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제스터는 자신이 잠시 꿈을 꾸나 생각했다.
실종된 이블린이 자선의 가게 앞에서 감자를 구워 먹고 있는 상황이 너무 현실감 없었던 것이다.
”와, 이 감자 진짜 맛있어요.”
“사실 감자는 어떻게 해도 밍밍하거든. 하지만 좋은 버터와 함께 구우면 이렇게 근사한 맛이 나지.”
신이 난 이블린의 목소리에 이어 잡화점 주인이 잘 난 척하는 말이 들렸다.
“아가씨, 이것도 좀 먹어 봐! 우리 집에서 만든 소시지인데, 맛이 아주 기가 막혀.”
“아유, 마실 것도 주면서 먹여야지. 목 막히겠어요.”
모닥불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주위가 시끌시끌했다.
제스터는 멍하게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지금 모닥불 앞에 있는 이는 그를 이방인 취급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없이 상냥한 얼굴로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착한 이웃 같았다.
“앗, 제스터 씨!"
그때, 그를 발견한 이블린이 감자를 쥔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왔네! 빨리 좀 다니지. 아가씨가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아가씨가 문 앞에서 달달 떨고 있기에 불을 좀 피웠어. 우리 집에 들어가자고 해도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서.”
갑자기 친한 척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스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흠흠, 하도 거만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주 멀쩡하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아가씨 데리고 들어가 봐. 이러다가 감기 걸리겠어.”
사람들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그중 처음 보는 여자가 아쉬운 얼굴로 이블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럼 저는 이제 가볼게요.”
"같이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 혼자 기다렸으면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이블린도 친한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했다.
“아유, 젊은 아가씨를 어떻게 혼자 두고 가요. 당연한 일인데 고맙긴 무슨. 어서 들어가요.”
"새댁은 나랑 같이 가지. 날이 어두우니 내가 저기 골목까지 배웅해 줌세.”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됐으니까 들어가. 어서.”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배웅한 이블린이 제스터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제스터 씨,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달리 생각나는 곳이 없어서요.”
그녀는 앞치마가 달린 재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두건을 쓰고 있었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차림새였지만, 그림으로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웃집 소녀 같았다.
왠지 목이 메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킨 제스터가 애써 웃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
* * *
제스터의 할아버지인 파르스는 동방에서 유명한 암살자였다.
그는 ‘살수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제 모든 것을 물려 줄 후계자를 찾아 바다를 건너올 정도였다.
제스터는 죽도록 노력했지만, ‘실패작'이었던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살수왕 파르스가 선택한 후계자는 바로 세스 엘마이어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열등감은 제스터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제스터는 이블린을 가게에 붙은 방으로 데려갔다.
프리지어 궁에 비하면 창고 같은 곳이었지만, 이블린은 환기를 시키고 벽난로에 불을 붙이면서 매우 즐거워했다. 천성적으로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옆에 있으면 누구나 행복하겠지.’
울컥 세스에 대한 미움이 올라왔다. 제 것도 아닌 행복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너는 내 후계자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세스 녀석, 조금 짜증나지 않아요? 신분에 권력에 재력에 외모에. 남들이 원하는 건 다 가졌잖아요.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척한단 말이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험담에 제스터는 조금 후회했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맞아요, 세스가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어요. 겉만 보면 굉장히 대범한 것 같은데 사실 전혀 아니거든요.”
뜻밖에도 이블린은 아주 즐거운 얼굴로 맞장구쳤다. 그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스터는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대범은 무슨 갠 진짜 엄청나게 속이 좁아요. 원한을 품으면 끝까지 복수한다니까요. ‘이거 가지고 이렇게까지 해야 돼?' 싶은 적도 많아요.”
"호음, 질투하는 거 보면 조금 그런 면이 있나?"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여운 동물 같은 모습에 제스터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영 아니다 싶으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요. 아니면 절대 녀석의 손에서 못 벗어날걸요?"
제스터는 자신이 아주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투덜대지 않고서는 그녀와 단둘이 있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그를 뻔히 쳐다보던 이블린이 배시시 웃었다.
“제스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예?"
