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 *
그 시각, 왕은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천공신의 나라, 아스트리아의 왕이여. 회색 산맥의 다섯 번째 장로인 메티스가 인사드립니다.”
새하얀 백발과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피부. 아몬드형의 눈과 황금색 눈동자. 성별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
흔히 ‘그레이’라고 불리는 이종족이었다.
회색 산맥에 숨어 사는 그레이들은 인간보다 몇 배는 긴 수명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워낙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워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회색 산맥에서 온 방문지들이여, 나의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왕은 그리 탐탁찮은 얼굴로 메티스와 그를 따라온 자들을 바라봤다.
"백탑주에게서 대강의 사정은 들었네. 내 시녀인 이블린 하인즈를 데려가길 원한다고?"
직설적인 왕의 말에 메티스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일족의 아들인 히페리온을 오랜 저주에서 풀어 준 은인을 뵙고, 회색 산맥으로 모셔 가는 것이 저희의 목적입니다.”
백탑주가 이종족이라는 것은 왕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 이었다.
‘붕대로 전신을 휘감고 다니니 알 리가 있나.'
아무리 천재라고 하나 탑주가 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비밀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왕국을 방문해도 상관없을 터 그런데 이렇게 몰래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왕이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메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 인간의 왕이 화합의 룬을 파괴하여 영원한 동맹을 끝낸 일이 있었지요. 저희는 그때부터 일족의 율법으로 인간과의 교류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지고왕의 마지막 자손, 배반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군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 전설에 불과하네.”
“저희 에겐 전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기나긴 수명을 가진 종족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왕은 별 감홍 없이 말을 받았다.
“다시 말해 율법을 어기고 찾아올 정도로 이블린을 데려가야 하는 사정이 있다는 말이로군.”
메티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동족의 손에서 받아 든 상자를 천천히 열어 보였다.
순간 천상의 향기 같은 것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맡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고 온몸이 정화되는 것 같은 청량한 냄새였다.
“정령수의 열매입니다.”
상자 안에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은빛의 열매가 들어 있었다. 압도적인 향기는 그 열매에서 나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먹으면 수명을 늘려 주지만, 기사나 마법사에겐 한계를 넘게 해 주는 보물이죠. 이것이 저회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입니다.”
정령수가 모두 불타사라진 지금, 그 열매는 감히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했다.
왕이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블린을 데려가고자 하는 그대들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겠다.”
메티스가 기대 어린 눈으로 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왕의 손은 상자의 뚜껑을 탁 닫았다.
“그러니 이제 정식으로 사절을 보내도록. 회색 산맥의 전면 개방, 교역품을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교류 목적 정도가 좋겠군.”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에 메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왕은 당연하다는 듯 상자를 밀어내며 웃었다.
“이런 열매 따위, 내 귀염둥이와 바꾸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그러니 협상을 하려면 좀 더 그럴싸한 제안을 갖고 오도록.”
* * *
마리아 프림로즈는 소란을 듣고 방 밖으로 나왔다.
"감히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날 무시하는 거냐고!"
그녀의 오빠, 리처드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궁에서 쫓겨난 이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마탑에서 왕이 습격당했을 때, 리처드는 반역자들과 한패라는 고발을 당했다. 조사 결과 정말 왕에 대한 정보를 반역자들에게 흘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프림로즈 가문에선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리처드의 목숨을 구해 냈다. 어떻게 발을 밸 수 없을 정도로 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처드 본인은 모든 것이 이블린 하인즈의 음모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게 자신을 더 우습게 만든 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대답해 봐! 너희 모두 나무에 매달아 줄까? 어?"
“오라버니, 이제 그만하세요.”
죄 없는 하인들을 때리던 리처드가 그녀를 돌아봤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갑자기 히죽 웃었다.
“오, 이게 누구야! 내 귀여운 동생 마리아 아냐?”
마리아는 애써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술이 너무 과하셨습니다. 어서 쉬러 가세요.”
“에이, 딱딱하게 굴지 말고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비틀거리며 다가온 리처드가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 지독한 술 냄새에 마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벽에 쿵 소리 나게 부딪친 리처드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를 방으로 모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느낀 마리아가 호위 기사에게 손짓하는 순간이었다.
