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04화 (104/240)

104화

내 계획은 간단했다.

흑룡을 타고 등장한 제스터가 성검 주크를 뽑아 영험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주크만 내려서 성검이라는 확인을 받는다. 그 뒤에 모두 퇴장한다.

"같이 등장하는 무용단과 군악대가 사람들의 접근을 막을 거예요. 제스터 씨는 흑룡의 머리 위에 서 있다가 성검을 뽑고 퇴장만 하시면 돼요.”

”······무용단? 군악대요?“

"네, 폐하께서 왕실 무용단과 군악대를 빌려주신다고 하셨어요. 컨셉을 스케치한 것도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나는 갖고 온 스케치북을 주섬주섬 꺼냈다. 제스터는 내가 열심히 그린 그림을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이군요.”

“헤헤, 조금 그렇죠?“

모티브로 잡은 것이 알라딘에 나오는 ‘알리 왕자의 등장’이라서 더 그랬다.

처음엔 코끼리나 공작새 같은 동물도 등장시킬 계획이었는데 왕이 절대 안 된다고 탈락시켰다. 다행히 거대 깃털 부채나 깃발의 사용은 허가받았다.

그림을 모두 살펴본 제스터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상황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남자라서 신녀가 되기 엔 무립니다.”

예상한 10가지 거절 답변 중 하나였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지. 나는 곧바로 선녀 의상의 디자인을 펼쳤다.

"보다시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가려지는 의상이에요. 두건과 베일, 장갑을 착용해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 않죠. 사회적 명예까지 완벽하게 보장해 드릴게요.”

”……얼굴은 안 보인다고 쳐도, 키가 있지 않습니까. 제 키를 보고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스터 씨는 계속 흑룡의 머리 위에 있을 테니까, 정확한 키를 가늠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제스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거절할 것 같은 기색에 나는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제스터 씨가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게요? 어째서요?"

“제스터 씨는 천공신이 선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니까요.”

“······.”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약간의 미련이 남았다.

왕이 ‘신녀의 등장 무대'를 맡아서 지휘해 보겠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무대에 설 수는 없어도 최고의 무대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제스터가 꼭 필요했다.

‘하이라이트에선 주크가 번쩍번쩍 빔을 뿜어야 하니까. 꼭 성검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제스터를 바라봤다.

“제스터 씨와 함께라면 분명 최고의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담스러운 듯 내 시선을 살짝 피한 제스터가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아가씨, 이런 무대를 만든다고 했을 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국왕 폐하와 공작님은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저한테 꼭 해 보라고 맡겨 주신걸요.”

나는 정말 순수한 사실만 말했지만 제스터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둘은 아가씨가 뭘 들고 와도 좋다고 하겠죠. 다른 사람들은요?"

“백석탑주도 멋진 계획이라고 무대에 참여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백탑에서 특수 효과를 담당할 거예요. 물의 신전에서도 도와주기로 했고요.”

“세상이 전부 미쳤구나.”

제스터가 머리를 싸쥐었다.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몰라 눈을 깜박였다.

"저기, 제가 책임자이긴 하지만 지휘만 하는 거예요. 음악 쪽으로는 궁정 악사님이  봐주시고, 연출 쪽으로도 무대 전문가가 붙을 거니까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혹시 내가 못미더운가 싶어서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작품임을 열심히 강조했다.

황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제스터가 물었다.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승낙하시면 폐하께서 보상을 해 주실 것이고, 거절 하신다고 해도 아무런 불이익은 없습니다. 약속드릴게요.”

너무 부담을 줬나 싶어서 절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제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아가씨의 계획이 어떻게 될지 물은 겁니다.”

“아,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제스터 씨의 상황이니까 거기 집중해서 선택해 주세요.”

그러자 한숨을 쉰 제스터가 말했다.

"······하죠.”

“네?"

“신녀 역할, 제가 맡겠습니다. 저라도 도와야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까요. 어디 끝까지 한번 해 보죠.”

”가, 감사합니다!"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인사했다.

하지만 제스터는 인사를 받는 건 모든 일이 끝난 뒤라며 손을 내저었다. 어쩐지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 * *

‘천공신의 신녀'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술렁거렸다.

“당연히 사기꾼이겠지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신녀 같은 게 있답니까?"

“하늘에 나타난 기상 현상을 보고 그럴싸한 이름을 갖다 붙인 것뿐입니다. 고전적인 수법이지요.”

다른 나라와 달리 아스트리아에선 신녀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기꾼이라며 덮어 두고 욕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엘마이어 공작이 끼고도는 약혼녀가 선녀라고 하던 데, 들으셨어요?"

“그거 헛소문이에요. 처음엔 그 여자가 신녀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또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누가 진짜 신녀라는 거예요?"

