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무슨 일 있어요?"
머뭇거리던 카밀라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왕이 입을 옷과 보석을 체크한 카탈로그였다. 내용을 확인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2주 전의 카탈로그네요.”
전에도 한 번 카탈로그를 잘못 들고 왔던 것 같은데? 의심스러워하는 내 시선에 카밀라가 억울해했다.
"입궁하자마자 카탈로그를 확인했어요. 그땐 분명 오늘 날짜였다고요!"
“맞아요. 저도 옆에서 봤어요.”
뜻밖에도 다이애나가 카밀라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럼 오는 도중에 카탈로그가 바뀐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침실부에서 좀 도와 달라고 불러서 잠시 자리를 비웠거든요.”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누군가가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카탈로그를 바꿔치기한 모양이다.
다시 카탈로그를 받아 오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제 시간에 옷을 준비하지 못해서 왕의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쪽의 의도대로 따라 줄 생각은 없거든.'
이쪽도 보고 관리관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단 말이야.
“이든 양, 카탈로그 내용이 어떤 건지 생각나요?"
“어, 정확하게는 잘…….”
“제일 처음 부분만 기억해 봐요. 성스러운 유스티나의 초상이 새겨진-이었어요, 아니면 하얀 태양과 사자가 그려져 있는-이었어요?"
“유, 유스티나?"
카밀라가 자신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때, 옆에서 다이애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티나가 맞아요. 제가 분명히 봤어요.”
흠, 그렇군. 문제는 해결됐다. 오늘 나가는 것은 정복 왕 세트다!
보고를 관리하게 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피오나가 알려 준 필수 보물들을 열 가지 세트로 묶으면 일일이 위치를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왕실의 공식 행사는 워낙 고루해서 했던 것을 또 하고 입던 것을 또 입었다. 그래서 보고의 보물이 백만 개가 있어도 항상 쓰던 보물만 주구장창 썼다.
예를 들어 건국 기념행사엔 정복 왕 세트, 황금 사자 세트, 천공신 세트로 돌려 막기를 했다.
기존 세트에서 반지 하나만 바뀌어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수군거리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대로 가는 편이었다. 덕분에 외우는 내 입장에선 매우 편했다.
자주 쓰는 세트들은 같은 자리에 모여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짝을 맞춰 가져가면 끝이었다.
‘정복 왕 세트라면 쉽지 반지까지 해서 3분 컷이 다.'
나는 자신 있게 카밀라를 위로했다.
“괜찮아요. 뭐가 필요한지 제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 까 바로 가지고 나올게요.”
“저, 정말?"
“그래도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해 주세요. 알겠죠?"
"응. 아니, 네! 명심하겠습니다!"
카밀라가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열정적으로 답했다.
이런 걸 보면 진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손을 누군가 덥석 잡았다. 귀신처럼 창백한 안색의 마리아였다.
"안 돼.”
"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당선, 내 말을 믿어요?"
“······네?"
“내가 이번 일이 함정이라고 하면 믿어 줄 건가요?"
"함정이라니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마리아가 손을 놓아버렸다.
“아니, 내가 당신이라도 못 믿을 거예요. 잊어버려요.”
"마리아.”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내게 아무 능력 이 없었으면 마리아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의심했을 것 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감정은 혼란과 걱정, 그리고 간절함이었다.
“그러지 말고 말을 해 봐요. 왜 제가 안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
그래, 내가 너를 엿 먹이고 너랑 좀 싸우고 네 오빠를 실직자로 만들긴 했지. 그래도 나는 네 말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단다.
“마리아, 우리는 한 팀이잖아요. 전 당신이 무슨 짐을 지고 있든 같이 짊어질 수 있어요.”
“정말······?"
마리아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가진 짐이 버거워 휘청거리는 얼굴이었다.
“당연하죠. 제가 누군지 몰라요?"
자신만만하게 씩 웃자 마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신은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인정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가 필요하잖아요.”
그녀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너무 세게 잡는 바람에 손톱이 파고들어 아팠지만 애써 여유롭게 웃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마리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해 줄 것 같으니까.”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늘 입궁한 발타자르 변경백은 온갖 수모를 겪게 될 예정이었다.
예를 들어 건방진 시종이 멸시하는 시선을 보낸다든 가, 엉뚱한 대기실로 안내받는다든가, 일부러 치를· 쏟는다든가,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되 어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든가.
사소하지만 짜증나고 뭐라고 따지기도 힘든,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괴롭힘.