리처드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했다. 어찌나 세게 잡는지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마리아가 비명을 삼켰다.
"마리아, 너는 하나뿐인 오라비가 이 모양이 됐는데도 계속 궁에 드나들더라? 왜? 너 혼자라도 잘되고 싶어?“
리처드가 핏발이 선 짐승 같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오싹 소름이 돋은 마리아가 몸을 뒤로 뺐다.
“오라버나 아파요. 손을 놓아주세요.”
"애초에 네가 잘해서 그 계집애를 궁에서 쫓아냈으면 이런 일도 안 생겼잖아!"
리처드가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급히 달려온 호위 기사가 억지로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리처드가 기사 에게 끌려가며 소리쳤다.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시집가서 가문을 살릴 생각이나 해! 너 같은 계집애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
마리아는 멍이든 손목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왜 하필 지금 이블린의 말이 생각나는 걸까.
"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고용인들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을 느낀 마리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시간이 늦었구나. 다들 돌아가서 쉬렴.”
“예, 아가씨.”
모두가 흩어진 후, 그녀는 아버지 프림로즈 후작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리처드가 또다시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해야 해.’
소란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은 참아 줄 수 없었다. 화가 난 마리아는 노크도 없이 서재의 문을 열었다.
흐릿한 불빛이 통신용 마도구를 손에 든 후작의 모습을 비췄다 후작은 누군가와 연락 중인 것 같았다.
당황한 마리아가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리처드는 프림로즈의 유일한 후계자야. 왕이 우리 가문을 끝까지 내칠 수 있을 것 같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유일한 후계자라는 말이 오늘따라 유독 귀에 거슬렸다.
‘내가 리처드보다 못한 점이 대체 뭐지?'
리처드를 살리기 위해 프림로즈 가문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그리고 그를 후작 자리에 올리기 위해선 더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가 후작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저도 모르게 생각을 이어 가던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차라리 내가-라니,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딸이 가문을 잇는 일은 아들이 없을 때에만 일어났다. 리처드처럼 아들이 장남일 경우에는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그때, 통신구에서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실 건가요? 이대로 아드님이
후작이 되면 프림로즈의 영광스러운 이름에 반역자와
내통했다는 말이 따라다닐 거예요. 영원히 말이에요.
”라리사, 오늘따라 유독 나를 긁어 대는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똑바로 말하게.”
‘라리사?’
마리아가 아는 라리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설마 라리사 모어? 클라멘스 백작 부인으로 강등당한 후엔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줄 알았는데…….’
마리아는 과거 라리사가 아버지와 불륜 관계라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의심이 되살아난 그녀는 책 장 뒤에 숨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드님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이블린 하인즈부터 끌어내려야 해요.
"공작이고, 왕이고 그 계집을 꽁꽁 둘러싸서 보호하는데 무슨 수로?“
-다른 노력은 해 보셨나요?
"암살자를 수십 번이나 보냈지만 실패했네. 그 계집을 지켜 주는 행운의 신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마리아는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아버지가 이블린을 죽이려 암살자를 보냈다니.
-그럼 북부를 이용하면 어떨까요?
”북부를?”
-북부 지방은 최근 3년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죠. 그래서 북의 수장인 발타자르 변경백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수도로 오고 있어요.
마리아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북쪽에서 사람이 온다고 다들 난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북부의 주장일 뿐이죠. 야만인이 하는 말을 어떻게 다 믿겠어요?
북부는 다른 지방과 달리 이민족의 숫자가 많았다.
왕국에 속하게 된 후에도 북부는 야만적인 풍습과 종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앙의 귀족들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정말로 가뭄이 들었는지, 아니면 가뭄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라리사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리아는 거기에 담긴 독기를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여자는 북부와의 전쟁을 바라는 건가?
“설마 북부의 구조 요청을 거절하라는 뜻인가? 그러다 잘못하면 진짜 전쟁이 터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후작님은 회의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의문만 던져 주시면 된답니다. 화합을 망치는 건 후작님이 아니라 이블린 하인즈가 될 테니, 책임도 그녀가질 거예요.
마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가 늘어놓는 계책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