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굳어 버렸다.
“폐, 폐하?”
“그래, 짐이다. 요 불성실한 시녀야."
피식 웃은 왕이 내 뺨을 꼬집었다. 아야!
예, 꿈이 아닌 것까지 알려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뺨을 꼬집는 왕의 손을 치워 버린 세스가 물었다. 다소 불경한 태도에도 왕은 개의치 않고 답해 주었다.
"급히 알려 줄 것이 있어서 왔다. 적탑의 마법사들이 ‘이블린 하인즈는 바실리스크를 부리는 흑마법사’라는 고발을 넣었다."
“예?”
아니, 내가 흑마법사라고?
황당해하는 나와 달리 눈살을 찌푸린 세스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뭐가 그럴 리가 없어? 지금 고발장이 차근차근 위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적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제 손에 약점이 하나씩 잡혀 있습니다. 제정신이라면 감히 고발을 하러 나서지는 못했을 겁니다.”
왠지 오싹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생각에 잠겨 턱을 쓰다듬던 왕이 말했다.
“하긴 네가 그런 허점을 남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누군가가 적탑의 마법사들을 사칭했단 말이냐?“
“사칭이거나, 협박을 당해서 고발장을 쓴 뒤에 살해당했을 겁니다.”
"흠, 그쪽으로 한번 알아봐야겠군.”
두 사람의 살벌한 대화가 끝나자 나는 조심스럽게 한손을 들었다.
"저,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격정하지 마, 이비. 당신이 조사를 받거나 재판장에 서는 일은 없을 테니까.”
세스가 딱 잘라 말했다. 할 말을 빼앗겨 불만스러운 표정 이 된 왕이 덧붙였다.
“녀석의 말대로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들은 지금 당장 정리해라. 계속 데리고 있기엔 너무 위험해. 이번 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신성 왕국에서 이단 심문관을 파견할 수도 있다.”
“이단 심문관이요?"
“성녀의 사냥개라고 불리는 자들이지 한 번도 들어 본적 없느냐?"
당연히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 것 같았다.
"혹시 제가 거기 잡혀 가면 고문당하고 화형 당하고 그러나요?"
“진짜 흑마법사가 아니면 그럴 일은 없지. 하지만 이단 심문관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는 것 자체가 아주 큰 불명예다."
갑자기 다이애나의 저주받은 목걸이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다이애나는 저주의 피해자인데도 안 좋은 소문이 날까봐 신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흑마법사라는 혐의로 이단 심문관에게 끌려간다면 세스의 약혼녀로 활동하는 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까미와 복실이는…….”
“이블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흑마법사라는 고발을 당한 이상 계속 그 녀석들을 키울 수는 없어.”
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런 식으로 둘을 허무하게 빼앗긴다고?
"네가 흑마법사로 붙잡히면 바실리스크도 압수당할거다. 그럼 평생 우리에 갇히거나 실험을 당하다가 죽겠지 차라리 지금 좋은 곳에 놓아주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나도 까미를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까미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떠밀리듯 보내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내야 해.'
꿍꿍거리며 머리를 쥐어짜는 내 옆에서 세스는 먼저 뭔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폐하, 이번 일을 꾸민 자의 속셈이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속셈? 이블린을 고발해서 곤란하게 만드는 게 놈들의 목적이 아니냐?"
“이블린이 직접 바실리스크를 놓아주도록 하는 것이 상대의 목적입니다. 증거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 그렇군.”
왕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멀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스가 그런 나를 위해 처음부터 설명해 주었다.
"상대는 이미 신성 왕국에 고발을 넣었을 거야. 당신이 복실이와 까미를 놓아주려고 하면 현장을 덮쳐서 증거를 만들 생각이겠지.”
"적당한 장소에 성기사들을 깔아 놨을 거다. 거기서 체포를 당하면 반론조차 불가능하니까.”
상대의 수작대로 바실리스크를 놓아주라고 말했던 왕이 민망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허허 웃었다.
"데리고 있으면 증거가 있어서 혐의가 인정되고, 놓아주면 현행범으로 끌려간다는 거죠?"
"상대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니 깨트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다른 사람이 바실리스크를 놓아주게 하면 돼.”
나는 왕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조금 전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것이 넘치기 직전이었다.
이번 일을 꾸민 놈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막나가는 망나니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마.
“폐하, 저는 복실이도 까미도 보내지 않고 계속 키우겠습니다."
“뭐?"
“괜찮습니다. 저는 그래도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영원의 뱀이니까요!"
나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왕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세스, 이 녀석이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
세스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욱 당당하게 말했다.
