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암살자들이었다.
예민한 감각을 얻기 위해 신체 개조를 받은 그들은 이블린이 쏟아 부은 자극을 버티지 못했다.
특히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휘황찬란한 빛과 쿵 쿵 거리는 소리는 광과민성 쇼크를 일으켰다. 왕실 기시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진 암살자들을 도토리 수확하듯 주워 모았다.
“이놈들은 뭐지? 암살자인가?"
"어디인지 몰라도 초짜를! 보낸 모양입니다.”
“혹시 모르니 몸수색하고 자결하지 못하게 해 둬.”
"예, 이쪽으로 지식이 있는 애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악명 높은 암살 단체 ‘어둠의 눈’과 집요하기로 이름난 ‘웨어울프'는 특급 암살자들이 모조리 체포당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리고 어떤 기사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이블린은 동료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록 원하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다들 최선을 다해 멋진 무대를 만들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블린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로 질책받을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고개를 든 이블린이 말을 이었다.
"실패의 책임은 모두 제게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가씨······."
"여러분의 무대는 최고였습니다. 폐하께서도 여러분의 능력을 인정해 주실 거예요.”
사람들의 눈빛이 크게 일렁거렸다. 얼어붙은 분위기 가풀리며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손님들이 그렇게 연약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맞아요. 그냥 옷을 펼쳤을 뿐인데 그걸 보고 기절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게 무섭나? 이게?"
무용단원이 날개 같은 옷을 펄럭이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군악대원들도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북 두드리니까 다섯 명이 기절한 거 봤어?"
“내가 뿔피리 부는 순간엔 열 명이 쓰러졌다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왕실 작곡가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선보인 새로운 음악과 연출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지요.”
"저도 빛 마법의 새로운 방향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좀 더 많은 것을 연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백탑주가 뒤를 이어 말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 운 시도였다고, 참 즐거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은 그저 사고이니 벌을 내리진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세요. 아가씨가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모두 정말 고마워요.”
뜻밖의 격려에 감동한 이블린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왕이 시녀장인 피오나와 함께 대기실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왕의 방문에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예를 올렸다. 그들의 모습을 쭉 둘러본 왕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짐을 보라.”
주춤거리던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왕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그대들의 활약, 실로 훌륭하였다!"
“······!”
“짐의 예상을 뛰어넘는 멋진 무대였다. 이번 일로 무지몽매한 지들까지 신녀의 위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블린 하인즈!"
"예, 폐하!"
이블린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이번 무대를 기획한 그대의 공이 가장 크다. 이블린 하인즈를 상급 시녀로 승진시키고 ‘휴식의 방'올 관리 하는 직위를 내리겠다.”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블린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왕의 시녀 장인 피오나가 상급 시녀의 패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승진을 축하해요, 이블린.”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저, 그런데 휴식의 방이 대체 어디죠?"
왕이 새로 만든 ‘귀염둥이의 방'이라고 차마 답할 수 없었던 피오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손짓했다.
그사이 왕은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블린과 함께 최고의 무대를 만든 그대들에게도 약속된 보수의 열 배를 지급하고 상을 내릴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모두가 입을 모아 소리쳤다. 벌을 각오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상을 받게 되자 다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짐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기뻐해도 좋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그대들이니.”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하던 이들이 이블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가씨, 축하드립니다!"
“아가씨의 무대는 최고였습니다!"
갑자기 축하하는 분위기에 휩쓸린 이블린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왕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블린 짐의 앞으로 와라.”
사람들의 축하를 받던 이블린은 급히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블린을 뻔히 바라보던 왕이 그녀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세스 녀석과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구나.”
이블린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엔 심플한 온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왕이 ‘단 한 번은 국익보다 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겠다.’고 약속한 증표였다 동시에 절대 빼지 말라는 명령 또한 내려져 있었다.
왕은 그것을 배서 두 번째 손가락으로 옮겼다.
“이걸 옮겨 준다고 해서 짐이 널 풀어 준 것은 아니다."
“네?"
이블린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반지를 ‘일회용 목숨권’으로만 생각하는 그녀는 왕이 왜 반지를 옮기는지 이유를 몰랐다. 왕이 여전히 순진한 이블린의 뺨을 꼬집었다.
