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 *
”으아아아!”
바닥에서 빛이 솟구치는 순간, 거기에 휩쓸린 나는 마치 병뚜껑처럼 튀어 올랐다.
천장에 부딪칠 거라고 생각한 나를 비웃듯이, 내 몸은 한도 끝도 없이 위로 치솟았다. 나중에 떨어질 일이 걱정될 정도였다.
‘설마 이번 생은 이렇게 추락해서 죽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이렇게 죽는다고?
주마등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아직 완성하지 못한 곰 인형과 온실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채소, 백화점의 푸드 코너와 카페도 떠올랐다.
‘세스랑 키스도 몇 번 못 해 봤단 말이야!'
마지막 순간, 세스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걸 봤는데 그걸 잡지 못한 게 제일 억울했다.
"박주크 씨! 이거 어쩔 거예요!"
나는 여전히 내 손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검을 잘잘 흔들며 화풀이했다. 하지만 주크는 완전히 잠에 빠진 듯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꾸우! 꾸!
그때, 주머니 속에서 복실이가 겁에 질린 소리를 냈다.
복실이까지 끌려온 것을 깨닫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날아가는 반대쪽으로 헤엄을 치자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머리를 똑바로 가눌 수 있게 된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나는 거대한 우주 공간 같은 곳에 떠 있었다.
머리 위는 온통 새까맸고 아무것도 없었다. 발밑으로는 황금색 강이 콸콸 흐르는 중이었다.
저거 생긴 게 완전히 저승의 강인데. 여길 건너면 영 영 돌아가지 못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안 돼! 난 다시 돌아가야 해!"
절박하게 소리치는 순간, 강물 속에서 낯익은 풍경이 떠올랐다. 매일 출근하는 왕궁의 모습이었다.
“어?”
머뭇거리는 사이, 왕궁의 풍경은 멀리멀리 흘러가고 이번엔 그란 가문의 저택이 떠올랐다. 그동안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는지 폐가가 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저택의 모습이 흘러간 다음엔 글로리아나 백화점이, 그다음엔 한동안 신세를 졌던 하얀 장미 저택이 보였다.
‘전부 내가 갔던 곳이잖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강물에 뛰어 들면 저기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일단 저질러 봐? 그 외에는 다른 방법도 없잖아?'
여긴 황금색 강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탈출하려면 강에 뛰어드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좋아! 한번 해 보자!'
결심을 굳힌 나는 다음 풍경을 기다렸다.
잠시 후, 세스와 함께 갔던 디저트 가게의 모습이 수면에 떠올랐다. 나는 반색하며 강으로 뛰어들었다.
밖에선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는데 진짜 물은 아니었는지, 차가운 바람 같은 감촉이 몸을 감쌌다.
떠내려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디저트 가게의 귀퉁이를 움켜쥘 순 있었다. 그리고 몸이 그 안으로 핵 끌어당겨졌다.
”으아악!“
이번엔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귀 옆을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발밑에 있는 풍경이 확대되듯 쑥쑥 커졌다. 이대로 바닥에 처박히면 빈대떡이 될 것 같았다.
"세스으으, 살려 줘요오오으아아아!"
다음 순간, 몸이 폭신한 짚 더미에 푹 박혔다. 짚이 튀어 오르고, 근처에서 먹이를 먹던 닭들이 꼬꼬댁거리며 도망쳤다.
뜻밖에도 고통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 멀쩡해서 내가 추락하는 꿈을 꿨나 싶을 정도였다.
‘여긴 어디지?'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디저트 가게는 아니었다. 어느 가정집의 뒷마당 인 듯 빨래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았네.”
어찌나 놀랐는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기운을 차릴 때까지만 짚 더미에 앉아 있기로 했다.
"주크?"
주크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주크뿐인데, 녀석이 깨어나질 않으니 좀 답답했다.
-뿌우우?
그때, 주머니에서 기어 나온 복실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귀여운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복실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꾸! 꾸우우!
고개를 끄덕인 복실이가 내 손에 뺨을 비벼 댔다. 마치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좋아, 우리 힘내서 집으로 돌아가자.”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세스가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오늘 도망친 일 때문에 상처받은 것 같았는데.
‘돌아가자마자 세스를 꼭 안아 줘야지 뽀뽀도 열 번 해줘야지.'
그 순간, 빨래가 옆으로 젖혀지더니 자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짚 더미 위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진 아이가 뻑 소리쳤다.
