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넷은 같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스는 정말 주크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꺼림직 해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럼 왜 주크를 지금까지 보고에 가둬 둔 것인지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
-띠리링!
그때 주크가 항의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세스가 떠난 뒤에도 멍하게 서 있는 내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는 씩 웃으며 주크를 간질였다.
“자, 이제 들어가자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안은 엄청나게 화려하거든.”
여기서 살고 있는 나도 감당이 안 될 정도의 화려함이었다.
나는 주크가 깜짝 놀랄 것을 기대하며 스테인드글라스가 비추는 어두운 홀을 가로질렀다. 그다음은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보석의 방이었다.
-우우우웅!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주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석방의 모든 보석들이 빛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허공을 가로질러 방 한가운데 털썩 떨어졌다.
"까악! 아가씨!"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시녀장이 급히 내게 달려오려 했지만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입구에서 튕겨 나갔다. 시녀장은 보이지 않는 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살짝 부딪쳤을 뿐이에요!"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를 모셔 오겠습니다!"
시녀장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서둘러 바닥을 더듬거렸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주크가 품에서 빠져나갔던 것이다. 일단 주크를 찾아서 이곳을 탈출해야 할 것 같았다.
"주크! 어디에 있어?"
보석들이 뿜어내는 빛 때문에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바닥에 곳곳 이 서 있는 주크가 만져졌다.
“주크?"
순간, 내 손이 자석에 끌려가듯 주크의 손잡이에 찰 싹 달라붙었다.
“으악!”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손을뗄 수 없게 되었을 뿐이었다.
‘뭐,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주크의 손잡이를 꼭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주크 안에 있는 힘이 쭉쭉 뽑혀 나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주크? 괜찮아?"
-우우웅!
내 말에 대답하듯 주크가 몸을 떨었다. 녀석은 오히려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주크에게 반응하듯 바닥이 우르릉 떨렸다.
눈부시게 빛나던 보석들이 하나둘 빛을 잃었다. 대신 성 전체가 우웅우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마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기계에 전원을 컨 것 같았다.
문득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세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비 이 성은 아주 오래된 유적이야. 왕국이 세워 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고대의 유산이지.”
고대의 유적과 전설의 검이 만나면 해괴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잖아!
“주크!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나는 있는 힘껏 주크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내 뜻과는 정반대로 주크가 바닥으로 쑥 밀려들어갔다.
그러자 버튼을 누른 것처럼 바닥의 중심부가 달칵 소리를 내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아아, 이게 뭐야!
“아가씨! 빨리 거기서 나오세요!"
”뭔지 몰라도 위험해요! 얼른 나오세요!"
심상찮은 상황을 느낀 시녀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주크의 손잡이에 붙잡힌 상황이었다.
”으윽, 이거 왜 안 빠져!"
용을 쓰며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주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내 무릎 높이만큼 가라앉은 바닥이 드르륵거리며 천천히 회전했다.
회전이 잠깐씩 멈출 때마다 달칵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금고의 다이얼을 맞추는것처럼.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길 처음 봤을 때도 금고를 생각했던 것 같은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크를 바라봤다.
"예전에 왕가의 재정이 바닥났을 때 여길 분해하려 했지만 실패했지.“
마법으로도, 대포로도, 망치와 정으로도 파괴되지 않았던 고대의 유적.
만약 이곳이 주크라는 열쇠로만 열 수 있는 금고라면 그동안 파괴할 수 없었던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비!"
낯익은 목소리 에 고개를 돌리자 창백하게 질린 세스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물에 빠진 강아지를 보듯 절박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세스!”
마주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여전히 내 손은 주크의 손잡이에 붙들린 재였다.
달칵!
순간, 마지막 다이얼이 맞춰지며 회전하던 바닥이 멈췄다 그리고 성의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었던 힘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왔다.
“전하!"
시녀장이 달려 나왔을 때, 세스는 이미 별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성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그는 곧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려 이곳까지 달려온 참이었다.
