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제일 먼저 네 개의 장식대가 눈에 띄었다. 뭔가가 놓여 있었던 자리 같은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운데 서 있는 날개가 달린 조각상온 양손에 거의 박살 난 은상자를 들고 있었다. 부서진 상자 역시 속이 텅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뭐가 남아 있어야 보고 추리를 하죠. 난감해하는 나를 알아차린 왕이 답을 말해 주었다.
“이 상자의 이름은 ‘슬픔’이라고 한다. 천공신 아스트라이아가 내려 줬다는 봉인구지 . 원래는 그 속에 울부짖는 검이 들어 있었다.”
"······.“
“그런데 오늘 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블린 뭔가 아는 것이 있느냐?”
날카로워진 왕의 목소리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본능적으로 지금 잘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고해라.”
“폐하께선 검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하셨지만, 저는 보고를 돌아다니는 검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시녀장님도 보셨고요.”
심지어 검이 보고를 뒤집어엎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대청소까지 해야 했다. 억울함이 담긴 내 반박에 왕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본 단검은 울부짖는 검이 만들어 낸 일종의 분산이다. 진짜 검은 계속 이 상자 안에 봉인되어 있었지.”
“하지만…… 없는데요?"
“그렇구나. 왜 없을까?"
왕은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나는 검이 여기 있다는 것도 몰랐던 사람이다.
“폐하께선 제가 검을 빼돌렸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랬다면 보고에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했겠지. 하지만 네 영향으로 검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나는 주크에게 장난감 가져다주고, 노래 불러 주고, 복실이룰 소개한 죄밖에 없었다.
‘왠지 셋 다 문제일 것 같아서 좀 찜찜하군.’
어쨌든 나는 검을 가져가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의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왕은 그럴 리가 없고, 피오나도 검을 홈치면 보고에서 나갈 수 없으니 범인이 아니었다.
‘검이 혼자서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응? 사라져?'
나는 홀린 듯이 은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눈치챈 피오나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왕이 제지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만졌다. 상자에서 아주 오래된 힘의 흔적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자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여기엔 이미 주크를 묶어 둘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왕의 말대로 봉인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납치 사건이 아니라 단순 가출인데?'
주크 혼자 보고를 나갈 순 없으니 이 안 어딘가에 숨 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난리를 쳐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주 단단히 작정한 거다.
‘잘 있던 애가 갑자기 가출할 정도의 일이 뭐가 있지?'
순간 내 머릿속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던 사람의 얼굴이 퐁 떠올랐다.
“폐하, 혹시 오늘보고에 공작님이 들어오셨나요?"
"······."
"들어오셨죠?"
내 추궁에 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바로 맞다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추리는 완성됐다! 범인은 바로 김세스다!
"세스는 검을 가져가지 않았다. 나와 함께 보고에 들어왔고, 녀석이 봉인을 풀었을 땐 이미 상자 안에 검이 없었으니까.”
왕은 세스가 범인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나는 세스가 검을 가져갔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번 일은 그냥 가출 사건이에요. 주크가 가출한 이유는 공작님 때문이고요.”
“주크?”
“아, 제가 지어 준 성검의 이름이에요. 어쨌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요.”
혼자 납득한 나와 달리 왕은 여전히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블린, 똑바로 설명해라. 뭐가 문제고, 뭐가 해결 된다는 거지?"
아니, 이걸 왜 이해를 못 하지.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되잖아 나는 황당해하며 설명했다.
“폐하께서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데요, 그 사람은 폐하가 싫대요. 아무리 잘해 준다고 해도 싫대요. 너랑 같이 안 살겠대요.”
“뭐라고?"
왕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나는 비굴하게 변명했다.
"예를 들어서 하는 말이에요. 이렇게 설명하면 폐하께서 좀 더 잘 이해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번뜩이는 왕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애써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폐하가 귀찮다고 창고 같은 곳에 가둬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폐하는 창고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그 사람과 만날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거죠.”
"······."
왕도 이제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성검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야 주크를 가뒀던 ‘창고‘안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혼자서 반항도 해 보고, 괜히 지나가는 남한테 그 사람 데려오라고 꼬장도 부리고, 머리채 풀고 막살다가 겨우 새 친구를 만나서 마음을 바로잡았거든요?"
나는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사람이 딱 나타난 거예요. ‘생각해 보니 나한텐 네가 필요해.’ 이러면서요. 그럼 폐하는 어쩌시겠어요?"
