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어떤 방법이요?"
내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다이애나가 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제안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문을 받고 물건을 만들어 줬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선택해서 선물을 하죠.”
“선물요?"
"네, 선행을 베풀었다거나, 업적을 세웠다거나. 이유는 아무거나 좋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을 상대를 선택한다는 거죠.“
시녀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럼 한 명을 선택해서 손수건을 주는 건가요?"
“아뇨, 손수건은 하루 5장을 유지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야죠.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나는 종이를 끌어와서 빠르게 스케치를 했다. 시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 그림을 들여다봤다.
“이건 곰인가요?”
"네, 곰 인형이에요.”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불호가 갈렸던 캐릭터 자수와 달리 이건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곰 인형은 사랑이니까.
“받을 사람의 머리색과 눈 색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서 선물하는 거예요. 상징적인 옷이냐 소품을 같이 만들어도 좋고요.“
그때, 내 그림을 보던 핀이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이 곰은 왜 두 발로 서 있습니까?"
"······네?"
"곰은 네발로 움직이는 생물입니다만.”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여긴 동물 인형이 없나요?"
"당연히 있죠. 곰 인형은 드물지만 곰의 가죽과 털을 사용해서 만들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린 것처럼 이상하게 생기고 두 발로 서 있는 인형은 없어요.”
마리아가 냉정한 얼굴로 선언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른 시녀들을 돌아봤다.
“지, 진짜 없어요?"
"글쎄요, 동물 인형은 대부분 네발 자세라서.”
“원숭이 인형이 두 발로 서 있는 건 봤는데요. 그것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지만요.”
아니, 아무리 팍팍한 세상이라도 곰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여기선 아기 곰 푸우가 태어나긴 글렀다.
“이 인형이 제 고향에선 굉장히 인기가 있었거든요. 만들어 놓으면 굉장히 귀여운데.”
"저도 귀엽다고 생각해요!"
다이애나가 열심히 내 편을 들어 줬다. 앤도 눈치를 보다가 덧붙였다.
"저도 귀여운 것 같은데…….”
"좀 이상하지 않아?“
카밀라야. 시끄럽구나.
나는 마지막 시녀인 벨라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벨라가 고개를 숙였다.
"저, 전 잘 모르겠어요."
달달달 떨리는 목소리에 다시 물어볼 수가 없었다.
‘3별로다와 3귀엽다가 맞서는 상황인가.'
내가 심란한 표정을 짓자 다이애나에게서 내 쪽으로 넘어온 복실이가 부부-우는 소리를 냈다. 녀석은 꼬리로 콕콕 내 그림을 찍으며 마음에 든다는 표시를 했다.
미안해, 복실아 네 의견은 다수결에 넣을 수가 없어.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곰탱이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훈련으로 신나게 구르다가 왔는지 조금지친 표정이었다.
반색한 나는 녀석을 불렀다.
"곰탱아, 이리 와 봐!"
"응!“
나를 본 곰탱이가 반가운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녀석에게 그림을 보여 주었다.
“이 곰 인형을 어떻게 생각해?"
"귀여워!"
네, 4귀엽다로 귀엽다의 승리입니다!
만세를 부른 나는 의기양양하게 마리아를 쳐다봤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마리아가 말했다.
"좋아요. 귀엽다고 쳐요. 자기를 닮은 곰 인형을 받는 사람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
당연히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쪽 문화에선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일단 저 혼자 만들어서 반용을 볼게요. 만약 반용이 괜찮으면 의상부에서 같이 만드는 걸로 하죠.”
“당신 혼자서요?"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고, 재료를 구해 줄 사람도 있으니까 도안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요.”
아, 그러고 보니 도안 문제가 있었다.
내 수준은 딱 원데이 클래스 이상, 취미반 이하였다. 방법은 알지만 도안 없이 만들 정도로 전문가는 아니다.
‘도안이 어떤지 대충은 기억해도 정확한 치수는 모르니까.’
고민하던 나는 문독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다.
"참. 침방의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요?"
“뭐요?"
"거긴 전문 장인들이 있으니까, 도안만 도움을 받아서 협업을 하면 ······.”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바늘에 움찔했다.
“지금 적에게 정보를 넘기겠다는 말인가요?"
"진정해요, 마리아. 협업은 나쁜 게 아니에요. 양쪽 모두 명성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우리 명성을 빼앗기는 거겠죠. 재가 여기 있는 한 침방과 손을 잡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마리아가 척화비를 세울 기세로 말했다. 당황한 나는 다른 시녀들을 돌아봤다.
