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 *
바실리스크들이 사는 축음의 삼은 마치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처음 보는 야생화가 화려한 색을 자랑했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새들이 우리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이상하게도 섬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따뜻해졌다. 바실리스크들이 활동하기엔 딱 좋은 환경이었다.
"여긴 북쪽인데도 남쪽보다 더 따뜻하네요.”
“화산의 영향도 없는 곳인데, 신기하군.”
나는 열대의 섬에 놀러 온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세스는 땅을 짚어 보며 왜 온도가 높은지 고민했고, 선배님은 희귀한 식물을 채취하는 중이었다.
흑룡은 그런 우리를 중앙에 있는 동굴로 이끌었다. 입구에선 자연 동굴로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위적인 손길이 느껴졌다. 벽에 남은 흔적을 살펴본 세스가 말했다.
“여긴 고대의 유적인 것 같군.”
"······고대의 유적이요?"
고대의 유적에 좋은 기억이 없는 나는 걱정부터 들었다.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느낀 세스가 작게 웃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전의 흔적이야. 별 일은 없을 거야.”
세스의 말대로 안으로 들어가니 누가 봐도 유적인 건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반은 바다에 잠기고, 반은 흔적만 남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구르르르!
흑룡이 자랑하듯 자신의 보금자리를 보여 주었다.
원래 유적의 홀이었던 장소에 보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유적과 난파선에서 주워 모은 모양이었다.
-꾸우?
흑룡의 머리에서 폴짝 뛰어내린 복실이가 금화 속을 헤엄쳐 다녔다. 그것을 본 세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재력으로 나한테 덤비겠다는 건가?"
“세스.”
나는 쓸데없이 흥분한 공작님의 팔을 잡았다.
"흑룡은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거예요. 자신도 복실이랑 까미를 잘 돌볼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요.”
흑룡이 내 말에 동의하듯 구륵구륵 울었다. 미간을 찌푸린 세스가 나를 바라봤다.
“당신은 그래도 괜찮아?"
"안 괜찮아도 한 가족을 갈라놓을 수는 없잖아요.“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까미의 남편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흑룡은 바실리스크의 왕이었고, 따르는 부하들도 많았다. 도저히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까미와 복실이만 데려갈 수도 없었다. 함께 있는 세 마리가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도 복실이와 까미의 가족이야. 내가 복실이의 아빠인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당신이 복실이의 엄마인 것도 달라지지 않아.”
세스는 오만한 얼굴로 흑룡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작 손바닥만 한 섬과 한 줌도 안 되는 재물을 가지고 내 아들을 키우겠다고?"
-그르르륵! 그르륵!
흑룡이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다. 하지만 세스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불만 있으면 덤벼.”
어, 갑자기 분위기가 사랑과 전쟁이 됐는데요?
-구르르 !
그때, 까미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까미가 복실이를 가리키며 울자 멈칫한 흑룡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하지만 까미가 다시 재촉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멍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흑룡을 바라봤다.
“갑자기 어디 가는 걸까요?"
”누가 더 능력 있는 아빠인지 겨루자는 것 같은데?"
“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스는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선배님에게서 밧줄과 단검을 받았다. 필요한 것들을 챙긴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올게. 모리스의 옆에서 떨어지지 마."
“세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나도 사냥하러 가야지.”
싱긋 웃은 세스가 동굴을 나섰다. 뭐야,
갑자기 사냥이라니. 왜 그렇게 되는데? 무슨 남자끼리 통하는 암호라도 있는 거야?
격정하지 마십시오. 감히 주군을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여기 없으니까요.”
선배님이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애써 황당한 표정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앉으십시오. 주군이 돌아오시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선배님이 솜씨 좋게 만든 자리를 권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그냥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앉았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선배님과는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다가가려고 하면 엄청나게 두꺼운 벽이 느껴졌다.
‘으아아! 살려 줘요, 세스!'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날 이런 상황에 빠트린 세스가 열렬히 보고 싶을 정도였다. 비슷한 기분인지 헛기침을 연발하던 선배님이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실례가 아니라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뭐든 말씀해 주세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 이후에도 한 참을 침묵하던 선배님이 물었다.
“아가씨께선 주군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한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저는 공작님을 좋아하는데요?"
"바로 그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선배님이 고백했다.
