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자네, 눈을 왜 그렇게 뜨나?"
이블린의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지금 감히 엘마이어 공작 전하의 대리이신 우리 아가씨를 깔본 건가?"
“아, 아닙니다!"
기사가 펄쩍 뛰며 부정했다. 눈을 가늘게 뜬 노인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뭐 하고 있나. 당장 안에 들어가서 아가씨께서 오셨음을 알리게”
"예!“
기사는 저도 모르게 경례를 붙인 다음 회의실 안으로 뛰어 들었다.
이블린이 걱정스럽게 노인을 바라봤다.
"총관 할아버지, 갑자기 회의에 끼어들려고 한다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진 않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히 아가씨의 앞을 막는다는 것은 엘마이어 가문 전체와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총관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블린은 신뢰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기사가 나타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폐하께서 두 분을 안으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기사는 이블린을 위해 회의실의 문을 활짝 열어 주기까지 했다. 감사의 미소를 보낸 이블린이 또박또박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은 왕의 자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왼쪽은 흔히 전쟁 귀족이라고 불리는 동부와 남부의 대영주들이, 오른쪽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서부와 중앙의 권력자들이 자리했다.
노련한 귀족들은 또박또박 걸어 들어오는 이블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흐음, 저 아가씨 인가."
“생각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그들의 시선은 불쾌감과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나이 많은 귀족일수록 자신들의 영역에 불쑥 끼어든 젊은 아가씨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야유나 희롱을 던지지 않은 것은 이블린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총관 때문이었다.
‘늙은 생강이 다시 궁으로 돌아왔군.’
엘마이어 공작 가문의 총관인 버나드는 과거 두 명의 선왕을 모신 왕실 시종장이었다. 당연히 명문가 출신이었으며, 중앙에 가진 권력도 막강했다.
대영주들도 괜히 그를 건드려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블린에게 불쾌한 시선을 던지는 정도로 선을 지켰다.
반면 이블린에게 호감 어린 눈빛을 보내는 쪽도 있었다. 러셀 백작이 있는 동부 귀족 연합이었다.
특히 러셀 백작은 이블린을 옆에 앉히기 위해 자리 룰 정리시키기까지 했다. 아직 어리고 순진한 이블린이 늙은 너구리들에게 물어뜯기기 전에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엘마이어 공작 대리, 이블린 하인즈가 국왕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회의 참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의 앞에 멈춘 이블린이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왕은 ‘이 녀석이 또 뭐 하는 짓이지?’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래, 이블린 갑자기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
"송구하오나, 이곳에 계신 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게 되었습니다. 제 발언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너무 긴 발언만 아니라면 괜찮다.”
왕의 허락에 감사를 표한 이블린이 회의실에 모여 앉은 귀족들을 둘러봤다.
"여러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생긋 미소 지온 그녀가 한 손으로 치마를 쥐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귀족들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회의는 이제 끝났으니 이만 나가 주세요. 북부의 지원은 엘마이어 공작가에서 전부, 모두, 전적으로 지원할겁니다."
"······."
“자, 출구는 저쪽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폐하와 북부 영주님과 셋이서 하고 싶으니 빨리 퇴실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블린이 자신이 들어온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귀족들은 모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블린."
서부 귀족들이 발작하기 전에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엘마이어 공작가에서 북부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실에서 북부 지원의 4할을 맡을 예정이기 때문이지."
원래 왕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은 5할이었으나, 은근 슬쩍 4할로 깎은 왕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럼 공작가에서 6할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블린은 언제 건방지게 굴었냐는 듯 깍듯하게 말했다. 왕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공작에게 허락은 받은 것이냐?"
“그럼요, 공작님께 연락해서 말씀드렸더니 제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셨어요. 좋은 일에 쓴다고 칭찬도 받았는걸요.”
생긋 웃은 이블린이 귀족들을 쭉 훑어보았다.
"솔직히 여기 계신 분들은 북부를 지원하기 싫으시잖아요? 사람이 굶고 있다는데 회의네, 어쩌네 하면서 시간 끄는 것도 좀 없어 보여요. 그냥 저한테 전부 맡기세요.”
이블린이 북부 지원을 전부 책임진다고 했지만 벌떡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그러고 싶어도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과 귀족의 체면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대놓고 비웃음까지 당하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는 북부랑 친구가 되어서 좋고, 여러분은 돈을 안 써서 좋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죠?"
대놓고 북부와 연합하겠다는 말에 중앙 귀족들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알현 때 이블린이 북부의 편을 들어서 어깃장을 놓지 않았는가.
