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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92화 (92/240)

92화

내가 가진 백탑주에 대한 이미지는 꽤 여러 번 변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아파도 남을 돕는 착한 사람, 그런데 사회생활은 안 해 봄.’이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주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약혼자가 있는 나한테 치근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했다.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내가 만남을 거절하니 ‘당신을 제 고향으로 데려가겠습니다!'라는 협박 편지가 날아 왔다. 나로서는 웬 스토커냐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백탑주와 마주한 나는 ‘이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일까?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백탑주는 굉장히 무해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피부. 동그랗고 순한 황금색 눈동자. 뾰족하게 위로 올라간 커다란 귀.

흔히 ‘그레이’라고 부르는 이종족이라는데, 그래서인지 하얀 노루나 물에 젖은 습자지가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이성은 ‘정신 차려! 저 사람은 스토커야!'하고 외치고 있었지만, 감성은 ‘오-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은 걸?'하고 속삭였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물었다.

“저 , 진짜 백탑주세요?"

"예? 네, 네! 제가 백탑…… 클럭!"

급하게 대답하려던 백탑주가사레가 걸린 듯이 쿨럭 쿨럭 기침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창피한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괜찮으세요? 물이라도 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백탑주는 자괴감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죽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타고난 성격 자체가 소심한 편인 것 같았다.

‘뭐지? 진짜 오해가 있었나?'

나는 어리둥절해서 백탑주를 바라봤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할 순 없다지만, 뜬금없이 납치 예고장을 보내는 정신 이상자로는 안 보였다.

내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인 백탑주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런 걸 보면 조금 귀여운 것도 같고.

“이비.”

그때, 옆에 서 있던 세스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너무 뚫어져라 백탑주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전 이불린 하인즈예요. 전에도 한 번 뵌 적이 있었죠?"

"······아.“

선을 긋는 내 인사에 머뭇거리던 백탑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편지로 몇 번이나 인사하셨잖아요. 더 이상의 감사는 필요 없습니다.”

“······.”

아니, 왜 울려고 하는 거야. 당신 마탑의 최고 권력자잖아. 왜 부들부들 햄스터처럼 구는 건데!

“이, 일단 자리에 앉으시겠어요?"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서둘러 의자를 권했다. 뭔가를 호소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백탑주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공작님도 어서 앉으세요.“

눈치껏 내 옆자리를 가리키자 무뚝뚝한 얼굴로 서있던 세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주 도발적인 시선을 백탑주에게 던졌다.

으악, 귀여운데 창피하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세스의 옆에 앉자대기 중이던 시녀장이 치를 따라 주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잠시 어색한 침목이 흘렀다.

"저,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놀라셨죠?"

“아닙니다. 이렇게 연락을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기뻐서 죽을 것 같습니다······.”

"차! 차 드세요! 차가 식겠어요!"

다시 울먹이는 그를 보고 당황한 나는 차에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 마탑주가 양손으로 찻잔을 들고 치를 홀짝였다.

나는 그가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제가 편지를 보낸 건 백탑주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예요.”

"예, 무슨 일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 영혼을 바쳐서라도 꼭 해내겠습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백탑주가 황금색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부담감’이라는 말을 사람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백탑주를 구해 드린 일에 대한 감사는 충분합니다. 저는 마탑에서 많은 선물을 받았고, 더 이상의 대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

“저는 지금 의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독한 마음으로 내뱉었다. 이번엔 백탑주가 부들부들 떨든, 눈물을 홀리든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쪽도 아니었다. 백탑주는 마치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받은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잠시라도 좋습니다. 제게 설명할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세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설명이 필요한 일인가? 그렇게 하겠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 같은데.”

"······당신! 역시 당신 짓이군!"

“내가 뭘 했다는 거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으나, 울컥한 백탑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스치면 죽는 개복치처럼 생겨선 뭘 믿고 우리집 에어컨에게 덤비는 거야.

나는 유혈 사태가 터지기 전에 얼른 세스의 팔을 잡았다. 움찔한 세스가 나를 돌아봤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듣게 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해 . 저자 때문에 당신이 힘들었던 건 사라지지 않아.”

“그래도 이대로는 이야기가 안 끝나잖아요. 딱 5분이면 돼요. 네?”

