 짓이었다는 뜻이었어요.”
“그걸 그녀가 작곡했단 말이오?"
"작곡이야 왕실 작곡가인 버드 경이 했겠죠. 그 여자는 그냥 손가락이나 까딱였을 거예요.”
귀부인은 자선이 꺼낸 말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귀족들은 색다른 음악이 이블린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예쁜 얼굴 말고도 또 다른 재주가 있었던 건가?'
‘새로운 유행이 되겠는데? 한번 버드 경을 찾아가 볼까?'
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비웃음을 내뱉는 귀족들이었다.
“그럼 그 야만적인 옷차림도 이블린 하인즈가 강요 했겠군요.”
"어쩐지 이교도적인 느낌이라더니, 천공신의 신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죠.”
그들은 이블린을 헐뜯으면서도 다음 파티 의상은 최대한 비슷하게 주문하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이미 사교계에선 이블린을 따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블린이 즐겨 입는 가벼운 드레스는 물론, 독특한 머리 스타일이나 장신구까지 은근슬쩍 모방했다.
최근 귀부인들은 모두 분홍색으로 칠한 마차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누구도 이블린을 따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교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흥, 늦게 왔더니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 중이시네요."
하지만 그런 룰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러셀 백작부인이었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그녀는 부채를 펄럭이며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귀족들은 난처하게 시선을 피했다. 러셀 백작 부인이 최근 대놓고 이블린의 편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들을 훑어본 백작 부인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부채를 탁 접었다.
“다들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을 보면 귀도 어두운 것 같군요. 폐하께서 이블린 하인즈 양을 상급 시녀로 임명하신 것도 모르다니.”
“······!”
순간 사람들이 경악했다. 단순히 이블린이 상급 시녀로 승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상급 시녀는 대귀족의 부인만 될 수 있었다. 그 말은 즉 이블린이 진짜 엘마이어 공작 부인이 된다는 의미였다.
“정말 전하께서 그녀와 결혼하시는 건가요?"
“이미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었답니다. 나라 안의 뛰어난 장인들은 모두 부름을 받았지요.”
“세상에······.”
“아주 화려한 결혼식이 될 예정이니 기대해도 좋아요.”
러셀 백작 부인의 선언에 사람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 중 이블린이 진짜 공작과 결혼 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출신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귀족의 사생아거나 평민 출신이겠지'
공작이 그런 천한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왕이 결혼을 허락하다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자들은 재빨리 백작 부인의 옆에 바짝 붙었다. 누가 대세가 될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작 부인께선 이블린 하인즈 양과 특별한 친분이 있으신 사이라고 들었어요.”
"특별한 건 아니고, 이블린 양이 나를 어머니처럼 친밀하게 생각하는 정도죠."
“어머, 정말로 친밀한 사이신가 봐요.”
"저도 하인즈 양을 소개받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있을까요?”
사람들의 변화를 느낀 백작 부인은 흐뭇한 얼굴로 부채를 파닥거렸다. 언제든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 * *
나는 물끄러미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새로운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관을 쓴 하트를 두 손이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랑을 뜻하는 하트는 핑크 자파이어, 영원히 충실 할 것을 맹세하는 왕관은 다이아몬드였다. 마지막으로 심장을 잡은 두 손은 우정을 상징했다.
그야말로 영원히 사랑하자는 뜻의 약혼반지였다.
갑자기 반지를 끼워 주던 세스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너무 쓸데없이 잘생긴 거 아니냐고.
"하루라도 빨리 당신이 신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군.”
진짜 결혼하자는 말이 아닌 것을 아는데도 가슴이 떨려서 죽을 뻔했다.
”에휴…….”
조금만 덜 잘생기지. 그럼 내가 이렇게 괴롭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가씨, 무슨 고민이타도 있으세요?”
그때 내 머리를 빗질하던 안나가 물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안나, 공작님을 덜 좋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
“여기서 더 좋아지면 진짜 집착할 것 같아서 무서워.”
거울을 통해 안나의 황당한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진짜 심각했다. 지금까지는 약혼 상태였지만 결혼하게 되면 더 많은 시간을 세스와 함께할 것이다.
