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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95화 (95/240)

95화

***

“뭐? 성검의 소녀?"

차를 마시던 라리사가 멈칫하며 되물었다. 얼굴에 회초리 자국이 있는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마탑에서 왕의 목숨을 구한 것도, 바실리스크를 길들인 것도 전부 성검의 힘이었다고 해명 중입니다.”

"흥, 얄팍한 수작이 네."

신전의 손을 빌려 이블린을 처리하려 했던 라리사는 갑자기 나타난 돌발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멍청해서 금방 함정에 걸릴 줄 알았는데, 그렇게 고분고분 당해 주진 않겠다는 건가.”

하지만 소용없었다. 성검의 소녀 같은 후광을 달아 봤자 질투심 많은 귀족들에게 물어 뜯기기나 할 것이다.

"천한 것이 고귀한 이름을 덮어쓰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견제가 들어오는지 모르는 거지.”

그것이 급조된 이름이라면 더더욱, 증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커질 것이다.

라리사는 그때 이블린이 흑마법사라는 소문만 흘리면 끝이었다.

어떤 증거를 내놔도 사람들은 이블린의 말을 믿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

"불쌍하기도 해라 이블린 하인즈는 아직 사람들이 얼마나 추잡하고 비열한지 잘 모르는 모양이야.”

붉은 입술을 흰 라리사가 다시 차를 즐기기 시작했다.

* * *

“어명이요, 성검 주크는 어서 나와 센터를 맡으시오!"

나는 왕이 준 명령서를 높이 들고 외쳤다.

그러자 캐비닛 뒤에서 나를 홈쳐보던 주크가 몸을 홱 돌려 멀어졌다. 에이, 역시 안 통하네.

"주크 님! 제발 저희 팀의 센터를 맡아 주세요! 제가 믿을 수 있는 검은 당신밖에 없어요!"

나는 얼른 애절하게 외쳤다. 멀어지던 주크가 멈칫 하는 것이 보였다.

"흑흑, 복실아아. 주크가 도와주기 싫대. 이제 우리 어떡하지?"

-꾸우꾸…….

내가 엉엉 우는 소리를 내자 복실이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나는 감옥에 가고, 복실이는 다른 사람에게 잡혀가겠지?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못하겠지? 잘 있어, 주크.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훌쩍거리며 돌아서자, 뒤에서 다급한 오르골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주크가 검신을 짧게 흔들었다. 무슨 일인지 일단 말해 보라는 것 같았다.

“그게 말이야, 사실은…….”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간간히 띠롱띠롱 소리를 내며 듣던 주크는 내가 ‘성검의 소녀'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열심히 녀석을 설득했다.

"주크, 이건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 일이야. 어쩌면 세스가 널 다시 보는 계기가 될지도 몰라.”

-띠리링?

주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소리를 냈다.

휴 여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 나는 준비해 온 자루를 열고 안에서 두툼한 문서를 꺼냈다.

“자, 잘 들으십시오. 박주크 씨. 이게 바로 당신에 대한 세상의 평가입니다.”

천공신 아스트라이아는 아버지 디아스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주신이 되었다.

그런데 왕위를 계승하는 도중에 주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천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스트라이아는 없으면 새로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재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순수한 아기의 영혼 천 개를 모아 새로운 천둥을 빚어냈다.

단 한 명의 조카라도 있었다면 이게 얼마나 미친 짓 인지 알았을 텐데, 불행히도 아스트라이아는 형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천둥은 매일 천 명의 분량만큼 울어 댔다. 밤낮으로 그것을 듣는 신들은 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지상에선 가축들이 쓰러지고, 산모들은 유산하고, 사람과 짐승이 미쳐 날뛰는 개판이 벌어졌다.

결국 사방에서 항의를 받은 아스트라이아는 새로운 천둥을 슬픔이라는 은상자 안에 봉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알려진 주크의 전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주크 씨에 대한 이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몹시 시끄러움 둘째 말을 오지게 안 들음. 셋째, 민폐쟁이.”

-띠링…….

“시중에 나와 있는 다른 책들도 살펴보았는데요. 불길한 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검, 주인을 미치게 하는 검, 죽음의 검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주 많았습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주크는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이러다가 커터 칼이 될 것 같았다.

"박주크 씨는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시나요?"

-띵······.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박주크 씨는 민폐 검입니다. 그냥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인의 이미지가 안 좋아 질 정도예요.”

