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 *
그 시각, 세스는 마차 안에서 이블린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림자 기사는 이블린이 얼마나 당당한 태도로 귀족들을 꾸짖었는지, 어떻게 각서를 쓰게 했는지 선이 나서 이야기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세스는 마지막에 이블린이 실망해서 훌쩍였다는 소리를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아가씨께선 끝까지 잘 싸우셨습니다. 총관 어르신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블린을 옹호한 기사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세스는 보고받은 내용대로 이블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이번엔 내가 빠져 주는 쪽이 나올 테니까.’
그가 나서면 엘마이어 공작이라는 후광에 짓눌려 이블린의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저 북부를 돕고 싶어요. 그리고 할 짓이 없어서 전쟁이나 일으키려는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어요!
세스는 이블린이 원하면 얼마든지 북부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가 전쟁을 통해 쌓아 올린 부는 귀여운 약혼녀가 아무리 펑펑 써도 바닥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그는 이번 기회에 이블린에게 자신의 재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다른 귀족들이 한 푼도 내지 않는 꼴이 보기 싫다고 했다.
-다 내면 호구 같아 보이잖아요. 전부 내겠다고 생색낸 후에 마구 자존심을 긁어서 뜯어내야죠.
세스는 이블린의 도발이 실패할 경우 북부의 모든 지원을 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블린은 보란 듯이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켰다.
대체 어떤 식으로 귀족들을 긁어 댄 것인지 구경고 싶을 정도였다.
-주군, 산입니다.
그때 또 다른 그림자 기사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산은고용인으로 위장해 프리지어 궁에 머물며 위급한 문제를 처리하는 기사 중 하나였다.
-어미 바실리스크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켄트 박사가 지금 진료 중입니다.
"심각한 문제인가?"
-요즘 계속 활동이 줄고 있었습니다. 최근 늘어난 암살자를 처리하며 무리를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미 바실리스크는 자신의 새끼와 이블린을 지키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인간들에게 경비를 맡겨 두는 것이 불안했는지 밤마다 정원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듣지 않더니, 결국 탈이 난 모양이었다.
“일단 돌아가서 상태를 확인하지.”
-예, 주군.
그리 좋지 못한 소식에 세스는 이미를 짚었다.
‘그녀가 들으면 속상해하겠군.’
이블린은 두 마리의 바실리스크를 무척 아꼈다. 어미 바실리스크에게도 까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세심하게 돌봐 줄 정도였다.
까미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블린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었다.
그때 밖이 웅성거렸다. ‘아가씨!’라고 반기는 소리에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달칵 문이 열렸다.
“세스!”
활짝 웃는 이블린의 모습에 공기까지 환해지는 것 같았다. 세스가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이블린이 마차에 오르자마자 낚아채듯 안아서 품에 넣었다.
“헤헤, 제가 다 발라 버리고 왔어요!"
흥분으로 볼이 빨개진 이블린이 신나서 자랑했다.
세스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움찔한 이블린이 조금 어지러운 듯 그의 품에 기댔다.
그래도 자랑을 포기하진 못하겠는지 그의 옷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아까 저 좀 멋있었는데, 진짠데······.”
"알아."
가슴이 저릴 정도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도 1할은 지키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어요. 7푼 가지고는 어디 가서 생색도 못 내겠다."
재잘거리는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아무리 의도했다고 해도 자신의 몫을 조금씩 빼앗기는 경험은 썩 기분 좋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잘했어 분명 폐하도 기뻐하셨겠지.”
대영주들이 서로 북부를 지원하겠다고 싸워 대니, 왕이 얼마나 신이 났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이블린은 본의 아니게 왕의 호감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이제 왕이 그녀를 보쌈해 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역시 세스는 내 편!"
이블린이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품에 뺨을 비볐다. 세스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영주들이 당신에게 고약하게 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좀 혼내 줄까?"
“제가 다 발랐다니까요? 그리고 세스에게 당한 사람들이 울면서 북부 지원을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이블린은 진심으로 북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 계획을 세울 때 가장신경 쓴 부분도 북부사람들이 빠르고 확실하게 식량을 받는 것이었다.
“그쪽은 걱정할 필요 없어 당신이 애쓴 덕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야.”
