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무슨 정신으로 이블린을 방 안으로 옮겼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물가에 놓인 갓난아기처럼 허겁지겁 안아든 기억만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잠깐 눈을 뗄 때마다 이블린은 창문에 매달려 있거나, 반성실에 갇혀 있거나, 괴물에게 덤벼들거나, 괴수의 입 앞에 앉아 있었다.
‘이 말썽쟁이 같으니.’
덕분에 악몽의 여운이 훨훨 날아갔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깨어났다면 이블린은 나무에서 거꾸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섬뜩해졌다.
그사이 이블린은 그의 방을 열심히 탐색하고 있었다. 그저 잠만 자는 곳일 뿐, 특별히 꾸민 것도 없는데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진지하게 구경 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잠깐 내버려 뒀더니 졸래졸래 침대로 간 이블린이 제자리인 양 털썩 걸터앉았다.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비?"
아무리 그라도 제 침대 위에 약혼녀가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평온을 유지하긴 힘들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그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은 이블린이 침대를 톡 톡 두들겼다.
"빨리 이쪽으로 와요. 재워 준다니까"
"······."
신이시여 세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왜 남자의 침대에 앉아서 조그마한 발을 흔들고 있으면 안 되는지 설명하는 대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블린은 얌전히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부드럽게 안겨 드는 작은 몸에 다시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속셈을 말해 봐.”
"진짜 속셈이라니! 저는 세스가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돼서 온 거라고요.”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지?"
"시종장이요.”
시종장도 이블린이 한밤중에 여기로 숨어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꿰매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당신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어.”
세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걱정하는 게 싫어요?"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작게 키득거린 이블린이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접촉에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뛰었다. 신이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세스, 잠이 안 오면 잠깐 나갈래요?"
“어디로?"
어디든 침대가 바로 뒤에 있는 지금 상황보단 나올 것 같았다. 이블린이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원이요. 우리 밤 산책해요.”
세스는 이성적인 판단을 잠시 접어 뒀다. 같이 산책 나가자고 조르는 그녀를 거역하고 싶지도 않았다.
"까미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창문으로 나가면 돼요.”
"까미?"
“제가 복실이 엄마에게 붙여 준 이름이에요. 괜찮죠?"
검은 비늘을 갑옷처럼 두른 바실리스크에겐 너무 귀여운 이름이었다.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바실리스크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에 하얀 점처럼 얹혀 있는 것은 복실이였다.
-꾸우! 꾸우!
두 사람을 본 복실이가 신이 나서 춤을 췄다.
"쉿, 복실아. 그렇게 소리 내면 들켜.”
복실이에게 주의를 준 이블린이 그에게서 벗어나 창문을 넘어가려 했다. 바실리스크의 머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이비, 그냥 나를 붙잡아.”
위태로운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세스는 그녀를 품에 안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의 모습에 이블린이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꾸!
그 순간, 복실이가 겁도 없이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세스는 반사적으로 복실이를 받아 냈다.
“자, 잡았어요?"
”······응.“
"복실아, 거기서 뛰어내리면 어떡해? 위험하잖아.”
이블린이 복실이를 받아 안고 야단을 쳤다. 그러자 복실이가 억울한 눈으로 세스를 쳐다봤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세스는 칭찬을 받고, 자선은 혼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아빠는 크잖아. 복실이는 아직 작아서 그런 위험한 짓 하면 안 돼. 아야 해!"
-뿌······.
토라진 복실이가 이블린의 품에 머리를 박았다. 세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블린이 그를 복실이의 아빠라고 말할 때마다 가족으로 묶이는 느낌이었다.
‘이게 진짜라면 좋을 텐데.’
“세스?"
세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무슨 감정이 전해진 건지, 작게 키득거린 이블린이 속삭였다.
"빨리 정원으로 가요.”
세스는 곧 이블린이 어떻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의 방까지 왔는지 깨달았다.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어미 바실리스크가 그들을 감싸고 은신으로 기척을 없앴다. 잘 훈련된 기시들도. 그들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블린은 이것을 색다른 숨바꼭질로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굉장히 무서운 능력이었다.
‘바실리스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이블린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감사해야 할지도.’
밤의 정원은 어두웠지만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 바실리스크는 망설임 없이 길을 안내했다. 그들은 곧 유리 온실이 있는 중앙 정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르르르르······.
-삐우?