‘북부와 엘마이어가 연합하면 제어하기 쉽지 않다. 어떻게든 둘을 쪼개 놓아야 한다.’
두 세력을 이간질해서 원수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을 이끌어야 할 프림로즈 후작은 갑자기 쓰러져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없으니 손발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폐하, 이렇게 시건방진 소리를 저희가 언제까지 참아 줘야 합니까! 이것은 모든 귀족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제일 먼저 벌떡 일어선 것은 서부 귀족 쪽이었다. 부들부들 떠는 그를 보고 한쪽 귀를 후벼 판 이블린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여기서 제일 먼저 나가셔야 할 것 같은 분인데?"
그러면서 곁눈질로 옷차림을 슬쩍 살핀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백했다. 너 돈 없잖아.
그 순간, 러셀 백작은 전장의 뿔피리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블린의 도발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귀족이 왕을 향해 소리쳤다.
“폐하! 신에게도 북부를 지원할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지금부터 가문의 모든 상단을 동원해 북부에 식량을 지원하겠습니다!”
“지원 식량은 전량 밀! 당장 필요한 물량 일주일 안에 북부에 배달 가능! 생필품 지원 2주 안에 조달 가능! 3개월 안에 북부를 정상화시켜 보이겠습니다!"
이블린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선 총관이 그녀가 말한 사실을 종명하는 서류를 왕에게 건넸다.
“이 정도 능력 없으면 빠지세요. 어딜 어중이떠중이 가끼어들려고.”
이블린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크리티컬을 맞고 휘청거리는 서부 귀족을 부여잡은 중앙 귀족이 속삭였다.
“우리 연합합시다. 여기서 저 못된 것의 기를 꺾어 놔야합니다.”
사실 귀족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자존심을 꺾고 물러나든가, 아니면 싸우든가뿐이었다.
그런데 엘마이어 공작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 때문에 자존심을 꺾고 물러난다면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수가 없을 것이다.
서로 서로 손을 잡은 귀족들이 반격에 나섰다.
"허허허, 잊으셨나 본데 저희 남부에는 배가 많습니다. 참 공교롭게도 곡창 지대가 바로 옆에 붙어 있군요. 마침 밀이 남아돌던 참인데, 이번에 북부에 한번 쏟아부어 보죠.”
"동부에 마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려야겠군요. 일주일? 저희는 지금당장북부에 식량을 옮길 수 있습니다."
“폐하, 저희는 밀의 생산보다 잡곡의 생산이 더 많습니다. 잡곡도 받아 주신다면 3배로 더 내겠습니다.”
갑자기 회의는 누가 더 많이 북부를 지원해서 이블린의 지분을 뜯어 가냐로 변했다.
결국 왕실이 3할, 남부와 동부 연합이 3할, 서부와 중부 연합이 3할, 나머지 귀족들이 1할을 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블린의 몫은 1할 중 고작 7푼 5리였다. 처음 6할을 불렀던 것치고는 초라한 성적이었다.
"폐하, 저는 지금 당장 제가 말한 모든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말로만 하고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이블린이 자신의 몫을 더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가 술술 풀려서 기분이 좋아진 왕이 그녀를 자애롭게 다독거렸다.
“이블린, 이건 대영주 회의다 이곳에서 나온 결과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험험, 자꾸 저희를 모욕하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내심 속마음을 찔린 귀족들이 헛기침을 했다. 이블린이 눈을 부릅뜨고 주장했다.
”폐하, 송구하오나 저는 세상에 반드시라는 것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지키겠다는 각서라도 쓰게 해 주십시오!"
“아니, 각서는 무슨…….”
“졸리면 지금이라도 빠지시든가!"
결국 귀족들은 이블린의 주장대로 각서를 쓰게 됐다.
‘처음 계획으로는 왕실이 5, 우리가 1을 낸다고 말하고 시간을 끌 생각이었는데······.’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3할이나 내게 되다니.'
귀족들은 상실감에 빠져 회의실을 나갔다. 가끔 이블린 쪽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총관에게 기대서 훌쩍거리는 그녀에게 감히 다가가진 못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졌지만 잘 싸우셨습니다."
이번 일이 이블린에게 좋은 교재가 될 거라 생각한 총관만 흐뭇한 얼굴이었다.
“폐하, 저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그리고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변경백이 왕에게 물었다.
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짐의 하나뿐인 귀염둥이지. 엉뚱한 일만 하는 것 같지만, 저 녀석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 잘 풀린다네.”
“그렇습니까?"
변경백은 아직 구원의 샛별을 만났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