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 *
나는 어두워서 새까맣게 보이는 해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내 귓가에서 무섭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전의 경험으로 떨어져도 안전하다는 것을 아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세스는 잘 따라오고 있겠지?'
힐끗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균형을 잃은 몸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비 조심······.”
다급한 세스의 목소리가 들리다가 바람에 지워졌다.
-구르르르!
이어서 까미가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의 균형을 바로 잡으려고 했지만 바람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몸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이 가까워지는 것을 본 나는 얼른 실수가 아닌 것처럼 두 팔을 활짝 펴고 착지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어때 주크? 내 착지도 제법 괜찮았지?"
-띠링!
주크가 빨리 주변을 보라고 재촉했다. 의아해서 고개를 돌린 나는 수십 쌍의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하고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바실리스크들이 구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바실리스크 무리 한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아, 안녕?"
원맨쇼를 보인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는 우선 손을 흔들었다. 바실리스크들이 다시 구륵구륵 웃었다.
아니, 얘들은 다 섬에 있는 거 아니었어? 왜 해변에 모여 있는 거지?
-캬칵!
그때 재빨리 다가온 까미가 내 주변을 감싸고 다른 바실리스크들을 위협했다. 바실리스크들이 진정하라는 것처럼 머리를 한들한들 움직였다.
왠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인 것 같았다. 사이는 좀 나빠 보이지만.
“이비, 괜찮아?"
까미의 몸을 훌쩍 뛰어넘으며 다가온 세스가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전 아주 멀쩡해요!”
“떨어질 때 다치진 않았어?"
“아, 아까 그건 일부러 그런 건데…….”
내 변명에도 안심하지 못한 세스가 나를 살폈다. 새벽빛에 반사된 은발이 반짝반짝 빛나자 바실리스크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구르륵?
슬금슬금 얼굴을 들이미는 바실리스크를 까미가 꼬리로 거세게 후려쳤다.
-캬갸각!
까미는 조금의 용서도 없이 화를 냈다. 그러자 바실리스크들이 기가 죽어서 고개를 움츠렸다.
"까, 까미가 생각보다 센데요?"
“바실리스크 무리에서 서열이 높은 모양이군.”
우리의 수군거림을 들은 까미가 자랑스러운 듯 머리를 치켜들었다.
-꾸우꾸!
까미의 머리에 붙어 있던 복실이도 의기양양하게 울부짖었다.
-구르르르르!
그때 복실이의 울음소리를 덮어 버리는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실리스크들이 옆으로 물러서자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다.
점점 밝아지는 하늘 아래, 거대한 흑룡 한 마리가 바닷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우리를 본 흑룡이 다시 구르르하고 울었다.
거기 응답하듯 울음소리를 낸 까미가 바다로 첨벙 뛰어 들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설마······.”
저 커다란 용이 복실이의 친아빠인 거야?
내가 놀라는 사이, 까미는 흑룡의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인 흑룡이 까미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볐다. 마치 그동안 고생했다고 위로하듯이.
까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을 까미와 머리를 비비고 있던 흑룡이 고개를 들어 복실이를 쳐다봤다.
-찌야악!
갑자기 거대한 얼굴이 다가오자 놀란 복실이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대신 머리를 곧추세우고 숙숙거리며 친아빠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흑룡이 그륵그륵 웃었다. 복실이의 패기가 마음에든 모양이었다.
까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순간 복실이의 동작이 뚝 멈췄다. 녀석은 자신과 흑룡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꾸우우?
복실이의 울음소리에 흑룡이 무어라 대답했다. 그러자 복실이가 갑자기 신이 나서 팔짝거렸다.
"친아빠인 걸 알았나 봐요.“
복실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세스가 아쉬운 듯 말했다.
“복실이의 아빠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세스가 복실이의 아빠예요.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나 역시 까미가 나타났을 때 마음이 싱숭생숭했기 때문에 세스가 어떤 기분인지 이해했다. 열심히 위로하는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은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르르······.
그때, 까미가 나를 향해 부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복실이와 흑룡도 나를 쳐다봤다.
이거 오라고 부르는거 맞지?
흑룡이 올라오기엔 해변이 너무 좁으니 내가바다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뿌우! 뿌!
어느새 흑룡의 머리 위로 옮겨 간 복실이가 재촉하는 소리를 냈다. 당장 가지 않으면 바다로 뛰어내릴 기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 간다, 가.”
"같이 가지.”