“전하, 아가씨가 호박 방에 갇히셨습니다! 저희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시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스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두운 홀을 가로지른 그는 기묘한 빛을 뿜고 있는 방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시녀들을 가로막던 미지의 힘은 그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굉장한 압력이 그를 짓눌렸다. 마치 폭포에 휩쓸린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휘감고 몸속에 있는 죽음의 기운을 뽑아 가기 시작했다.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문 세스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서 쓰러져 축더라도 이블린을 구해야했다.
죽음의 기운이 빠져나갈수록 신성력이 그 자리를 메우며 차올랐다. 세스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짓누르는 힘을 뿌리쳤다.
“이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는 곧장 이블린에게 달려갔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그를 돌아봤다.
”세스!”
반가움 가득한 얼굴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그때였다. 바닥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빛줄기가 이블린의 몸을 휘감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강렬한 빛으로 시야가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던진 세스는 이블린이 있던 자리로 손을 뻗었다.
손이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느낌이 전해졌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블린의 머리 장식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털썩 무릎을 꿇은 세스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 장식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귓가에 소곤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어.
-알고 있었잖아?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불행해져.
-네 욕심이 그녀를 죽인 거야 네가 놓아주지 않아서 죽은 거라고.
시야가 뚝뚝 끊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일그러지던 풍경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오며 집요한 속삭임도 사라졌다.
세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블린의 머리 장식이 손바닥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축지 않았다고, 빨리 찾아 달라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선은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구해 주는군.’
쓰게 미소 지은 세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하!”
그의 옆으로 다가온 시녀장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블린의 행방을 묻고 싶은데, 처참한 그의 표정을 보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격정하지 마.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이블린이 어디에 있든,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되찾을 것이다. 세스는 머리 장식에 입술을 묻었다. 희미하게 이블린의 향기가 느껴졌다. 장식을 품속에 넣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고 있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이변을 느낀 기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갑자기 성에서 치솟은 빛기둥과 하늘에 생긴 이상 현상으로 혼비백산한 상태 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던 세스가 말했다.
“이블린이 실종됐다.”
빛기둥을 봤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모리스가 속으로 탄식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싶으면 십중팔구는 이블린과 관계가 있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좋다. 모든 인력을 움직여서 그녀의 행방을 찾아내라.”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모리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반드시 수행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세스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치솟은 황금빛 기동에 대해서 왕을 추궁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별궁에서 치솟은 빛의 기둥은 하늘에 거대한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마치 황금색의 은하수 같았다.
황금색 빛무리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맹렬한 파도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가 신성 왕국의 하늘까지 이르렀다.
“저것은······!"
저녁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던 성녀가 그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성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를 수행 중이던 성기사단장 레오디나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성녀는 손을 들어 빛무리를 가리켰다.
"레오, 저 빛이 보이느냐?"
"예 안 그래도 처음 보는 현상이라고 신학자들이 난리였습니다.”
“나도 말로만 들었지,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저건 ‘왕의 길'이란다.”
성녀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주름진 얼굴이 한층 더 인자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그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습니다.”
레오디나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숨을 쉰 성녀가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천공신 아스트라이아가 지고왕에게 내려 준 길이지. 지고왕은 저 길을 이용해서 연합 왕국의 곳곳을 누비며 선정을 펼쳤단다.“
“이교의 전설이군요.”
“전설이 아니니까 문제겠지?"
성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건 실재하는 길이다 아스트리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하늘을 가로질러 우리를 치러 올 수 있다는 소리지.”
레오디나스의 얼굴이 한층 딱딱해졌다. 성녀가 아쉬운 얼굴로 빛무리를 올려다보았다.
"연합 왕국이 멸망할 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었다니 정말 놀랍구나. 무슨 방법으로 저것을 되살렸을까?"
"······. "
“나라가 갈라진 지금은 선정을 위한 길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길이 되겠구나.”
“그렇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아닙니까?"
레오디나스가 삐걱거리며 물었다. 성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리아 왕에게 무슨 의도인지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왕의 길을 재현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대놓고 펼치는 것은 협박이상의 속셈이 있을 테니까.”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아스트리아 왕이 들으면 몹시 억울해할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