“그리고 폐하께선 발타자르 변경백이 무슨 목적으로 수도로 왔는지 떠보실 거예요. 그가 정말 식량을 원해서 왔는지, 아니면 식량은 핑계고 전쟁이 목적인지.”
하지만 변경백은 잔뜩 괴롭힘을 당해서 찌증이 난 상태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과거 북부를 정벌한 군주 의 옷을 입은 왕이 등장해서 자신을 시험하는 말을 한다면······.
“썩 좋은 반용을 보이진 않겠네요.”
“그럼 그걸 빌미로 변경백이 역심을 품고 있다는 주장이 더 거세질 거예요.”
북부를 싫어하는 사람, 제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게 싫어서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이 모여서 여론이 형성되면 왕이라도 그걸 뒤집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러다가 욱한 변경백이 들고 일어나면 어쩌려고요?"
“그럼 그들의 주장이 현실이 되겠죠.”
결국 변경백이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식량도 주지 않고 계속 콕콕콕 찌르겠다는 뜻이었다. 누가 생각했는지 참 치졸하고 재수 없는 계획이었다.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은 전쟁을 바라는 건가요?"
“정확히는 북부의 우두머리를 바꾸길 원해요. 자신이 잘 알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변경백을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울 속셈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 내가 끼어들 자괴가 있는 건가?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때, 마리아가 날벼락 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하인즈 양, 당신은 이번 분쟁을 일으킨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게 될 거예요.”
"네? 제가요?"
"당신은 자신의 판단으로 북부를 정벌한 군주를 상징하는 옷을 왕에게 갖다드리려 했죠. 그것만으로도 이번 사태를 일으킨 원인 제공자가 될 수 있어요.”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곧 현실을 깨달았다.
오늘 왕의 옷이 정복 왕 세트라고 지정한 카탈로그는 이미 바꿔치기 당해서 사라졌다. 내가 위쪽의 지시에 따라 옷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없어진 것이다.
"상대는 당신이 곤란을 쉽게 벗어날 정도로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덫을 놓았죠.”
마리아의 지적대로였다. 그녀가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정복 왕 세트를 가져가서 왕에게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말엔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누군가 음모를 꾸몄다는 말도 그저 내 주장일 뿐이죠. 지금은 그저 카탈로그 하나가 없어진 것뿐이니까요.”
그러니 믿지 않아도 좋다고, 마리아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나는 모든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믿어요. 마리아"
“······.”
“그런데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아니까 더 궁금해졌어요. 왜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나는 음모에 빠져서 곤란해졌을 텐데. 나와 원수나 다름없는 관계인 마리아가 이렇게 도와주는 게 이상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당신을 돕는 게 아니에요. 왕국을 수호하는 가문, 프림로즈로서의 내 긍지를 따르는 거예요.”
자존심 강한 귀족 아가씨가 고결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네요. 까짓거 전쟁 한 번 밖아 보죠.”
* * *
공식적인 행사에서 왕의 의상은 이렇게 급하게 정해 지지 않는다. 적어도 사홀 전에 결정해서 의상부에 알려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엔 유독 결정이 늦었다. 이리저리 알아보던 피오나는 정복 왕 세트나 복부의 전통 의상 중 하 나로 결정될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정복 왕 세트는 전쟁을 바라는 놈들이, 복부 전통 의상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고른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져가야 하는 옷은 ‘하얀 태양과 사자가 그려져 있는 북부 전통 예장’이다.
-꾸!
그때 주머니 속에서 복실이가 울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나는 복실이를 꺼내 줄 틈이 없었다.
“미안해, 복실아! 조금만 기다려!"
보물의 위치를 기록해 둔 책은 거대했다. 책장을 펄럭펄럭 넘긴 나는 하얀 태양이 는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북부 전통 예장의 위치를 메모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자주 쓰지 않는 예복은 보통 세트로 보관하지 않는다. 만약 액세서리를 일일이 찾아야 한다면 제시간에 맞추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생각은 나중에 일단은 움직이자!'
하지만 서둘러 돌아서던 나는 발이 꼬이는 바람에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넘어질 때 복실이가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복실아, 괜찮아?"
급히 주머니를 더듬은 나는 깜짝 놀랐다. 주머니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복실아?”
-꾸!
바로 앞에서 들려온 대답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보고에서 짐을 옮길 때 쓰는 카트가 내 앞으로 스르르 굴러왔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얼굴의 복실이가 카트 위에 앉아있었다.
-꾸우!
나는 북부의 전통 예장과 그와 짝이 되는 액세서리 들이 모두 담긴 카트를 멍하게 쳐다봤다. 이런 기특한 일올 할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