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당연히 복실이는 세스의 고기만 남남 받아먹었다.
물론 그것도 썩 맛있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성의를 봐서 먹어 준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내가 복실이를 너무 고급 입맛으로 키웠구나!'
복실이는 최고급 고기를 곱게 손질해 입에 넣어 주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었다. 갑자기 야생에서 사는 건 불가능한일이었다.
-구르르······.
선택받지 못한 흑룡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까미가 위로하듯 녀석의 얼굴에 뺨을 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냉정하게 돌아서더니 세스의 뒤로 가서 섰다.
"까, 까미야?"
-구륵? 구르륵!
자식에 이어서 아내까지 뻣긴 흑룡이 충격으로 울부짖었다.
나는 다급히 까미를 설득했다.
"까미야, 남편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나 까미는 고개를 획 돌릴 분이었다.
흠흠 헛기침을 한 선배님이 대신 설명했다.
"까미 님은 특정 품종의 어린 양고기만 드십니다. 삼 일에 한 번은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매일 잠자리의 톱밥을 새로 갈아 드려야 하고요. 이곳에선 불가능한 일이죠.“
······더러운 자본주의가 한 가정을 망쳤어
-꾸우!
그때 복실이가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나를 불렀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자 녀석이 손톱만 한 핑크색 보석을 내 발치에 밀어 놓았다.
도토리를 쌓듯 수십 개의 보석을 쌓아 올린 복실이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꼭 칭찬해 달라는 것 같았다.
······복실아, 너 이걸 노리고 저쪽에 간 거였니?
차마 칭찬해 주지 못하는 나를 대선해, 세스가 복실이를 안아 들었다. 그는 복실이가 가져온 보석들을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핑크 다이아몬드군. 네 엄마에게 잘 어울리겠구나."
-꾸우!
"적의 본거지를 터는 건 중요하지 장하다, 내 아들."
세스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복실이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만둬 이 사악한 부자야!
나는 머뭇거리며 흑룡을 쳐다봤다. 가엾은 흑룡은 완전히 넋을 놓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으악, 너무 불쌍해서 차마 못 보겠어.
"저 , 저기 . 내가 자주 까미랑 복실이를 데리고 올게. 너무 슬퍼하지 마."
나는 흑룡의 옆으로 다가가 위로했다. 그러자 훌쩍 훌쩍 울던 흑룡이 나를 보고 반짝 눈을 빛냈다.
-구르르!
녀석은 갑자기 모아 둔 보물들을 가져와 내 앞에 쌓아 놓았다. 그리고 구륵구륵 울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꼭 버림받은 새끼 고양이가 키워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아니, 너까지 키우기는 좀…….”
-구륵!
“넌 여기 왕이고 또 부하들도 있고…….”
-구르륵!
아내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흑룡을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세스를 돌아 봤다.
“저기, 세스?"
복실이와 놀아 주던 세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흐, 흑룡이도 집에 데려가면 안 될까요?"
"응?"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 시치미를 뚝 떼는 공작님 이 오늘따라 참 심술궂게 느껴졌다.
“혼자 여기 남겨 두는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흑룡이도 데려가게 해 주세요, 네?"
“당신이 원한다면 데려가지. 단, 저 녀석이 내게 복종한다는 조건이야.”
세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흑룡을 노려봤다.
“한 집에 두 우두머리는 존재할 수 없거든.”
-구륵······.
흑룡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깊게 죽였다. 한숨을 쉰 나는 가엾은 흑룡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뿍!
그것을 본 복실이가 갑자기 복복 회를 내기 시작했다. 세스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엄마가 다른 바실리스크를 만지는 게 싫지?"
-뿍뿍!
아니, 공작님. 왜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시키세요?
사악한 부자를 노려본 나는 까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까미가 난처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까미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어, 잠깐만. 결국 까미는 좋은 환경과 남편과 자식을 전부 다 손에 넣은 거잖아.
"까미야, 너 설마 일부라······?“
까미가 한쪽 눈을 슬쩍 감았다 떴다. 나는 까미가 그린 큰 그림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섬을 떠나기 전, 흑룡은 모든 바실리스크들을 불러 모았다. 갑자기 이곳을 떠나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흑룡이 나를 중앙으로 슥슥 밀어냈다.
"응? 무슨 일이야?"
어느새 다가온 바실리스크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리고 차례차례 뜨거운 눈물을 내게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까미가 전에도 몇 번 내게 눈물을 뿌려 줬기 때문이다.
주치의인 켄트 박사님은 바실리스크의 눈물에 강한 회복과 해독 작용이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건 ‘바실리스크의 축복'이었다.
‘어?'
문득 나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내 위에 떨어지는 눈물이 아주 옅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눈물이 아닌 건가?'
눈물은 내게 닿는 동시에 말라 버렸다. 너무 순식간이라 피부에 흡수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축복을 끝낸 바실리스크들이 하나둘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까미와 흑룡이 다가와 내 이마에 푸른 눈물을 떨어뜨렸다.
