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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99화 (99/240)

99화

세 지도자는 뜬금없는 말에 조용해졌다.

그들 중 제일 먼저 생각을 정리한 사람은 성녀였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이번 일은 아스트리아의 의도하에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인가요?"

“성녀께선 항상 잘 모르겠다면서 잘 알아들으시더군. 그렇소.”

왕이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 오만한 태도에 로엔 공왕이 울컥했다.

"실수? 이건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공왕, 지금 내 설명을 듣고 싶은 거요, 아니면 그냥 싸우고 싶은 거요?"

왕이 싸늘한 눈으로 공왕을 노려봤다. 이 자리의 최약체라고 할 수 있는 공왕이 움찔했다.

“자자, 일단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아스트리아 왕께선 이번 일의 책임을 다른 자에게 떠넘기고 싶은 듯하니.”

나바르 왕이 말리는 척하며 빈정거렸다. 그의 도발을 무시한 왕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밝히는 거지만, 아스트리아에 천공신의 선택을 받은 신녀가 생겼소.”

”······뭐?"

“뭐요?"

이거야말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어이없어하는 사람들을 둘러본 왕이 씩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천공신의 나라에서 천공신의 선녀가 생기는 게 이상한 일이오?"

“아스트리아에 천공신의 신도가 존재하긴 하냐? 천공신께서 치를 떨며 너희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리라 저주하셨을 텐데?”

공왕이 대놓고 비꼬았다.

그에 왕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비로운 신께서 이제 우리를 용서할 마음이 드셨나보지 아니면 왜 신녀를 내렸겠소?"

”가짜일지도 모르지.”

나바르 왕이 단정 짓듯이 말했다. 그러자 왕이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을 그를 쳐다봤다.

“나바르 왕, 사막과 불꽃이 아직도 그대를 지켜 줄 것이라 믿는 건가?"

나바르 왕의 입술이 움찔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왕이 경고하듯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지. 천공신의 신녀를 모욕하는 자는 아스트리아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오.”

그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성녀가 물었다.

“위협보다는 증명이 우선이 아닌지요. 아스트리아의 왕이여, 그녀가 선녀로서 기적을 보인 적이 있습니까?"

“성녀께서도 이미 아실 텐데?"

천공신의 신녀에 대해 처음 듣는 성녀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왕이 마치 자랑하듯 말했다.

“대지의 신전도 해결하지 못한 백탑주의 저주를 풀고, 오만한 괴수인 바실리스크를 길들였소. 천공신께 성스러운 검을 하사받고, 이미 잊혀져 버린 왕의 길을 여는 기적을 우리에게 선사했소.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하오?“

백탑주의 저주와 바실리스크라는 말에 성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알아챈 공왕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왜 나는 죄다 처음 듣는 소리지?"

왕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께 감히 묻고 싶소만 차기 성녀께선 어떤 기적을 보이셨는지 ?"

"차기 성녀가 결정되었소? 왜 나는 몰랐지?"

아무도 공왕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성녀는 차분한 얼굴로 왕을 마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차기 성녀는 대지신의 신탁에 따라 선발되므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시치미 떼시기는. 내가 듣기로는 장미 좀 피우고 병자 몇 명을 낫게 했다던데. 그런 진부한 것보다는 우리 애가 더 대단하지 않소?”

대지신의 기적이 갑자기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변해 버렸다. 그럼에도 성녀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거기 대해선 제가 답변드릴 수 없겠군요.”

“어쨌든 왕의 길은 우리 선녀가 의욕이 너무 앞서서 이것저것 해 보려다가 실수로 열어 버린 거요.”

"······."

“나도 녀석을 많이 혼냈으니, 여러분도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

강요나 다름없는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들이 급하게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지도 못하게 하늘을 빼앗겨 되찾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제왕인 그리핀도 ‘왕의 길'에 다가가길 두려워했다. 날개가 없는 성기사들과 사막의 전사들은 하늘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항의, 또는 애원뿐이었다.

왕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 자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의 길을 저대로 내버려 두자는 말이오?”

나바르 왕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물었다. 왕이 씨익 이를 드러냈다.

“우리 선녀가 그러더군. 보이지 않아도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데, 안심할 수 있겠는가? 그럼 내버려 두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확실히 그랬다. ‘왕의 길'이 하늘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지요.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지어야 안심하는 자도 있을 겁니다.”

성녀가 차분하게 설득을 시작했다. 왕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왕의 길을 거두는 쪽으로 마무리 짓자고 말 했소. 그런데 우리 애가 그러더군. 맨입으로?"