"엄마! 여기 공주님이 있어!"
"무슨 헛소리야?"
뒤이어 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세상에, 진짜공주님이신가요?"
“아닙니다. 지나가던 개구리입니다.”
나 같은 게 공주면 디즈니가 망한다.
진지한 내 대답에 고개를 갸웃한 아이가 물었다.
“아까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요?"
“마법에 휘말려서 하늘에서 떨어졌거든.”
순순히 답해 주자 아이 가 인상을 썼다.
"마법이라니, 역시 공주님 맞잖아!"
“쉿, 정체를 숨기시는 거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모녀의 대화 끝에 나는 제스터의 가게를 묘사하며 혹시 아는지 물어봤다.
아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헌 옷 거리에 있는 특이한 가게 말이죠? 으리으리하지만 뭘 파는지 도통 모르겠던데.”
알고 보니 이곳은 제스터의 가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가정집이었다. 강에 뛰어들 때 끄트머리를 움켜쥐는 바람에 애매한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가게 요즘 문을 안 여는 것 같던데요.”
“네? 정말요?"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계속 닫혀 있었거든요.”
이상하다. 분명 가게에 돌아갔다고 했는데.
까미가 나를 습격한 날, 제스터는 자신을 희생해서 내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려 했지만 제스터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세스의 말로는 가게 일이 바빠 찾아오기 힘들다고 했다.
바쁠 때 찾아가는 것도 민폐라고 해서 감사의 편지와 선물만 보냈는데, 사설 가게가 계속 닫혀 있었다니.
‘설마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겠지?'
고민하는 시간에 한번 찾아가 보는 게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아이 엄마에게 제안했다.
"혹시 안 입는 옷이 있으면 제 옷이랑 바꾸실래요?"
* * *
이블린이 실종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스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묘한 일이었다. 한 번도 타인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두려움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으니까.
“제스터. 넌 어떻게 할 거지? 우리와 함께 아가씨를 찾을 거야?"
그림자 기사 중 하나인 뮤가 물었다.
지나치게 사교적인 성격의 뮤는 매번 무시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말을 붙여 왔다.
제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난 따로 움직인다. 같이 움직이는 건 시간 낭비야."
“그래그래, 마스터 파르스의 손자께서 우리 같은 놈들이랑 어떻게 같이 다니겠어?"
뮤의 쌍둥이 형제인 뉴가 비꼬듯이 말했다.
제스터는 못 들온 척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뺨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에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이블린 하인즈.'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귀족 아가씨인 줄 알았다.
세스 놈이 계속 ‘내 아내'라고 영역 표시를 하는 것은 좀 이상했지만, 워낙 예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이블린이에요.”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 쳤을 때 가슴이 살짝 울렁거렸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제스터의 특이한 외모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혼혈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기묘한 미소를 짓곤 했다.
경멸의 미소, 혹은 이해한다는 미소. 어느 쪽이든 짜증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블린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혼혈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요리사 주제에 왜 공작과 친한 사이냐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남편과 친한 사람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예의 바른 미소만 보였다.
제스터는 그녀의 건조한 예의가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이블린이 그를 바람둥이라고 흉올 봤다는 소리를 듣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애교 떠는 짐승이나 알랑거리는 아랫것이 아니라 바람둥이라니. 정말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럼 나도 무례하게 굴진 말아야지.’
그녀는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니까, 같은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켜 주길 바라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지.
단순한 흥미. 별것 아닌 호기심. 이블린의 호위를 맡은 것은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블린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가끔씩 보이는 엉뚱한 행동도 귀엽게 느껴졌다.
처음 약속한 기한이 끝난 뒤에도 이블린의 옆에 남은 것은 그저 좀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괴수. 바실리스크와 맞닥뜨렸을 때. 제 힘으로는 이블린을 살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을 때.
뭔가가 이상하다고,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것 같다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건 저를 노리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까 저를 두고 도망가세요.”
그래도 자신을 두고 가라는, 그 말만 듣지 않았으면 계속 착각할 수 있었을 텐데.
제스터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이블린의 옆을 떠났다. 하지만 원래 생활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녀의 근처를 맴돌기만 했다.
‘하지만 당신이 실종될 줄 알았다면 결코 옆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제스터는 계속해서 후회하며 자신의 가게로 돌아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이블린의 행방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앞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사람들과 함께 감지를 구워 먹고 있는 이블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