-구르륵!
흑룡이 만족스럽게 울었다.
이제 끝났다는 뜻을 알아차린 나는 세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바실리스크들이 슬그머니 해산하기 시작했다.
“잠깐, 나만 해 주는 거였어?"
-구록!
흑룡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도 은근히 뒤 끝이 있는 뱀이구나.
“당신이 축복만 받는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세스는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바로 옆에 선배님이 계신데요.
"처음부터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보니, 밥값이 아깝진 않을 것 같군.”
냉혹한 세스의 평가에 흑룡이 구르륵 울었다. 분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두고 보자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 * *
섬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왕의 길'을 타고 프리지어 궁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추가된 거대한 바실리스크를 보고도 사람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허허, 또 식구가 늘어났군요. 좋은 일입니다.“
“온실을 하나 더 준비해야겠습니다."
“이번 아이는 덩치가 무척 크군요.”
그들이 강심장이 되어 버린 것도 다 내 탓인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프리지어 궁을 둘러본 흑룡은 별채를 둘러싼 호수에 자리를 잡았다. 녀석은 온실을 마다하고 돌과 나무를 물어다 새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을 짓다 지루해지면 호수에서 첨벙거리며 수영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럴 때마다 커다란 물기둥이 생겨서 내 방의 창문까지 물이 튈 정도였다.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왕이 찾아왔다. 왕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내가 분명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조용히 다녀 오라했을 텐데?"
"히이익! 폐하, 저는 정말 조용히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저런 괴물이 프리지어 궁에 생기면 다들 네가 뭔가 했다고 의심한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말씀을! 저는 그냥 평범한 망나니 지망생일 뿐인데요?
“어떻게 이틀에 한 번씩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는지.”
이마를 짚은 왕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시녀장이 차를 올렸다. 잠시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힌 왕이 불쑥 용건을 꺼냈다.
“신전에서 너를 흑마법사로 몰아가던 일을 포기한 듯하다.”
"네? 정말요?"
“그리고 마탑에서도 고발을 취소했더군. 이쪽은 세스가 손을 썼다. 죽음의 섬에서 가져온 희귀 샘플을 넘기는 대가로 적탑의 마법사들을· 전부 제명해 버렸어.”
어쩐지 선배님이 열심히 채집을 하며 돌아다니시더니, 그게 마탑에 넘길 샘플이었나 보다.
"결국 너를 겨누던 칼날은 모두 부러진 셈이다 누가 짠 계획인지 몰라도 제법 속이 쓰리겠지. 저런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손을 쓰지 못하니.”
왕이 호수에서 수영 중인 흑룡을 턱짓하며 말했다. 나는 그렇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왕이 불쑥 물었다.
“이블린, 지금이라면 선택할 수 있다 너는 천공신의 신녀가 되고 싶으냐?"
“네?”
이미 내가 ‘천공신의 선녀'라고 정해진 것 아니었나? 다른 나라에 발표까지 했는데?
“나는 천공신의 선녀가 있다고 밝혔지만,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내세울 수 있어.”
“폐하께서는 제가 신녀가 되는 게 싫으신 건가요?"
“너는 성검도, 바실리스크도 손에 넣었다. 굳이 신녀가 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왕은 대답을 피했지만 ‘그렇다.’고 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제가 천공신의 신녀가 되면 대역을 그만두기 어려워서인가요?"
“아니, 너는 왜 그런 것부터 생각하느냐? 짐이 그렇게 못된 왕이냐?"
왕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영락없이 그 이유라고 생각했던 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한숨을 쉰 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백했다.
“짐은 네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된다. 너는 이미 지나 치게 주목을 받고 있어. 여기서 더 시선이 집중되어 봤자 표적이 될 뿐이야.”
“어, 그럼 정말 절 걱정하셔서…….”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느냐 대충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지!”
나는 히히 웃다가 왕에게 꿀밤을 맞았다. 아픈 머리를 문지른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폐하, ‘천공신의 신녀‘는 성검인 주크를 들고 나타나야 하잖아요. 제가 아니 면 불가능할 텐데요.”
“한 번이라면 속여 넘길 수 있다. 적당히 얼굴을 가리고 아무 검이나 들려서 바실리스크 옆에 세워 두면 되겠지. 암살의 위협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말 하면 다들 넘어갈 거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것 같지가 않은데. 무엇보다 성검 주크가 진짜인지는 꼭 확인하려고 할 거다.
“그럼 제가 적당히 변장하고 신녀인 척하면······.”
“너와 신녀가 동시에 같은 자리에 있어야 신녀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아니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딱 한 번이라도 주크를 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바실리스크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
“앗!”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 *
“그래서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제스터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주크에게도 허락을 받았어요. 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제스터 씨라면 한 번은 봐줄 수 있대요."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외쳤다.
“제스터 씨, 딱 한 번만 천공신의 신녀가 되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