세 사람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공왕이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야 본론에 들어온 것 같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 거요?"

왕은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손끝으로 옥좌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톡톡 소리가 귀에 거슬릴 때쯤 왕이 말을 꺼냈다.

“이제 나와 카스티야 왕국 사이에서 간을 보는 것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소?"

각자의 이유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세 사람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왕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줬소. 이제 결론을 내릴 시간이지”

"······."

"7년 전쟁의 승리자는 아스트리아요. 그대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것이 사실이오. 나는 승자의 권한을 행사하길 원하오.”

과거 연합 왕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으냐고?

아니, 그런 낡은 것을 왜 원하겠는가. 이미 모든 영광은 이 손 안에 쥐여져 있는데.

‘그것을 알려 준 것도 우리 귀염둥이지만.'

싱긋 미소 지은 왕이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평화 회담을 개최하겠소. 아스트리아의 동맹으로서 회담에 참석하시오.”

* * *

수면 위에 떠 있던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숨을 내쉰 성녀는 천천히 수반에서 손을 거두었다.

조금 전의 대화는 화상으로 연결된 비공식적인 회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공식적인 회담에 참석해야 한다. 그것도 속국을 자처하면서.

‘나의 신이시여, 이 굴욕을 이겨 낼 용기를 주소서.’

성녀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단장 레오디나스가 정중히 몸을 굽혔다.

"회담은 잘 끝나셨습니까?"

“그래, 기다려 줘서 고맙구나."

인자하게 답한 성녀가 앞서 걸어 나갔다. 무표정한 레오디나스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레오, 아스트리아로 잠입해서 천공신의 선녀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번거롭겠지만 쓸 만한 사람을 직접 골라 주렴.“

"······."

그때 레오디나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의아해진 성녀가 돌아보자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성하, 저를 아스트리아로 보내 주십시오.”

“레오?"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간절한 목소리에 성녀가 움찔했다. 두 손을 꼭 모아 쥔 그녀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세스 때문이니?"

"저는 그가 과거를 버렸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도 세스가 약혼했다는 소리는 들었단다. 과거를 잊고 축하해 줄 수는 없는 거니?"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집스러운 녹색 눈이 성녀를 향했다. 무어라 말하려던 성녀는 한숨을 쉬었다.

"레오, 너는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있단다. 하지만 너를 여기 붙잡아 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구나.”

"······죄송합니다."

“그래, 아스트리아에 다녀오렴 이번 기회에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성녀는 오랫동안 묶어 두었던 맹수를 풀어 주기로 했다.

* * *

"휴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었군.”

왕은 식은땀을 홀리며 옥좌에서 내려왔다. 대기 중 이던 피오나가 왕에게 물수건을 내밀었다.

“훌륭하셨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이블린이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아야겠지.”

왕이 다짐하듯 말했다. 피오나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이블린에게 성검을 맡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으면? 이제 와 녀석이 만들어 놓은 것을 홀랑 가로챌까?"

왕이 피식 웃었다. 피오나는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성검 주크’는 왕의 길을 열기 위한 열쇠. 폐하께서 보관하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어차피 그 성검은 내 말을 듣지 않아. 그것의 주인은 세스고, 친구는 이블린이지. 둘은 내 충실한 신하이니 믿고 맡기면 돼.”

피오나는 여전히 납독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왕이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피오나, 세스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검으로 고통 받았다. 하지만 고것은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이었어.”

이블린의 말을 듣고 보석 방과 주크에 대해 조사한 학자들은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았다.

“이 검은 ‘왕의 갈’을 열거 위한 열쇠이자, 길을 가동시키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는 상치인 것 같습니다. 계속 모으기만 하고 옮겨 주지 않았던 탓에, 에너지가 넘쳐 연결된 주인에게까지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주크의 주인들이 미쳐서 죽은 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을 몸에 받아들인 탓이었다.

만약 세스에게 신성력이 없었다면 그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왕으로서 어리석은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녀석에게서 무엇 하나도 빼앗고 싶지 않구나.”

“그냥 이블린만 빼앗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건 별개의 문제고.”

왕이 입을 삐죽였다. 살짝 미소 지온 피오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아색 무지개처럼 보이는 ‘왕의 길'이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지금은 상아색이지만 밤이 되면 황금색으로 변해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보일 것이다.

“이블린은 지금쯤 떠났을까요?"

“흥, 대체 어디에 간다고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구나. 그 커다란 바실리스크까지 데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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