“한 번도 저랑 세스가 안 어울린다고 하신 적이 없잖아요. 제가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했다고도 안 하시고. 정말 절 걱정해서 말씀해 주시니까, 너무 고마워요.”
"······. "
제스터는 수줍게 감사를 표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칼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제스터의 할아버지, 암살왕 파르스는 세스 엘마이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노력했다.
처음 시작은 납치였다.
당시 소년에 불과했던 세스는 암살왕인 파르스를 상대로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맞서 싸웠다.
그때 제스터는 신성력을 가진 검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목이 베이고 팔이 잘려도 곧바로 회복하며 싸웠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달려드는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온 광전사 같았다.
싸우는 와중에도 파르스의 기술을 흡수해서 받아치는 모습은 눈부신 재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대신 말해 주었다.
전혀 암살자답지 않은, 어찌 보면 암살자의 천적 같은 소년이었지만 파르스는 그에게 완전히 매혹되었다.
“너는 천재다! 천재야, 세스 엘마이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너야말로 내 후계자에 어울린다! 너를 꼭 내 후계자로 만들고야 말겠다!"
당시 파르스는 노망이 났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어떻게 공작가의 아들을 납치해서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발상을 하겠는가. 세스가 버림받은 자식이 아니었다면 제스터 일가가 먼저 쓸려 나갔을 것이다.
그 뒤에도 파르스는 끈질기게 세스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남은 생을 불태워 자신의 모든 것을 세스에게 전수했다. 세스가 그것을 원하는지 아닌지는 파르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세스가 전쟁에 끌려갔을 때도 악착같이 뒤를 따라갔으며, 자신을 대신해 세스와 함께할 그림자 기사들을 길러 냈다. 마지막에는 아군에게 기습당한 세스를 구해 내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 세스는 눈물 한 방울 홀리지 않고 파르스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제스터를 분노하게 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파르스를 죽였어!"
"······."
“왜 출전한 거야! 가지 말라고 했잖아! 배신자가 있다고, 함정이라고 했잖아!"
당시의 제스터는 너무나 미숙했다.
파르스의 죽음을 슬퍼하지 갑는 세스가 미웠고, 제겐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 외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제멋대로 휘두른 검을 세스가 피하지 않았을 때 깨달았다. 세스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고 싶어 했다는 것을.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나 지쳐서 눈물을 홀릴 수가 없었다는 것도.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기에 도망쳤다.
세스는 자신을 찌른 제스터를 아무런 처벌도 없이 용서했다 언제든 돌아오라는 뜻이었지만 제스터는 그대로 기사단을 그만두었다.
“제스터.”
낯익은 목소리에 제스터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항상 그랬듯 수의처럼 검은 옷을 입은 세스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기사들 이보였다
“그녀는?”
세스가 인사도 없이 물었다.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마음이 꽤 급한듯했다. 이블린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전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도착했는지 궁금했다.
"안쪽 방에 모셔다 놨어.”
제스터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세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제스터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블린과 마주하기 힘들어 가게 밖으로 도망 나온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잠시 후, 세스가 즐겁게 재잘거리는 이블린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제스터는 그녀를 발견한 기사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세스, 제스터 씨에게 인사해야 해요.”
제스터를 본 이블린이 어서 내려달라고 재촉했다.
또다시 마음이 술렁이는 것을 느낀 제스터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인사는 됐으니 어서 가세요. 다음에도 보면 되죠.”
“다음에도 놀러 올게요. 고마웠어요, 제스터 씨.”
제스터는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배웅했다.
문득 세스에게 그녀를 아껴 주라는 멍청한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황금색 빛은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왕의 갈’에 포함된 신성 왕국, 나바르 왕국, 로엔 공국에서는 강한 반발을 표했다.
“아스트리아의 왕이여. 그대는 과거 연합 왕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것입니까?"
가장 신성한 자리에서 성녀가 말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를! 연합이 깨어진 이유가 아스트리아의 원죄 때문이라는 것을 잊은 거요?"
하늘의 제왕, 그리핀을 다스리는 로엔 공왕이 으르렁거렸다.
“나바르에서는 적절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합니다.”
황금의 나라, 나바르의 왕이 느물거리며 말했다.
그들을 둘러본 아스트리아의 왕은 느긋하게 옥좌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애가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