"귀여운 것 내 옆을 떠나지 말거라 알겠느냐?"
”······네, 폐하."
아파서 울상을 지은 이블린이 얌전히 대답했다. 왕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마차 옆에서 이블린을 기다리던 세스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옷차림으로 나타난 제스터가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세스는 한 손으로 가볍게 검을 받았다.
“아가씨에게 전해 줘.”
-띠링!
오랜만에 주인의 손에 잡힌 성검이 수줍게 울었다. 그것을 무시한 세스가 제스터를 바라봤다.
"직접 전해 주지 않고?"
“네가 여장한 직후에 아가씨에게 말을 걸 수 있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제스터가 다소 공격적으로 대꾸했다. 말없이 웃은 세스가 검을 갈무리했다.
“제스터.”
“왜? "
막 돌아서려던 제스터가 귀찮은 얼굴로 세스를 쳐다봤다. 세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 빨리 포기하는 게 좋아."
주먹을 꾹 쥔 제스터가 그를 노려봤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야? 아가씨에게 진심이긴 해?”
“······.”
"여전히 죽고 싶다는 눈으로 돌아다니는 주제에.”
세스가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뜻밖에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있으면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러니 아무리 너라도 양보는 못 해.”
“웃기지 마. 네가 어떤 놈인지 뻔히 아는데, 그딴 말에 속을 것 같아?"
짧게 욕설을 내뱉은 제스터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 걷자마자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가씨가 계속 네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녀는 네가 아니라도 잘 살 수 있어.
귓가를 스치는 말에 세스가 쓰게 웃었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때 그가 기다리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분홍색 머리를 나풀거리며 이블린이 달려왔다.
“세스!”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이블린의 뒤로 거대한 흑룡이 따라오고 있었다.
세스는 말없이 흑룡을 바라봤다. 오지 말라는 그의 뜻을 느낀 흑룡이 멈칫하더니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블린이 세스의 품에 폭 안겨 들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혹시 제스터 씨 못 봤어요? 약속 장소에 가 봤는데 흑룡이만 있고 제스터 씨는 없어서요.”
"방금 만났어.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더군.”
자연스러운 거짓말에 이블린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결과가 너무 안 좋아서 실망한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폐하께선 무척 기뻐하시던데?"
기뻐하다 뿐인가. 지금쯤 귀족들이 기절하는 영상 기록구를 돌려보며 껄껄 웃고 있을 것이다.
”······폐하께선 사람들이 기절하는 게 좋으셨나 봐요. 제가 장르를 잘못 잡은 걸까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호러메이즈 같은 걸 하는 게 나았을까요?"
이블린이 커다란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말했다.
다행히 결과에 실망해서 울진 않은 모양이었다. 붉어지지 않은 눈가를 확인한 세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뭘 하든 당신이 손대면 재미있었을 거야."
“그건 세스가 이번 무대를 못 봐서 그래요.”
이블린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작게 옷은 세스가 귀여운 약혼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왜 내가 안 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네?"
어지러운 듯 눈을 깜박이던 이블린이 그를 올려다봤다. 세스는 선선히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서 멀리서 관람 중이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관람보다는 이블린을 노리는 암살자가 있을까 봐 뒤에서 감시 중이었지만.
“정말요?"
“제일 먼저 쓰러진 건 노란 옷을 입은 부인이었지?"
눈을 크게 뜬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너무도 순진하고 무방비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사람을 충동질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난 당신 무대가 마음에 들었어. 연출도 좋았고, 사람들이 픽픽 쓰러질 때도 묘하게 통쾌하던데?"
“왠지 세스다운 감상이네요.”
질렸다는 듯이 눈을 흘긴 이블린이 이내 환하게 웃었다. 무척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세스 마음에 들었다는 거에 기뻐해야 할지, 포인트가 이상하다는 것에서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웃고 있으니까 기본 거겠지.”
“이건 그냥 세스를 봐서 기쁜 거예요.”
툭 던져진 말에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그녀에겐 정말 별것 아닌 한마디였지만, 세스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작게 미소 지은 그는 이블린의 손을 잡았다.
귀여운 새끼손가락엔 그가 준 인장 반지가, 검지에는 왕이 준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세스는 비어 있는 네 번째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비, 우리 이제 결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