그럼 정말 욕심이 생길 것 같았다. 내 쓸모가 사라져도 세스와 같이 있고 싶다고 매달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시면 어때요?" "반대로?"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니까 집착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마음껏 좋아하다 보면 괜찮아질 수도 있잖아요.”
명쾌한 안나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안나, 넌 진짜 천재야."
몸과 마음을 활활 불태워서 세스를 좋아하면 미련따위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기뻐하자 안나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맞는 말을 한 건지 불안해져요, 아가씨.“
“아냐, 정말 도움이 됐어 삶의 방향이 잡힌 것 같아.”
나는 오늘부터 연애에 미친 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원래 망나니는 색을 밝히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 공작님 좀 만나고 올게.”
“아가씨, 오늘은 정말 숨 쉴 여유도 없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관리 받으시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해요.”
“잠깐이라도 안 돼?"
"저도 정말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전하께서 결혼식 날짜를 너무 촉박하게 잡으셔서요.”
안나의 목소리에서 옅은 원망이 느껴졌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그래도 부족해?"
“한 달이나 남았다니요! 남들은 결혼식 준비에만 일 년을 쏟는 걸요!"
“그렇지만 식장도 정해져 있고, 드레스도 정해진 것 중에서 입어야 하고, 초대장은 이미 다 돌렸잖아?"
공작 가문의 결혼식은 식을 올리는 장소는 물론, 신부 드레스와 실내 장식까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통으로 못 박혀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진짜 결혼식이었으면 속상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 사라져야 할 대역인 나로서는 몇 개의 선택지 중에서 고르면 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이게 진정한공장식 결혼이지, 뭐.'
세스의 배려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장인들이 완성한 스케치를 들여다보고 이게 좋네요, 저게 좋네요. 하고 결정하면 끝이었다.
초대장도 원래라면 내 손으로 일일이 써서 보내야 했지만 세스가 대필하는 사람들을 잔뜩 써서 해결했다.
혼수 역시 완벽하게 준비가 끝나 있었고.
결혼식 준비하라고 궁에서 휴가까지 받았는데,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처음 세스가 잡은 결혼식 날짜는 일주일 뒤였는데, 가신들이 뜯어말려서 한 달 뒤로 미뤄졌다고 들었다.
지금 상황을 보니 진짜 일주일 뒤에 결혼식을 올려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안나는 입에서 불을 뿜었다.
“다른 아가씨들은 피부 관리로만 세 달을 보낸다고요. 아가씬 한 달밖에 시간이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세요!"
안나는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전부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며 나를 볶아 댔다. 슬슬 괴로워진 내가 탈출을 궁리하는 순간이었다.
“아가씨,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구원의 천사처럼 시녀장이 나타났다. 나는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어요?"
“어젯밤에 몰래 궁에 들어온 자들을 생포했는데, 아가씨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 중인 모양입니다.”
”저를요?"
평범한 침입자라면 나한테까지 보고가 올라올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난처한 표정의 시녀장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북부의 변경백인 우르스 발타자르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네? 북부요?"
혹시 북부의 식량 공급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급히 그들과 만나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용접실로 내려가자 꼬질꼬질한 남자애 둘이 서 있었다. 덩치는 거의 나만큼이나 컸지만 아직 어린티가 줄줄 났다.
둘 중 동생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가 남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어린애잖아? 네가 정말 공작 부인이야?"
"감히 그따위 말을!"
“무례합니다!"
사람들의 질책에 깜짝 놀란 듯이 형의 뒤로 숨은 갈색이가 투덜거렸다.
“그냥 물어본 건데 왜 화내는 거야?"
"바스티안, 조용히 해.”
동생보다 과묵해 보이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어린애 아니고, 아직 공작 부인도 아니고, 그냥 이블린 하인즈야. 이제 왜 나를 찾아왔는지 말해 줄래?"
“이블린 하인즈 님.”
그때, 앞으로 나선 과묵이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날개처럼 바닥에 끌렸다. 입을 삐쭉거린 갈색이도 옆에서 같은 자세를 취했다.
"북부를 구해 주신 은인께 감사드리며, 저희를 바쳐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용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