세스가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당황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세스까지 물에 젖을 필요 없잖아요.”
하지만 세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를 말리다가 실패한 나는 물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처음엔 착각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처럼 흑룡의 바로 앞까지 물이 쪼개졌다.
“세, 세스?"
당황한 나는 세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흑룡을 살핀 세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을 조종하다니, 역시 상위종이군.”
"상위종이요?"
"저 녀석이 바실리스크의 왕인 것 같아.”
아니, 그럼 우리 복실이는 왕자?
깜짝 놀란 나를 보고 오해한 세스가 덧붙였다.
격정하지 마. 놈이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을 지켜 줄 테니까.”
-띠링!
이어서 주크가 자신도 잊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진 않겠지만 아주 든든했다. 나는 당당하게 흑룡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흑룡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빌딩이 무너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후욱!
커다란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움찔 눈을 뜬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흑룡과 마주했다.
왠지 복실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조를 때와 비슷한 자세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다.”
흑룡에게서 전해지는 것은 기쁨과 고마움이었다. 까미가 뭐라고 말했는지 녀석은 사무치게 내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고마워하지 마. 나야말로 복실이랑 까미 때문에 행복했는걸.”
사실 복실이와 까미를 구한 것은 세스의 신성력과 재력이었다. 나는 복실이의 알을 깨트려 미숙아로 만든 원흉이기에 감사를 받기엔 양심이 매우 찔렸다.
-뿍!
그때 흑룡의 불에 올라가 있던 복실이가 내게 기어 왔다. 녀석은 흑룡 말고 자신을 쓰다듬으라는 것처럼 온몸을 흔들었다.
“그래그래, 우리 복실이도 착해요.”
-꾸우!
나는 복실이가 만족할 때까지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흑룡이 다시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녀석의 뜻을 알아챈 나는 주춤했다.
“네 머리 위에 타라고?"
순간 세스가 나를 등 뒤로 돌려세웠다. 그는 흑룡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절대 안 돼. 네 짝이나 챙겨.”
왠지 아쉬운 표정이 된 흑룡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까미와 함께 바다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지나가는 자리가 둘로 갈라지며 바닷속에 길이 생겼다.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게 보였다.
”와, 와야·…·!"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썰물 때문에 바닷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봤지만,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양옆으로 푸른 벽처럼 치솟은 바닷물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갑자기 확 쏟아지면 도망도 못 치고 휩쓸려 버리겠지?
-구르르르!
그때 멀리서 까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무서우면 가지 말까?"
세스가 망설이는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저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건지 잘 몰라서요.”
“이 방향이면 자신들의 섬을 보여 주고 싶은 것 같군."
세스가 방향을 가늠하며 말했다.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이 갈 수 없다는 그 섬이요?"
“당신이 가면 인간이 간 적 있는 섬이 되겠군.”
우와, 그 말을 들으니 가보고 싶어!
기대감에 팔짝 뛰는 나를 보고 살짝 웃은 세스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
“아 참, 그런데 선배님은요?"
세스의 손을 잡으려던 나는 멈칫 뒤를 돌아봤다.
바실리스크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던 선배님이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목숨은 체가 챙길 수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선배님의 머리를 후르릅 핥았다.
"히이익!"
선배님이 기겁하자 바실리스크가 구륵구륵 웃었다. 나는 다시 한번 권했다.
"선배님, 저희랑 같이 가요.”
“아뇨, 전 뒤에서 따라가는 게 편합니다.”
선배님이 결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선배님을 방생하기로 했다.
“가요, 세스.”
나는 세스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바닷속을 산책하는 것 같은 낭만적인 기분이 들었다.
* * *
헥터는 멍하게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뒤를 다른 바실리스크들이 시종처럼 따라 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와 바실리스크들을 복종시키고, 바다를 둘로 가르는 그녀의 모습은 바다의 신인 네레이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만큼 경이로운 기적이었다.
그분만 아니라 다른 성기사들도 넋을 잃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바실리스크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누구도 움직이지 못 했다.
“영상! 영상 기록한 사람 있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상급 기사가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용케 기록구를 쥐고 있던 성기사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했습니다!"
영상구를 받아 든 상급 기사가 그것을 바닥에 내던져 깨트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성기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기록은 모두 파기한다! 하나도 남겨 놓지 마라!"
대지의 신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기적은 없었던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상급자들의 재촉에 성기사들은 하나둘 기록을 파기했다.
그 순간 헥터는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 자신이 목격한 기적의 주인을 따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