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 *
나는 피오나의 허락을 받아 잠깐 왕궁을 산책했다.
불가능한 미션을 받아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도중에 세스와 만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스가 매번 나를 찾아내는 것과 달리 나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우연히 라도 마주쳐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늦었어요? 우린 벌써 일을 다 끝냈다고요.”
심란한 마음으로 돌아온 나를 카밀라가 콕콕 쪼아 댔다.대꾸하기도 귀찮았던 나는 휘휘 손을 저었다.
“워워-”
“뭐? 내가 말인 줄 알아요? 기껏 걱정해 줬더니!"
팩 토라진 카밀라가 마리아 옆으로 가 버렸다.
아니, 그게 걱정해 준 거였다니. 새삼 놀랍군.
그때 소란을 듣고 고개를 든 다이애나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이블린 ! 여기 와서 복실이 좀 봐요!"
-뿌!
나와 눈이 마주친 복실이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몸의 다른 부분은 앤과 벨라에게 붙잡혀서 꼼짝도 못하는 것 같았다.
“어때요? 예쁘죠?"
”······네, 정말 예쁘네요.”
복실이는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꽃과 리본,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아직도 남은 부위에 리본이 묶이는 중이었다.
"복실아, 이것도 해 보자.”
"복실이는 노랑 리본이 더 잘 어울린다고요.”
“제가 볼 때는 빨강이 더 잘 받거든요?"
-뿌우!
다행히 복실이도 무척 행복해 보였다. 새로운 추종자가 잔뜩 생겨서 기본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이 좀 더 줄기도록 내버려 두고 의자에 앉았다.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맞은편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뒤적거리던 핀이 인시를 건댔다. 직장 동료다운 담백하고 깔끔한 태도에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오랜만이에요. 핀 그동안 잘 지냈어요?"
“덕분에요. 오늘은 수비대의 훈련이 늦게 끝나서 미처 마중을 가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중은요. 그런데 훈련이 힘든 모양이네요. 굉장히 피곤해 보여요.”
"북쪽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해서요. 아침과 저녁 훈련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는 시간도 다소 늦어질 것 같습니다.“
핀은 곰탱이는 아직 훈련 중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내 궁금증을 풀어 줬다. 수비대인 핀과 달리 왕실 수호 기사단으로 옮긴 곰탱이는 빡세게 구르는 듯했다.
“다들 고생이 많네요.”
“아가씨만큼은 아니지요. 마탑에서 집채만 한 괴물을 단칼에 베어 버리신 영웅담을 듣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네?"
“아가씨가 전설의 키메라를 베었다거나, 마탑주를 무릎 꿇렸다거나, 대머리인 적의 수장을 꾸짖어 울게 만들었다거나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돌고 있어서요.”
아니, 소문이 갈수록 이상하게 변형되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떻게 진실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농담은 이쯤 해 두고,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따라 표정이 영 좋지 않으신데요.”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놓은 핀이 상담을 해 주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받은 불가능한 미션을 공유하기로 했다.
“사실은 제가 사이가 나빠진 둘을 화해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는데요.”
나는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했다. 진지한 태도로 내 말을 끝까지 들은 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안 되겠는데요? 남자가 너무 쓰레기군요.”
"근데 여자 쪽 소문도 그리 좋진 않아서요."
“그런 건 믿으면 안 됩니다. 남자가 자기 혼자 욕먹기 싫어서 여지를1 나쁘게 만들려는 겁니다.”
핀은 전형적인 나쁜 놈의 수법이라며 피오나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럼 어떻게 하죠?"
“그냥 포기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아무리 애써 봤자 아가씨만 중간에서 욕을 먹어요.”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포기할 처지가 못 됐다. 명령을 한사람이 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핀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게 힘들다면 둘 사이를 확실히 찢어 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관계가 아예 망가져 버리면 화해시키라고 강요하지도 못하겠지요.”
“호오?”
"여자 쪽이 아직 나쁜 놈에게 미련이 있는 거 같은데, 이참에 현실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기립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명쾌한 답이었다.
“핀, 정말 대단해요! 앞으로 진짜 존경할게요!"
열렬한내 반용에 핀이 코끝을 쓱 문질렀다.
“제가 잘난 것은 알지만 칭찬을 받는 건 역시 좋군요.”
그러고 보니 핀의 말을 들어서 결과가 나빴던 적은 없었다. 성검이 보고를 어지르고 다닐 때도 핀의 말대 로 장난감을 줬더니 바로 해결이 됐었지 . 대신 피오나가 고통을 당했지만.
“전 항상 신세만 지는데, 제가 핀을 도울 일은 없을 까요? 아니면 지금 갖고 계신 서류라도 제가 볼까요?"