“저는 아가씨가 대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가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고요.”
어떤 점에서 이해를 못하는 건지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자 선배님이 참고 있던 것을 터트리듯 쏘아붙였다.
“아가씨는 진짜 공작 부인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군을 진심으로 좋아하시는 것처럼 행동하시잖습니까.”
"진짜 좋아하니까요?"
내 대답에 선배님은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선배님 말씀은,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야······.”
선배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관리직인 선배님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격정하지 마세요. 전 진짜 공작 부인이 될 생각이 없어요. 그냥 공작님이 좋으니까, 여기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좋아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럼 대역이 끝난 뒤에는 어쩌실 겁니까?"
“떠나야죠.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했는걸요.”
내가 세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멍하게 나를 쳐다보던 선배님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진심이십니까?"
"네, 역할을 다하면 공작님의 옆에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감히 남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제 신분이 하찮으니까요."
가슴이 쓰리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전 공작님께 도움이 되고 싶거든요. 제 역할이 끝난 뒤에는 짐만 될 분이니까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선배님?"
고구마를 먹고 체한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선배님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순수하게 주군을 좋아하 실 수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이득을 보고 있는데요? 공작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저한테 잘 대해 주잖아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정정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것도 다 세스 덕분인데, 뭐.
"선배님께도 감사드리고 있어요. 제 정체도 뻔히 아시는데 구박하지 않고 잘 대해 주셔서요.”
그러자 뭔가를 고민하던 선배님이 말했다.
"······주군은 당신을 마음에 두신 게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죽은 형님의 대신으로 당신을 구한 거예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배님을 바라봤다.
“제가공작님의 형님과 닮았어요?"
“아뇨, 하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모습이 닮아 보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선배님이 덧붙였다.
“전 주군의 형님이신 아서 님의 호위였습니다. 그 화재 때도 두 분의 옆에 있었죠. 기절하신 주군을 안고 나온 사람도 접니다. 그래서 감히 주군의 상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아니, 나는 세스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하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처음 주군께 동생을 위한 조건만 내거셨지요. 자산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오직 동생을 위해서만 주군께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그때 주군께선 분명 아서 님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나는 오래된 기억을 뒤적였다.
처음 만났을 때 세스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를 사 달라는 부탁에 배를 태워 버릴 생각이라고 협박까지 했다. 그런 세스의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 진 것은,
“그리고 제 동생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세요. 아직 어리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카데미에 보내 주시면 더 좋고요.”
내가 브란을 위한 조건을 내걸었을 때였다.
나는 나를 위한 조건은 걸지 못했다. 많은 조건을 걸면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이 세스의 마음을 움직였을 줄은 몰랐다.
“그분은 그저 자신이 구하지 못한 형님 대신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으신 것뿐입니다.”
뜻밖의 사실에 명해졌지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뿐이었다.
나를 강아지로 생각하던 세스가 갑자기 이성으로 좋아해 주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그럼 내가 행복해지면 세스도 만족할까?'
세스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좋은 일이었다. 나는 앞으로 행복한 티를 팍팍 내고 다니기로 했다.
“그러니까 바보처럼 굴지 말고 당신 몫을 챙기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헌신하다간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모르던 사실을 잔뜩 알려 준 선배님께 인사했다. 그러자 이마를 짚은 선배님이 ‘이게 아닌데.’하고 괴로워했다.
그때, 물살을 가르며 흑룡이 나타났다.
사람 키만 한 물고기를 까미 앞에 내려놓은 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까미가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복실이 앞으로 옮겨 놓았다.
-찌야악!
기겁한 복실이가 내 쪽으로 도망쳤다.
아이고, 곱게 간 고기만 먹여 기른 내 새끼.
당황한 흑룡이 물고기를 탁 쳐서 죽인 뒤에 복실이 앞으로 내밀었다. 복실이는 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했다.
-뿍!
잔뜩 화가 난 복실이가 물고기에 흙을 끼얹기 시작 했다. 당황한 흑룡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세스가 돌아왔다. 그는 점점 개판이 되어 가는 상황을 보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세스가 꺼낸 것은 뭔지 모를 짐승의 고기를 얇게 저며서 야생 민트 잎과 함께 싼 것이었다.
완전 반칙인데요, 김세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