“그놈의 목을 치겠다.”
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뇨, 치지 마세요. 저한테는 소중한 목이거든요.”
“아니, 뭐 그런 못된 놈이 다 있단 말이냐!"
나는 흥분한 왕을 달래기 위해 한참을 애써야 했다. 왕은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보고 욕하는 사람처럼 한참을 씩씩거렸다.
“어쨌든 주크의 입장은 그런 거예요. 공작님이 좋은데 밉기도 하고, 그러니까 도망을 간 거죠.”
이것이 내가 추리한 ‘성검 가출 사건’의 전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주크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거의 틀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건 별 방법이 없어요. 공작님께서 주크를 잘 달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시간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둬야죠.”
“그냥 헤어져라!"
나도 둘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남이 간섭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공작님은 왜 주크가 필요하신 거예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세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한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입을 꾹 다문 왕이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혹시 제가 여쭤보면 안 되는 거였나요?"
그러자 머리에 꿀밤이 쿵 떨어졌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란 나는 맞은 곳을 감싸 쥐었다.
“생각해 보니 이게 다 너 때문이지 않느냐?"
“예? 저요?"
“그래, 네가 원흉이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원흉이라는 거야.
하지만 왕은 매우 당당하게 억지를 썼다.
“그러니까 네가 책임지고 검의 마음을 돌려놔라.”
"예? 제가요?"
제가 방금 이건 방법이 없다고,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폐하.
“이건 왕명이다, 이블린. 울부짖는 검이 다시 세스의 말을 듣도록 만들어라.”
갑자기 미션 임파서블이 시작되어 버렸다.
모든 회사원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사회생활 팁이 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나는 왕 앞에서 추리를 한 죄로 성검의 연애 사업에 끼어들게 되었다. 상대는 에어컨 대마왕인 세스.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였다.
보고 밖으로 나온 나는 지금 당장 사직서를 쓸 계획을 세웠다.
“시녀장님, 저 혹시 퇴직해도 되나요?"
“퇴직을 해도 왕명은 수행해야 합니다.”
그럴 수가. 십 분 전으로 돌아가 왕에게 지껄이는 내 입을 마구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블린, 폐하의 처사가 많이 원망스러운가요?"
"······아뇨.”
"원망스럽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폐하께서 이블린에게 너무하신 건 맞으니까요.”
피오나가 미안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본론이 뒤에 나오니까.
“다만 울부짖는 검의 통제력을 잃은 것은 국가적인 문제랍니다. 폐하께서도 워낙 답답해서 하신 말씀이고, 이블린이 해내지 못해도 벌을 주진 않으실 거예요.”
"통제권을 잃은 게 왜 문제가 되나요?"
주크가 그냥 혼자서 가출한 것뿐인데.
“전에도 말했지만 그 검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것을 성검이라 부르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네?"
나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고 보니 왕은 주크를 그냥 울부짖는 검 이라고 불렀고, 피오나는 그 검이라고만 말했다 정확히는 언급하기도 싫어했다.
‘하지만 주크는 성검인데.’
왜냐하면 주크가 자신이 성검이라고 말했으니까.
야! 나는 성검이라고! 날 버리고 가서 네가 잘될 줄 알아?
세스가 자신을 버리고 갔을 때 분노하며 외쳤던 말 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건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그 검을 사용하지 않고 봉인한 것은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방식대로 비유하자면 남자를 마구 끌어들여서 잡아먹는 악녀 같은 존재예요.”
“예? 주크가요?”
갠 그냥 하루 종일 노래 부르는 베짱이 같은 애인데.
하지만 피오나는 주크가 나쁘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 서 말했다. 아무래도 세스를 나쁜 놈처럼 묘사한 내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시녀장남 걱정하지 마세요. 전 공작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세스가 나쁜 사람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무조건 세스의 편이니까.
내 말에 피오나가 아주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서 조심을 시켜야 할지, 아니면 당신의 근거 없는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아주 상냥하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블린, 당신이라면 그 검을 정말 성검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야기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시녀장남 걱정하지 마세요. 전 공작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세스가 나쁜 사람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무조건 세스의 편이니까.
내 말에 피오나가 아주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서 조심을 시켜야 할지, 아니면 당신의 근거 없는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아주 상냥하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블린, 당신이라면 그 검을 정말 성검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