“아, 이건 서류가 아닙니다. 그냥 손수건 주문서예요.”
핀이 씩 웃으며 종이 뭉치를 보여 주었다.
주문서를 쓰지도 않고 예약했다고 우기거나, 자신이 먼저 신청했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아서 모든 주문서를 날짜별 시간별로 정리해서 들고 다닌다고 했다.
"들고 다니지 말고 그냥 여기 두면 어때요?"
"처음엔 그랬지만, 문을 따고 들어와 예약 순서를 바꾸려고 한 자가 있어서 그냥 가지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우와, 무슨 일이야. 손수건 하나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잔뜩 지친 핀의 얼굴이 진상과 오랜 기간 싸워 온 백전노장처럼 보였다.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으셨네요."
“그래서 말인데, 손수건 숫자를 하루 열 장으로 늘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루 다섯 장은 너무 적다는 항의가 들어오는 중입니다.”
"으음.“
내 계산대로라면 지금쯤 손수건의 인기가 시들해졌어야 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원래 의상부의 시스템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나와 관련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오히려 손수건을 원하는 사람들이 몇 배로 늘어났다. 핀의 말에 따르면 이제 예약이 년 단위로 밀려 있다고 했다.
"뭐 때문에 망설이는 거죠?"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마리아였다. 복실이를 귀여워하는 시녀들과 혼자 뚝 떨어져 앉아 뭔가를 만들던 그녀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제 와서 다른 시녀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감상적인 이유 때문인가요?"
“아니, 그게······.”
많이 만들어도 딱히 이득이 없어서 그런 건데. 손수건이 잘나가서 내가 유명해진 게 아니라, 내가 유명해 져서 손수건이 잘나가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이걸 설명하면 잘난 척한다고 여길 것 같았다.
"저, 저도 손수건 제작을 늘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때, 캐릭터 그림 제작을 맡고 있는 앤이 말을 보랬다. 복실이를 꾸미는 것에 정신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집중되는 시선에 당황한 듯이 얼굴을 붉힌 앤이 겨우 말을 이었다.
"피어슨 경의 말처럼 하루에 만드는 손수건 양이 너무 적다는 항의가 있어서요. 왕실 침방 쪽에선 우리에게 주문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명단을 넘기라는 말까지 하고 있어요.”
왕실 침방은 꽤나 콧대 높은 곳이었다. 왕국 제일의 장인들이 모여서 왕족을 위한 옷을 만든다고 들었다.
그런 곳에서 우리 공장을 노릴 정도로 명성이 높아 졌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좀 흐뭇하기도 했다.
“경고하는데, 왕실 침방에 명단을 넘기자고 말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마리아가 바늘을 내 쪽으로 겨누며 경고했다. 수틀리면 내 눈이라도 찌를 기세였다.
“이건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닌걸요. 여러분이 더 많이 고생했는데 제 마음대로 넘길 수야 없죠.”
내 대답에 마리아가 안심한 듯 손을 축 늘어뜨렸다. 다른 시녀들도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모두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데요. 혹시 손수건 제작을 늘리고 싶은 사람 있나요?“
놀랍게도 모든 시녀들이 늘리는 쪽에 손을 들었다.
“많이 만든다고 딱히 좋아지는 건 없는데요? 그냥 일거리가 늘어나서 귀찮기만 할 텐데요?"
“대신 명성이 올라가겠죠.”
핀이 단호하게 내 말에 답했다.
“지금 의상부의 명성은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소속 시녀들의 이름과 얼굴까지 모두 알려질 정도죠. 그래서 침방 쪽에서도 손수건 제작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저, 그리고 사실 세 달 치는 벌써 다 만들었어요.”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나는 뜻밖의 작업 분량에 깜짝 놀랐다.
“자주 안 나오는 당신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우린 정말 심심하다고요. 하루 종일 순서를 기다리면서 수놓는 거 외엔 할 게 없으니까요. 알겠어요?"
카밀라의 투덜거림에 미안해진 나는 손수건 제작 제 한을 풀기로 결심했다.
“그럼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양이 어느 정도인지 의논해 봐요.”
이번엔 결과가 빠르게 나오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밀라와 최대한 안전하게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이애나가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측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부족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던 나는 손을 들었다.
“저기,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열심히 의논하던 두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손수건의 양을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조절하면 지금보다 의상부의 명성이 높아질까요?"
손수건의 양을 얼마나 늘리든 명성을 유지하는 것에 도움은 되겠지만, 높이는 데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빡빡한 제한이 걸려 있는 지금이 한정판처럼 소장 욕구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것보다 좀 더 공격적인 방법을 쓰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