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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80화 (80/240)

80화

“이비, 오늘은 건물 안까지 배웅해도 될까?"

세스의 속삭임에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옷은 세스가 한쪽 팔을 내밀었다. 나는 소금물에 절여진 오이처럼 시들거리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다다닥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약간 소름 돋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걸까요.”

“마탑과 신전, 그리고 당신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입궁한 사람들인 것 같군.”

별생각 없이 투덜거린 말에 성실한 답변이 돌아왔다. 놀란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훑어봤다.

마탑 출산임을 티내듯이 로브를 입은 사람과 신전 에서 온 것처럼 두건을 눌러쓴 사람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마탑과 신전에서 무슨 일로 온 거죠?"

“당신에게 죄를 지었으니 빌러 와야지."

응? 선전은 그렇다 쳐도, 마탑이 나한테 무슨 죄를 지었지?

하지만 뭔가를 묻기도 전에 멀리서 왕실의 전령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왔다.

“전하! 폐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지금 당장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령은 내 마음이 급해질 정도로 세스를 재촉했다. 하지만 세스는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기다려라.”

“전하!"

"약혼녀를 배웅하는 짧은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 건가?"

“전하, 하오나 폐하께서 기다리시는데…….”

전령이 계속 따라오며 눈치를 줬지만 세스는 꿋꿋하게 나를 의상부 대기실 앞까지 데려다줬다.

"여기까지 같이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봐요.”

"······."

작별 인사를 건네자 세스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 얼굴을 기억해 두려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세스?"

"응, 나중에 다시 만나.”

세스는 내가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야 떠났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세스의 느낌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오래 고민할 틈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달려온 다이애나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블린 정말 보고 싶었어요!"

눈물을 글썽 이는 그녀에게서 기쁨과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느껴졌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다이애나."

"거짓말 이틀에 한 번밖에 편지 안 보내 줬잖아요.”

“아이고,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줘요.”

집에 초대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편지만 계속 보냈으니 다이애나도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사실 연락을 자주 못 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건 조금 있다가 말해 줄게요.”

나는 그녀를 달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두 눈에 물음표를 그린 다이애나가 겨우 나를 놓아줬다.

“당신!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 아닌가요? 그러고도 의상부의 상급자라고 할 수 있어요?"

다음 타자는 빨강 머리 카밀라였다.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이 꼭 심통 난 어린애를 보는 듯했다.

“이든 양도 내가 자주 안 와서 섭섭했군요.”

"누가 섭섭해요? 이건 질책하는 거거든요?"

“아, 아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미중 나와 준 것 봤어요. 정말 고마워요.”

"구경하러 간 거예요! 대체 무슨 염치로 이제야 입궁을 했나 확인하러 간 거라고요!"

카밀라가 머리색만큼이나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슬쩍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에이,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없어서 많이 심심했죠?"

”으.뉘.그.든.여!"

카밀라가 이를 깍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놀렸다간 폭발할 것 같았다. 웃으며 시선을 돌린 나는 무표정한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 이거 내 예상보다 더 심각한데.’

사실 복귀하면서 제일 걱정했던 것이 마리아와의 관계였다. 내가 마리아의 오빠인 얌생이를 반역자와 한 패라고 고발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억울하다고 버티던 얌생이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궁에서 쫓겨났다. 목숨을 건지는 대신, 가문의 기둥뿌리 하나를 뽑아서 왕에게 바쳤다고 들었다.

이런 상황에 마리아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저, 마리아.”

"왜요? 제가 여기 남아 있어서 놀랐나요?"

마리아가 싸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 그게 무슨······?"

“기대에 부용하지 못해서 미안하군요. 하지만 리처드 그 작자와 제 일은 별개의 문제예요. 당산이 뭐라고 해도 저는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냥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

"음, 솔직히 말해서 전 그 사람이 마리아의 오빠인 줄도 몰랐어요. 둘이 전혀 안 닮았잖아요?"