낮은 울음으로 복실이를 부른 바실리스크가 녀석을 데리고 온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까는 복실이 없이 혼자 자도 괜찮다고 하더니, 사실은 아니었나봐요.”
안타깝게도 어미 바실리스크의 배려는 이블린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둘이서 걸을까?"
"좋아요!”
둘은 말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정원의 잔디를 어루만지던 바람이 그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정원의 어둠을 바라보던 이블린이 물었다.
“세스, 만약 정원에 숨어야 한다면 어디 있을 거예요?"
“······숨는다고?"
기상천외한 질문에 세스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상대가 이블린이 아니었다면 모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낮에 세스를 찾으려고 왕궁을 돌아다녔거든요.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안 되더라고요. 세스는 매번 재가 있는 곳을 알고 찾아왔는데 말이에요.”
세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가 이블린의 행방을 꿰고 있는 건 그녀의 옆에 붙여 둔 그림자 기사들 때문이었으니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전 세스를 정말 좋아하는데, 정작 세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구나 싶어서요.”
“당신이 원하면 뭐든 말해 줄게.”
쓸쓸한 목소리를 듣자 정말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싶어졌다.
커다란 눈을 깜빡인 이블린이 말했다.
“그럼 아까 질문에 답해 주세요. 어디에 숨을 거예요?"
세스는 왜 하필 그런 질문인지 되묻는 대선 곰곰이 생각하고 답했다.
“여기라면 커다란 나무 위에 있을 것 같은데.”
“곧바로 나무 위라고 말하다니. 세스, 사실 어릴 때 말썽쟁이였죠? 사고치고 자주 나무 위에 숨었죠?"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엔 그랬던 것 같다. 오랜 과거를 회상한 세스는 거기서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럼 세스를 잃어버리면 제일 먼저 커다란 나무를 찾아야겠네요.”
"당신은 어디에 있을 건데?"
“전 덤불이나 돌 사이에 끼여 있을 것 같은데요.”
덤불 사이에 숨어 있는 고녀를 상상해 본 세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블린이 그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강해자고 싶어요?"
멈칫한 세스가 그녀를 바라봤다. 이블린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저 때문인가요?"
"······."
잠시 이블린의 눈을 응시하던 세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비, 나는 강해야 해. 누구보다 강하지 않으면 아 것도 지킬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한 이블린이 말했다.
“세스는 이미 충분히 강해요.”
“그래도 부족하다면?"
“그래서 말했잖아요. 제가 대신하겠다고.”
세스는 그녀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블린이 제 가슴을 툭툭 치며 웃었다.
“제가 주크-아니, 울부짖는 검의 주인이 될게요.”
세스는 과거 신전에서 쫓겨났던 일을 떠올렸다.
모두의 앞에서 ‘사검 바리사다의 주인’ 임을 폭로 당했던 때를.
사방에서 쏟아지던 의혹과 두려움, 경멸과 혐오가 섞여 있던 시선들.
형제처럼 여겼던 신전의 동기들이 그의 앞에서 대놓고 수군거렸다. 그 뒤로 세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싫어하게 되었다.
“미안하구나. 이건 모두를 위한 결정이란다.”
“사실은 형이 선택받길 원했던 것 아니야?”
그리고 어머니처럼 여겼던 성녀와 친동생보다 아꼈던 레오디나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살기 위해선 마음을 닫아야 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억울함과 분노, 차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갈 곳을 잃은 채로 쌓여만 갔다.
이블린을 만나고, 그녀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사실을 알면 이블린 역시 두려워하며 도망칠 거라고.
하지만 지금, 그 두꺼운 불신이 깨어졌다.
”······알고 있었어?"
"네? 뭘요?"
“내가 사검의 주인이라는 사실.”
세스는 허탈하게 물었다. 이블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크가 보여 줬어요. 세스가 굉장히 매몰차게 자길 버리고 갔다고 이르던데요?"
그녀는 그 사실이 재미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경멸도, 혐오도 없는 평범한 미소였다.
“세스에겐 주크가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주세요.”
“이비, 당신은 사검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
“다들 그런 말을 해서 오늘 퇴근하자마자 주크에 대한 책을 여섯 권이나 읽었다고요.”
눈이 빠질 뻔했다고 투덜거린 이블린이 갑자기 그를 꼭 껴안았다.
“사실은 읽는 내내 이렇게 세스를 안아 주고 싶었어요.”
세스는 떨리는 손을 들어 이블린의 등을 감쌌다. 지금 그녀를 껴안으면 힘 조절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