“저도 이블린의 뜻을 잘 모르겠어요. 저희의 실력으로는 이걸 만들 수 없는 건가요?"
항상 내 편이었던 다이애나가 반대표를 던졌다. 앤과 카밀라도 마찬가지였다.
“침방 같은 곳의 도움이 없어도 잘 해낼 수 있어요.”
“개들한테 우리 걸 나눠 줘야 하는 이유가 뭐야?"
“침방에게 공을 뺏기느니, 다 끌어안고 죽을래요.”
안 그래도 음침한 분위기의 벨라가 축는다는 말을 하니 공기까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재빨리 항복했다.
"저는 여러분이 만들기 싫어하는 줄 알고 그랬죠."
마리아가 내 앞에 새로운 종이와 펜을 탁 내려놨다.
“당신은 그림이나 그려요.”
“네? 무슨 그림이요?"
"곰 인형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요. 만드는 법을 적어 주면 더 좋고.”
나는 마리아의 취조를 받으며 곰 인형 만드는 과정을 종이에 적었다. 소재나 필요한 도구들, 내가 기억하는 도안의 모양까지 열심히 그렸다.
그사이 시녀들은 도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논하고 있었다. 패턴이 어쩌고, 마네킹이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해결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하죠.”
“침방이 넘보지 못하도록 기밀을 유지해야 해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시녀 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임무를 나눠 가진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 나만 왕따시키는 거야?
“이블린,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한 도안은 금방 만들어 올게요.”
다이애나가 상냥한 미소로 나를 위로했다. 반면 마리아는 내 어깨 위에 있던 복실이를 덥석 집어 들었다.
“인질을 데려갈 테니,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꾸우?
인질이라고 말하면서 복실이를 다루는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혼내 주겠어.”
험악한 말과 달리 마리아는 복실이의 머리에 작고 노란 모자를 씌워 주었다. 혼자 똑 떨어져서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했더니, 저걸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솔직하게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하면 될 텐 데.’
자존심 강한 귀족 아가씨는 꽤 힘든 직업인 것 같다.
그런 마리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핀이 뜻밖의 말을 던졌다.
“프림로즈 양은 아가씨에 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군요."
“네?"
나는 황당한 눈으로 핀을 쳐다봤다. 방금 마리아가 제 눈에 바늘을 겨누는 거 못 보셨나요.
"계속 반대하는 척하면서 모두가 아가씨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었잖습니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는 유능해 보이고 싶은 것 같습니다.”
"왜요?"
“그게 자신을 쫓아내지 않은 아가씨에게 보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일 수도 있고요.”
핀은 잘 나가다가 가끔 엉뚱한 착각을 한다. 아무래 도 머리가 너무 좋으면 이상한 쪽으로 엇나가는 모양이다.
‘마리아가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할 리가 없잖아.’
“저기, 나 이거 갖고 싶어”
그때, 곰탱이가 내가 그린 곰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같은 곰이라서인지 한눈에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만들어 줄게.”
곰탱이뿐만 아니라 주변에 신세 진 모두에게 곰 인형을 선물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먼저 만드는 곰은 은색으로 반짝이는 세스 곰이 될 예정이었다.
***
보이는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옥처럼 뜨거운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그의 폐를 태웠다. 지독한고통속에서 세스는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다. 매번 반복되는 꿈.’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선 복도를 지나 죽어 가는 아서 엘마이어를 만나야 했다.
이제는 자신보다도 어려진, 열아홉 살의 형을. 세스는 열기로 타들어 가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복도의 끝에, 무너진 기둥에 깔린 아서가 있었다. 죽어 가는 형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꿈에 서 깨어나는 것이 세스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아서.’
세스는 자신을 벌하기 위해 반복해서 죽음을 당하는 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무너진 기둥 아래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익숙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카락이, 피와 재에 더럽혀진 채로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안 돼.’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이블린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허억!"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 세스는 덜덜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꿈이라고 되뇌어 봐도 경련하는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비.”
지금 당장 그녀가 무사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이렇게 미쳐 날뛰는 들개 같은 모습으로 이블린을 보러 갈 수는 없었다. 세스는 이를 악물고 숨이 벚을 것 같은 불안감을 이겨 냈다.
이상하게 일그러지던 시야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톡!
그때 아주 작은 소리가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날카로워진 신경이 다시 한 번 톡 하고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를 잡아냈다.
침대에서 벗어난 세스는 소리 없이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밖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은 이블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스는 다급하게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비?"
"재 워 주러 왔는데, 들어가도 돼요?"
한밤의 불청객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