냉혹한 평가에 주크가 가늘게 검신을 떨었다. 복실이가 그런 주크를 위로하듯 손잡이에 뺨을 비볐다.

"하지만 저희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박주크 씨의 이미지는 확실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포브스 선정 갖고 싶은 성검 1위'가 될 수 있어요!“

-띵?!

“자, 새 마음 새 뜻으로 이미지를 세탁합시다!"

나는 보고 출납부를 주크의 앞으로 내밀었다.

주크는 ‘성검 주크 출고’라고 쓰여 있는 칸을 보며 머뭇거렸다.

"주크, 용기를 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울부짖는 검이 아니라, 믿음과 용기와 희망의 성검이 되는 거라고!"

-꾸! 꾸우우!

내 격려에 이어 복실이가 열심히 응원했다.

결심을 굳힌 듯 검선을 끄덕인 주크가 쿡 몸을 눌렀다. 그러자 출고’라는 글자 옆에 도장처럼 붉은 자국이 생겼다.

좋아, 센터를 얻었으니 성검의 소녀 팀 출격합니다!

* * *

나는 주크를 데리고 보고를 나섰다.

밖에 나오기 무섭게 주크가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보고 안에 갇혀 있었으니 모든 것 이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다.

괜히 짠해진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제일 먼저 의상부 사람들을 소개해 줄게 걱정하지마. 다들 널 좋아할 거야."

-띠링······.

주크가 기대 어린 소리를 냈다. 복실이가 그런 주크를 향해 열심히 부부거렸다. 의상부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는것 같았다.

그런 둘이 귀여워서 웃고 있던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조금 늦게 눈치챘다.

“이비.”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세스가 왜 여기에 있지?

평소라면 기뻐서 날뛰었겠지만 지금 내 품에는 세스의 스토커였던 주크가 안겨 있었다.

“헉!”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머릿속엔 둘을 마주치게 해선 안 된다고, 어딘가에 주크를 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비?"

“자, 잠깐만요!"

나는 주크를 숨길 곳을 생각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세스가 내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목줄이 풀린 강아지를 붙잡으려는 주인 같았다.

“따라오지 마세요! 진짜잠깐이면 돼요!"

하지만 세스는 그 잠깐을 참지 못했단. 내 팔을 낚아채려다 멈춘 그는 순식간에 나를 추월해 앞을 막아섰다.

미처 멈추지 못한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을 들이박고 말았다.

“아야야······."

”가지 마, 이비. 제발 가지 마.”

나를 꽉 끌어안은 세스가 속삭였다. 내 몸을 감싼 팔이 심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세스?"

지금 세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설마 나 때문인 건가? 내가 도망치려고 해서?'

나는 얼른 주크를 허리띠에 끼워 넣고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세스. 전 어디에도 안 가요 잊었어요? 우린 절대 끊어지지 않는 실로 연결된 사이잖아요.”

“······.”

“괜찮아요. 전 여기 있어요.”

나는 세스가 안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덫에 걸린 짐승처럼 거칠던 세스의 숨소리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꾸우······.

걱정스러운 소리를 낸 복실이가 세스의 뺨에 얼굴을 비벼 댔다. 복실이가 보기에도 지금의 세스는 평소와 다른 모습인 모양이었다.

‘진짜 나 때문이었다니…….’

그냥 몸을 돌려서 달아났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이 철벽같은 남자가 무너지는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한 세스가 고개를 들었다. 뿌부 우는 복실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 추태를 보였군.”

“조금 놀라긴 했지만 색달라서 좋았어요.”

일부러 뻔뻔하게 답하자 세스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정말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를 놓아주었다.

“왜 그랬던 거지? 나는 당산이 내게서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했어."

망설이던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해 버리기로 했다.

“사실 제가 보고에서 주크를 꺼내 왔어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주크와 마주치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급하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던 거예요.”

"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마. 나는 당신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쪽이 더 충격이었으니까.”

여전히 창백한 세스의 안색을 보면 진심인 것 같았다. 복실이가 그를 위로하듯 몇 번이고 뺨을 비렸다.

갑자기 복실이를 키우는 것을 숨기고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세스는 내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오해하고 내핵까지 땅을 파고 있었다.

‘공작님, 이러다가 제가 2년 뒤에 떠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올랐지만 애써 삼켜 버리고 말았다. 내가 2년 뒤를 욕심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무서워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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