야무진 마리아와 흐리멍덩한 얌생이가 형제 사이라 나 유전자의 신비나 다름없었다.

“무슨 말이죠? 지금 절 모욕하는 건가요?"

마리아가 잔뜩 날이 선 얼굴로 물었다. 나는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전 정말 마리아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면 안 될까요?"

마리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쏘아봤다.

“왜죠? 제가 당신이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절 쫓아냈을 거예요.”

"마리아를 쫓아낸다고 제게 무슨 이득이 있죠?"

공장 일꾼을 하나 줄여서 나한테 좋을 게 없었다.

무어라 답하려던 마리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홈 헛기침을 한 후 덧붙였다.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마리아가 후계자가 되면 어떨까요? 오빠분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이던데요.”

"그건 당신이 함부로 입에 담을 문제가 아니에요.”

“아, 그렇죠.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사과했다. 그래도 슬쩍 선을 넘은 보람이 있는지 마리아는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 미친 사람처럼 볼 뿐이었다.

“어쨌든 오빠와 자신은 별개라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 주세요. 기대할게요.”

"······."

마리아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팩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 사이의 문제가 정리되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시녀들이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여러분,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미안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시녀들이 각자 의 방식으로 응답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의상부의 새로운 멤버를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동그랗게 모았다. 내 목뒤에 숨어 있던 복실이가 손바닥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머리에 묶인 분홍색 리본이 나비 날개처럼 살랑거렸다.

"까아악!”

”뭐야, 인형이야?"

시녀들의 반용은 격렬했다. 마리아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복실이를 바라봤다.

"시녀장님의 허락을 받아 의상부의 마스코트가 된 복실이입니다. 착한 아이니 많이 귀여워해 주세요."

-꾸꾸우!

사람들의 환호에 익숙한 복실이는 의젓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거 살아 있는 거 맞아?"

카밀라가 매우 용감하게 손을 쑥 내밀었다. 복실이가 보통 뱀이었으면 된통 물렸을 것이다.

하지만 복실이는 팬 서비스가 확실한 뱀이었기에 카밀라의 손에 애교 있게 몸을 비벼 주었다.

깜짝 놀란 카밀라가 비명을 질렀다.

"뭐야, 부드러워!"

“저도, 저도 만져 볼래요!"

시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복실이에게 함락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가장 열정적으로 복실이를 쓰다듬던 다이애나가 문득 깨달은 것처럼 물었다.

“혹시 복실이가 아까 말한 그 이유인가요?"

"네, 그동안은 복실이가 너무 어려서 제가 옆에서 계속 돌봐 줘야 했거든요.”

“제가 미리 알았으면 도우러 갔을 텐데.”

다이애나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표정이 밝아진 걸 보면 서운함이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피오나가 들어왔다. 급히 예를 표하는 시녀들에게 손을 내저은 그녀가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알현이 생략됐습니다. 의상부의 일정도 거기 맞춰서 미뤄질 겁니다. 큰 변화는 없을 테니 모두 대기하세요. 그리고 이블린 당신은 보고로 따라오세요.”

"예 시녀장님.”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었던 세스가 떠올랐다.

‘아니, 아닐 거야'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낸 나는 다이애나에게 복실이를 맡기고 시녀장의 뒤를 따랐다.

* * *

왕실 보고에 가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통과한 나는 뜻밖의 광경에 멈칫했다. 캐비닛의 방향과 위치가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모든 캐비닛이 보고 중심을 향해 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지금 보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 했다.

“이블린,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피오나의 재촉에 나는 좀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캐비닛이 만든 길을 따라 중심에 도착하자 원래 텅 비어 있던 공간에 동근 제단이 솟아나 있었다. 마치 신전 같은 느낌이었다.

"왔느냐? 이리 올라오너라.”

제단 위에 서 있던 왕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그러자 계단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헉!"

깜짝 놀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왕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커다란 동물의 동을 밟는 느낌이 들었다.

“이블린, 이곳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겠느냐?"

왕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제단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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