“하······."

못마땅한 듯 이마를 문지른 세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관 모습이 왠지 온몸으로 삐졌다는 티를 내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나는 여전히 엉거주춤 서 있는 백탑주를 향해 한 손을 쫙 펼쳐 보였다.

"들으셨죠? 자, 지금부터 5분입니다. 빨리 말해 주세요!.“

백탑주의 이야기는 간단히 줄여서 이런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오직 진실한 사랑으로만 풀 수 있는 저주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저주를 풀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한 사랑이다.

아주 훌륭한 삼단 논법이었다. 문제는 결론이 완전히 틀렸다는 거지만.

“그러니까, 제가 ‘진실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편지를 보내신 거군요.”

”······네.”

백탑주는 수줍음과 기대와 두려움이 범벅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와서 이상하게 굴었던 것 역시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에 나온 긴장감이었던 모양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온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일단,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제가 저주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푼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

"저는 저주를 푼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곳으로 옮긴 거예요. 그리고 그걸 처리한 사람은 공작님이세요.”

내가 백탑주의 몸에서 뽑아낸 저주는 거대 지네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 지네는 세스의 손에서 멋지게 두 조각이 났다.

다시 말해 백탑주의 진실한 사랑은 세스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서 생략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 제대로 전달된 것 같았다.

“이비, 당신 논리에 좀 비약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제 생각엔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저주를 다른 곳에 옮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 싸우던 두 남자가 갑자기 연합을 할 기세였다.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 그걸 말하려고 했어요. 저주를 옮긴 사람도 저 혼자가 아니에요. 둘이나 더 있답니다.”

"······예?"

"근위 기사대의 휴즈 경과 도튼 경이요. 둘 다 아주 멋진 분이니까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해요.”

백탑주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갑자기 진실한 사랑 후보가 넷으로 늘어나서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제가 소개해 드릴 테니 일단 휴즈 경과 도튼 경을 만나 보시는 게 어떨까요. 보자마자 첫눈에 ‘바로 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잖아요.”

“······.”

“저나 공작님을 만났을 때는 ‘앗, 이 사람이다!'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잖아요. 아직 안 만나 본 사람과도 시험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비, 그만 너무 불쌍하잖아."

왠지 침묵하는 백탑주 대신 세스가 나를 말렸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다행히 백탑주는 우리 넷 중에서 진실한 사랑을 찾는 것을 포기해주었다.

"······정식으로 풀린 저주가 아니니 굳이 의미를 둘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초점이 없는 눈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본인이 납득했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저기, 저주에 대한 것 말인데요. 제가 말씀드린 것을 다른 사람에겐 알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비밀로 하고 있거든요.”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제 마나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밀을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실한 사랑을 포기한 백탑주는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해'로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을 사과하며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조금 전에 세스가 내뱉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 과하며 내가 힘들었던 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사실 봐주셨으면 하는 환자가 있어요. 급하게 수술이 필요한대 생명을 다루는 빛 계열 마법사의 힘을 빌려야 되는 상황이라 편지를 보낸 거였어요.”

“그런 문제라면 확실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탑주의 동의를 얻은 나는 그를 데리고 온실로 향했다. 그런데 진통제를 먹고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까미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비!"

순간 세스가 내 몸을 확 잡아당겼다.

거의 동시에 백탑주가 하얀 방패 막을 펼쳤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검은 기동 같은 것이 거기에 쿵 부딪쳤다.

-크캬각!

온몸의 비늘을 곤두세운 까미가 백탑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침착한 얼굴로 까미에게 지팡이를 겨눈 백탑주가 하 빛의 꽃을 피워 냈다.

“안 돼!"

나는 온 힘을 다해 세스의 손을 뿌리치고 까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백탑주에게 달려들던 까미가 급하게 정지했다. 흥분으로 곤두선 비늘이 절그럭거릴 정도였다. 백탑주의 빛의 꽃 역시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괜찮아. 착하지?”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까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곤두선 비늘이 점점 가라앉더니 평소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때였다. 지팡이를 움켜쥔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백탑주가 내게 물었다.

“맙소사, 시엘룬이시여. 이블린 하인즈 님, 당신은 위대한 존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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