"백탑주가 그랬습니다. 제가 위대한 존재가 아니면 바실리스크가 왜 제 명령에 따르겠냐고. 저도 이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아주 위대하게 되어 버리죠, 뭐!”
”······백탑주가 뭐라고 했기에 애가 이렇게 미쳤느냐?"
“폐하, 전 진지합니다! 사람들 싹 다 모아 놓고 발표도 할 겁니다! 제가 세계수랑 밥도 먹고, 어? 할 거 다했다고 할 겁니다!"
“이비, 내가 설명할 테니 조금만 진정해.”
폭주하는 나를 말린 세스가 요점만 딱딱 짚어서 왕에게 전달했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군."
“네, 폐하! 저희가 먼저 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사람들 모아 놓고 발표하죠!”
“넌 좀 진정해라.”
내 동을 찰싹 때린 왕이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흠, 영원의 뱀이라······. 너무 원시적인 느낌인데. 뭔가 더 그럴듯한 것이 없을까?“
“그러면 새로운 성검의 주인이나 성검의 계승자, 성검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같은 것도 좋습니다.”
나는 희망사항을 듬뿍 담아서 말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왕이 결론을 내렸다.
“성검의 소녀라고 하자.”
“예? 왜죠?"
제 나이가 몇 개인데 왜 소녀죠?
“네 얼굴에 멋진 호칭은 전혀 안 어울린다. 성검의 소녀가 최선이다.”
"······."
차라리 영원의 뱀이 나았을 것 같은데?
“그래, 성검의 선택을 받은 소녀가 마탑의 저주를 물리치고, 마수인 바실리스크를 길들였다. 제법 모양새도 좋고 듣기도 괜찮구나. 이걸로 가자.”
왕은 이번 기회에 그동안의 모든 의혹을 불살라 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고발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나를 성검의 소녀로 포장해서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어, 잠깐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머리에 오른 열이 빠지자 이성과 현실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불린, 제법 좋은 해결책을 내놓았구나.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라."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긴 왕이 빨리 궁으로 돌아가서 무대를 준비해야겠다며 걸음을 서둘렀다.
“폐, 폐하. 무대의 규모는 좀 줄여 주셨으면……. 폐하?”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왕의 뒷모습에 나는 소리 죽여 훌쩍였다.
“세스, 어떡하죠? 제가 사고를 친 것 같아요.”
“이제 진정됐어?”
세스가 울먹이는 나를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수술실 앞에서 같이 까미를 기다릴까?"
"······네. 아, 아나 세스, 폐하한테 부탁드려서 간단한 발표회만 하자고 하면 안 될까요?"
세스의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넘어갈 뻔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탁했다. 세스가 눈을 둥글게 휘며 미소 지었다.
“부탁할 곳이 잘못됐어, 이비. 난 당신이 성검의 소녀로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아니, 왜죠?"
“이유는 딱히 없는데. 그냥 보고 싶으니까?"
우우. ‘그냥’ 공격을 하다니 치사하고 비겁하다.
하지만 나도 멋진 모습을 하고 무대에 선 세스를 보고 싶긴 했다. 그럴 기회가 없을 거라는 게 억울하지만.
“엘마이어 가문에서도 무대를 꾸미는 것에 지원을 해야겠군.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 줄게.”
으악, 제발 참아 주세요. 공작님!
* * *
오랜 기다림 끝에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조금 지친 얼굴의 박사와 백탑주가 걸어 나왔다.
"까미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마나 회로도 정상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당황한 듯 손을 내저은 박사가 백탑주에게 공을 돌렸다.
“백석탑주께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수술 보조는 물론, 치료 마법까지 사용해 주셨거든요. 덕분에 내일이면 까미도 평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우와, 수술한 다음 날 바로 정상이 되다니 . 진짜 마법 만만세다.
"감사합니다! 백탑주!"
“아, 아닙니다. 미천한 제가 이블린 님의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기쁠 뿐입니다.”
백탑주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전이었으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 더 부담스러운 짓을 할 예정인 나는 그를 말릴 수가 없게 되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감싸듯 앞으로 나선 세스가 말했다.
"둘 다 고생이 많았군. 바로 씻고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환자를 봐도 괜찮겠냐?"
"예,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나는 박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까미야."
나는 마취가 풀리지 않아 축 늘어져 있는 까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스가 위로하듯 내 등을 토닥였다.
“곧 깨어날 거야."
마치 그 말을 돌은 것처럼 까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며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안도한 나는 녀석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까미야, 돌아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너 무대에 서야 해. 나랑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