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 *
왕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대영주 회의에서 활약한 이블린에게 하사할 선물을 잔뜩 준비해 뒀는데, 정작 받을 녀석이 출근하지 않은 것이다.
"요 못된 것이 짐에게는 말도 안 하고 결근을 해?"
왕은 이블린에게 먹이려고 가져온 레몬 쿠키를 우적 우적 씹으며 불평했다. 피오나가 왕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대신 변명해 주었다.
"급한 일이 있어 오늘 출근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흥, 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피오나는 왕의 억지를 못 들은 척했다. 입을 삐쭉거린 왕이 한손으로 턱을 괴었다.
"차라리 궁내부의 규칙을 바꿀까? 시녀들은 모두 궁에서 숙식하라고 말이다.”
“지금도 궁에 머무는 자들이 많아 방이 부족합니다."
“그럼 내 개인 공간에 머물게 해야지 마침 봄의 방이 비어 있으니 거기에 이블린을 데려다 놓아야겠다.”
이블린을 보쌈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말이었다.
한숨을 쉰 피오나가 왕을 말렸다.
“폐하, 이블린은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지금도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명색이 내 시녀라는 녀석이 도무지 옆에 붙어 있지 않으니 문제가 아니냐.”
“이블린은 의상부이니 폐하의 옆에 있기는 힘들지요."
이블린을 감싸려고 한 말이었지만, 왕은 거기서 쓸데없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흠, 재롱둥이부 같은 것을 새로 만들까.”
"······예?"
피오나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방울 울렸다.
피오나가 재빨리 벽 쪽으로 다가갔다. 촛대를 잡아 당겨 비밀 문을 열자 왕의 밀정이 서신을 바치고 사라졌다.
서신의 내용을 훑어본 피오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폐하, 적탑의 마법사들이 ‘이블린 하인즈는 바실리스크를 부리는 흑마법사'라는 고발을 넣었다고 합니다.”
* * *
그레이 일족은 세계수를 신으로 모셨다.
그리고 세계수를 수호하는 세 마리의 짐승-영원의 뱀 천둥의 매, 백은의 곰-을 위대한 존재로 받들었다.
그중 영원의 뱀은 다른 존재로 변신해서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는데, 백탑주는 내가 그 뱀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위대한 존재가 아니면 왜 바실리스크가 이블린 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저 오만한 뱀은 영원의 뱀만을 섬기는 종복인데요.”
백탑주는 내가 영원의 뱀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까미는 저한테 신세진 일이 있어서 제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에요. 저희는 주종 관계도 아니에요.”
우린 그냥 복실이의 육아로 맺어진 뜨거운 사이일 뿐이니까.
“제 몸에 깃들었던 일족의 저주는 영원의 뱀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것 역시 위대한 존재뿐이겠지요.”
“그건 그냥 제 능력일 뿐인데요.”
“아아, 역시! 위대한 존재를 빨리 알아보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대답을 대체 뭐라고 해석한 것인지, 백탑주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대환장쇼를 보는 기분 이었다.
"진짜 아니라니까요. 제가 어딜 봐서 뱀이에요?"
“전혀 뱀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전승을 잘 몰랐다면 깜빡 속았을 것입니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예, 알겠습니다. 이블린 님은 평범한 인간이라고 믿겠습니다.”
백탑주는 내 말을 믿는 게 아니라 내가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머리야.”
격정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 혼자만의 비밀로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백탑주가 간절히 나를 올려다봤다. 황금색 눈동자에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면 진짜 이길 수가 없구나.”
결국 나는 백탑주를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래도 까미의 수술엔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다니 다행이었다.
"백탑주를 그냥 쫓아내 버릴까?"
까미의 수술 준비를 돕던 세스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런 일로 까미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제가 백탑주를 속여 먹은 나쁜 놈이 되죠, 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속인 게 아닐 수도 있지.”
“네?”
“사실 당신이 진짜 영원의 뱀이고, 기억을 잃고 인간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어휴, 절대 아니거든요!"
질색하는 나를 본 세스가 작게 웃었다.
“다행이군, 정체를 들켰으니 이제 떠나야겠다고 말할까봐 긴장했어.”
”······세스, 더 이상 백탑주랑 어울리지 마세요.”
백탑주의 착각 병이 옮을까봐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그런 나를 슬쩍 끌어안은 세스가 속삭였다.
“그럼 당신도 백탑주와 어울리지마. 당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당신을 숭배하는 것도 전부 내 권리니까."
아니, 그런 권리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구르르······.