"잘됐어요. 배고픈 건 진짜 서럽거든요.“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이블린이 그의 품에서 꼼지락 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세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블린이 이렇게 과거의 결핍을 입에 담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녀를 학대한 자들, 대가도 치르지 않고 태평하게 죽어 버린 놈들을 살려 내 철저하게 짓밟고 싶었다.
거칠어지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세스는 이블린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부터 많은 일을 겪었으니 몸이 약한 그녀에겐 꽤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쉬어. 도착하면 깨워 줄게.”
"네에.”
안심한 듯이 눈을 감은 이블린이 곧 새근새근 숨을 내쉬었다.
세스는 그녀가 좀 더 편히 기댈 수 있게 고쳐 안았다. 그러다 넓은 소매가 밀려 올라가며 하얀 팔에 찍힌 멍이 드러났다.
"······."
세스는 분노로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냉정한 그의 머리는 범인이 누구인지 빠르게 추측해 나갔다.
‘프림로즈 후작이 팔을 잡았다고 했지.'
아침 알현 직후, 멧돼지처럼 달려온 후작이 이블린의 팔을 잡아끌고 가려다 의상부 시녀들과 몸싸움을 벌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건 ‘잡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고통을 주려고 작정한 손자국이었다.
이걸 단순히 잡았다고 보고한 그림자 기사는 처음부터 다시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후작은 오래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이비, 친구가 새로운 후작이 되면 당신도 기뻐할까?"
세스는 이블린이 깨지 않도록 가만가만 속삭였다.
우웅 하고 몸을 뒤척인 이블린이 갑자기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사납게 타오르던 세스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잠든 약혼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 * *
돌아오자마자 까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온실로 급히 달려갔다.
까미는 커다란 몸을 돌돌 말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에서 공작가의 주치의인 켄트 박사가 의학서를 뒤지는 중이었다.
내가 온실로 들어가도 까미는 눈을 뜨지 않았다. 평소의 예민함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는 까미의 옆으로 다가가 단단한 뺨을 어루만졌다. 그제야 눈을 떠서 나를 본 까미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까, 까미야 어디가 아픈 거야? 응?"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녀석을 쓰다듬었다. 심상찮은 모습에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쉿, 괜찮을 거야 진정해.”
세스가 나를 다독이며 복실이를 품에 안겨 주었다.
-뿌?
내 불안감을 느낀 복실이가 머리를 왔다 갔다 흔들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복실이를 봐서라도 정신 차리자. 까미가 아프면 내가 낫게 해 주면 돼.’
지금 내겐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도와줄 인력도 있다. 처음부터 겁을 먹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가씨,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때, 박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까미와 복실이를 힐끗 본 다음 덧붙였다.
“잠깐 밖에서 뵐 수 있을는지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까미를 위한 배려였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실아, 잠깐 까미랑 같이 있어.”
나는 복실이를 까미에게 붙여 주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림자처럼 따라온 세스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박사님, 까미 상태가 많이 안 좋나요?"
“지금으로선 수술이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수, 수술이요?"
갑자기 수술이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까미가 예전에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서 실험을 당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고요. 내버려 두면 더 버티기 힘들 겁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입술을 깨문 나는 박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박사님, 그럼 수술하면 살 수 있나요?"
“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게요.”
그러자 박사는 세스의 눈치를 힐끗 봤다.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빛 계열에, 꼬인 마나 회로를 풀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여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그가 왜 자꾸 꽈배기처럼 말을 꼬는지 눈치겠다.
“혹시 백탑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박사는 차라리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꼬인 마나 회로는 마법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백탑주 정도의 빛 마법 사용자를 구해 오셔야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요.”
박사는 할 말 다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 같았다.
“그럼 백탑주에게 부탁해야죠. 아니면 까미가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예?"
“이비, 괜찮겠어?”
아니, 애가 숨이 넘어가고 있는데. 백탑주가 아니라 백탑주 할아비라도 불러야지!
“당연히 괜찮죠. 설마 세스가 옆에 있는데 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사실 조금은 무섭지만······ 까미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격정하지 마세요. 백탑주가 수작을 부리면 제가 한 방에 날려 버릴 테니까요.”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음 날, 연락을 받고 찾아온 사람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블린 하인즈 님. 저는 백탑주인 히페리온이라고 합니다.”
로브 쓴 붕대남은 어디 가고, 하얀 노루 같은 남자가 겁먹은 것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이걸 때리면 내가 폭행죄로 끌려가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