“그걸 알아보려고 여기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이블린이 준비한 무대는 바로 왕실의 정원이었다.

사람들은 좌우로 나뉘어 배치된 테이블에 앉아서 준비된 음식을 먹으며 수군거렸다.

그와 달리 위장 신분으로 잠입한 각국의 첩자들은 심각한분위기였다.

-신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본국으로 보내야 한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마라.

단순히 정보를 노리고 온 이들이 있는 반면, 좀 더 잔인한 목적으로 숨어 있는 자도 있었다.

-기회를 봐서 선녀의 목숨을 노려라. 만약 암살에 성공한다면 즉시 자결해라.

그리고 그들과 전혀 다른 목적으로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북부의 은인인 이블린 아가씨에게 아직까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북으로 돌아가기 전 에 어떻게든 인시를 전하지 않으면 안 돼.’

바로 북부의 변경백인 우르스 발타자르였다.

그는 대영주 회의에서 신나게 어깃장을 놓아 북부를 구원한 이블린에게 절절히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블린을 찾아갈 때마다 휴가 중이거나 가택 연금 중이거나 부재중이었다.

혹시 자신을 피하는 건가 싶어 땅을 파던 우르스는 이블린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자리에 온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북부에서도 신녀 인가 무녀를 섬겼었지요. 변경백께서도 선녀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그때 귀족 중 하나가 우르스에게 화살을 돌렸다. 무시하려던 우르스는 비열하게 반짝이는 그의 눈빛에 위험을 감지했다.

여기서 침목하면 북에 대한 악소문이 퍼질 것이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잠시 후에 만날 이블린까지 소문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우르스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북부에서 섬기는 것은 단 한 분, 신성한 맹약의 주 인이신 국왕 폐하뿐이오.”

“······흠, 저희 모두 국왕 폐하의 충실한 신하지요.”

목적을 이루지 못한 귀족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우르스는 주먹으로 놈의 머리를 깨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했다.

“위대한 아스트리아의 유일한 태양, 국왕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표하십시오!"

때마침 의전관이 나타냐 왕의 입장을 알렸다.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굽혔다. 덕분에 우르스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왕은 동장하자마자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오늘 천공신께서 보내 주신 선녀를 모두의 앞에서 소개하게 되어 참으로 기쁠 뿐이오. 모두 입을 무겁게 하고 신녀의 등장을 반겨 주길 바라오.”

사람들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왕의 뒤에 서 있는 이블린 하인즈를 쳐다봤다.

이것으로 이블린 하인즈는 신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해진 셈이었다.

‘하긴, 폐하께서도 가짜인 게 뻔한 사람을 선녀로 내세울 수는 없었겠지.’

‘어떤 여자가 등장할지 좀 궁금한걸.'

귀족들은 비웃음을 감추며 신녀가 등장하길 기다렸다. 첩자들은 몰래 숨겨 둔 영상 기록구를 꺼냈고, 암살자들은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했다.

-우우웅!

민감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땅이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이내 쿵쿵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접시들이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귀족들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렸다. 사방에서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수백 명이 그들을 노리고 달려오는 듯했다.

사실 이블린이 곳곳에 설치해 둔 음향 마도구의 효과였지만, 공명 현상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무용단의 등장과 함께 미리 녹음된 이국적인 연주가고 막에 때려 박히듯이 터져 나왔다.

순간 놀라서 펄쩍 뛰었던 귀족들은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뭐지? 심장이 좀 이상하게 뛰는데?'

이블린은 전생의 기억을 빌려 돈을 있는 대로 때려 부은 초호화 행진을 기획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용장하게 편곡하고, 음향 위에 진동을 겹치고, 화려한 의상과 마법으로 번쩍거리는 시각적 효과까지 더했다.

하지만 온실에서 곱게 자란 식물 같은 아스트리아의 귀족들은 이런 식의 지극에 아무 면역이 없었다.

흑백 영화를 보고도 놀라 기절할 순수한 사람들에게 4D를 때려 붓는 격이었다.

“아, 갑자기 머리가······.”

"현기증이······."

무용단이 화려한 옷자락을 펼침과 동시에 꽃가루가 터지자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를 부축 해 주는 사람마저 비틀거렸다.

군악대가 북을 치며 동장했을 때는 이미 손님 중의 절반이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선녀로 분장한 제스터가 나타났다. 그가 타고 있는 흑룡의 비늘이 마법으로 화려하게 반짝이자 나머지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멀쩡한 것은 왕과 근위대장, 북의 변경백 우르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이블린뿐이었다.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참으로 훌륭하다. 과연 천공신이 내려 주신 선녀다 운위엄이구나!"

첩자들은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신녀의 위엄이 대단하여 인간이 감히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