그 순간, 힘없이 늘어져 있던 까미가 눈을 떴다. 재빨리 세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까미야, 괜찮아?"
-구르륵.
“미안해 널 괴롭혔던 사람이 마법사인 줄 몰랐어.”
까미가 백탑주를 공격한 것은 그의 로브 때문이었다. 똑똑한 까미는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마법사의 옷을 기억하고 있었고, 같은 로브를 입은 백탑주를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탑주의 로브를 벗기고 적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자 다시 잠들어 버렸다. 점점 깨어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조금만 참아. 수술하고 나면 전처럼 건강해질 거야."
-구르륵······ 구르르······.
그때 까미가 뭔가를 호소하듯 울었다. 나는 얼른 복실이를 숨겨 둔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복실이는 여기서 자고 있어.”
하지만 까미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뭔가를 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시트로 사용하던 하얀 천을 가져왔다.
“내가 네 미음을 읽어서 여기에 옮길 거야 괜찮아?"
-구륵.
까미의 동의를 얻은 나는 녀석의 콧등에 손을 올렸다. 이런 식으로 힘을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시 집중하자 까미의 생각이 내 손을 타고 올라와 천에 옮겨졌다. 글자가 아닌 그림이었다.
처음 그려진 것은 커다란 뱀이었다. 뱀은 까미보다 더 많은 불과 더 뾰족해 보이는 비늘을 갖고 있었다.
그 옆에 깨알처럼 조그마한 복실이가 그려졌다.
-구르르······.
까미는 커다란 뱀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눈물에 나는 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혹시 복실이의 친아빠야?"
-구륵.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까미 혼자서 복실이를 낳을 수는 없으니까.
"······보고 싶어서 그래? 데려와 달라고?"
고개를 저온 까미가 옆에 있는 조그마한 복실이의 그림을 가리켰다.
“자산이 잘못되면 복실이를 친아빠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있어.”
세스가 까미의 뜻을 해석해 주었다.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절대 잘못될 일은 없어. 박사님도, 백탑주도 최고의 실력자인걸. 그리고 만약의 일이 생기면 복실이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
-구르르 !
까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비, 바실리스크의 수명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 까미는 우리가 사라진 뒤에 복실이가 혼자 남을까 봐 두려운 거야.”
세스의 설명에 갑자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이곳을 떠날 때도 복실이를 꼭 데려갈 생각이었다. 복실이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잘 돌봐 주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다니 ······.
그때 세스가 까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가문은 대대로 이어지지. 엘마이어 가문에서 복실이를 책임지겠다.”
-구르르.
“바실리스크의 영역으로 간다고 해서 복실이가 잘 적용할 거라는 보장은 없어. 차라리 여기에 맡겨 두는 편이 더 안전할거다.”
까미는 세스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던 녀석 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가 여전히 멍하게 서 있는 나를 토닥였다.
"문제가 생겨도 이쪽에서 맡을 거야. 그러니 이제 안심해.”
하지만 복실이를 맡은 것은 내가 아니라 엘마이어 가문이었다. 2 년 후에 내가 이곳을 떠나면 복실이와도 더 이상 만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비?"
“아, 아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고쳤다. 지금은 내 서운함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세스, 복실이 친아빠는 복실이가 태어났다는 것도, 까미가 여기 있다는 것도 모르겠죠?"
“아마 그렇겠지. ”
까미가 이렇게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복실이 친아빠 도 괜찮은 뱀일 듯했다. 어쩌면 짝인 까미가 사라져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셋을 만나게 해 줄 순 없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스가 힘들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당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정말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세스가 웃었다.
“다른 바실리스크들이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까 까미가 회복된 후에 다 같이 만나러 가면 되겠군.”
“우, 우와!"
나는 펄쩍 뛰어 세스에게 매달렸다.
"진짜 멋있어요! 세스 최고! 정말 좋아해요!"
움찔한 세스가 슬쩍 눈을 피했다. 그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지금 뽀뽀하면 어지럽겠지? 그래도 하고 싶은데.
-구르르르······.
세스를 보며 침을 삼키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까미가 기대에 가득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까미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수술 받고 건강해지면 복실이 친아빠를 만나러 갈 수 있어 그러니까 힘내야 돼 알겠지?"
-구륵!
까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눈이 전처럼 반짝거렸다.
잠시 후 박사가 찾아와서 수출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까미는 뱀이 그려진 천과 복실이가 잠들어 있는 바구니에 머리를 비빈 다음 수술을 받으러 들어갔다.
왕이 찾아온 것은 그 직후였다.
“이블린, 바실리스크를 당장 처리해야 한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